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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만들기’ 궁금하면 제주를 보라

조랑말 박물관·예술인창작지원센터 조성한 가시리마을, 동백나무 군락지 공유화해 기름 짜내는 동백마을 등 다양한 성공사례
등록 2016-08-03 19:39 수정 2020-05-03 04:28
제주는 ‘마을’의 원형을 품은 곳이다. 그러나 변화를 온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지난해 제주시 조천읍 선흘2리 마을체육관에서 ‘삼춘! 선흘이 지켜야 할 것 뭐우꽈’라는 주제로 마을회의를 열고 있다. 한겨레

제주는 ‘마을’의 원형을 품은 곳이다. 그러나 변화를 온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지난해 제주시 조천읍 선흘2리 마을체육관에서 ‘삼춘! 선흘이 지켜야 할 것 뭐우꽈’라는 주제로 마을회의를 열고 있다. 한겨레

전국에 ‘마을만들기’ 열풍이 불고 있다. 서울에선 2012년부터 이른바 ‘박원순 서울시장표 마을살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경기·인천·부산·경북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행복마을만들기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역마다 경쟁적으로 ‘마을만들기 콘테스트’를 벌여 결과에 따른 ‘당근 지원책’도 내준다.

제주 공식 마을 234곳

제주는 대부분 지역에서 크고 작은 마을만들기 사업을 추진한다. 제주로서는 단순히 ‘유행’을 타는 게 아니다. 제주는 마을만들기의 원형을 가장 잘 품은 지역으로 꼽힌다. 제주에서 ‘마을만들기’ 이야기를 하려면,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로부터 제주에는 ‘당 오백, 절 오백’이란 말이 있었다. 제주 민간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한 ‘당’이 500개에 이르러, 불교 기반의 ‘절’만큼이나 많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최근 한 조사를 보면, 지금도 제주에 과거 당을 모신 흔적이 400여 곳에서 발견된다. 당은 마을을 단위로 만들어졌다.

시민활동가 시절 마을만들기 초기 사업을 주도한 라해문 곶자왈도립공원 관리소장은 “제주는 지금도 마을 단위 결속력이 강한 지역 중 하나다. 과거 마을 단위로 당을 모셨던 점을 감안하면 제주에 적어도 400곳 이상 강력한 구심점을 갖춘 마을이 유지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마을살리기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리기 가장 적합한 곳이 제주”라고 설명했다.

제주에는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공동소유하는 ‘공유목장’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 4월 토지자유연구센터 자료를 보면, 제주의 공유목장은 56개소에 이른다. 1943년과 견줘 70여 년 만에 74개소가 줄었지만 여전히 초등학교 6천여 개 면적에 이르는 6327헥타르(6327만m²)의 공유목장이 제주에 남았다. 마을 주민들은 공유목장을 함께 경영하고, 여기서 나온 이익을 나누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제주에서 마을살리기가 활발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제주에서 마을만들기 사업은 최근까지 200여 마을이 참여할 만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라 소장은 “현재 제주에 공식적으로 234개 마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주 전역에서 마을만들기 열풍이 얼마나 뜨거운지 가늠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주에서 마을만들기 사업은 2001년 제주참여환경연대가 ‘아파트 시민학교’를 열면서 발걸음을 뗐다. 이들이 2007년 지역언론사 와 손잡고 ‘특별자치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분위기를 확산시켰고, 이듬해 제주특별자치도가 마을발전과를 새로 만들면서 본격화했다. 도에서는 2009년 마을만들기 지원조례를 신설한 데 이어 마을만들기 5단계 지원제도(2013년), 마을만들기 중간지원조직 체계(2016년) 등으로 지원에 나섰다.

지역특산물·관광으로 마을 경제 되살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는 마을 재산인 공동목장을 활용해 ‘마을만들기’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주민들은 이곳에 조랑말체험공원(아래)이나 풍력발전 시설을 만들어 수익을 공유하고 있다. 한겨레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는 마을 재산인 공동목장을 활용해 ‘마을만들기’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주민들은 이곳에 조랑말체험공원(아래)이나 풍력발전 시설을 만들어 수익을 공유하고 있다. 한겨레

마을만들기 사업이 시작된 지 15년이 지나면서, 여러 성과를 낸 지역을 찾아볼 수 있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는 중산간 농촌 지역에서 마을만들기에 성공한 전형적 사례로 꼽힌다. 가시리는 주민들이 대규모 공동목장을 가진 특성을 활용해 이를 문화예술과 조화했다.

가시리에는 225만 평(744만m²)에 이르는 공동목장이 있다. 조선시대 왕에게 바칠 말을 키우는 용도였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마을 단위로 주민들이 공동소유하는 형태를 띠게 됐다. 주민들은 2007년부터 공동목장을 활용해 ‘조랑말 박물관’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마차체험, 승마교실, 목축캠프 같은 관광시설을 운영한다. 이 역시 마을의 공동재산이다.

2009년부터는 예술인창작지원센터를 조성했다. 센터를 이용하는 예술인들이 말 관련 조형물과 그림을 제작해 마을에 제공한다. 원주민-외지 예술인들의 ‘선순환 교류’가 이뤄지는 셈이다. 주민 스스로를 위한 150평 규모 주민문화센터도 지어졌다. 여기서 주민들은 마을잔치, 마을밴드, 풍물동아리 같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녹음·영상실을 갖춰 ‘마을 라디오’를 운영할 수도 있다.

토지자유연구소 김성훈 연구원의 ‘제주도 공동목장 해체 실태보고서’를 보면, 지금종 당시 조랑말 박물관장은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 향유를 통한 정서 함양 기회를 제공하고, (말 관련) 체험프로그램 참여자들에게 지역특산물과 관광상품을 소비할 기회를 제공해 마을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올해로 3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가시리 유채꽃큰잔치’도 2012년부터 마을 사업권으로 되찾아왔다. 이전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번갈아가며 주최한 행사다. 마을 주민들은 축제 기간을 이틀에서 열흘로 연장하고, 입장료를 받아 마을공동경제에 활용했다.

이들은 가시리 지역화폐를 만드는 실험도 진행했다. 앞서 가시리는 제주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 일부 주민이 공동목장 개인 지분 매매에 나서자, 마을회 다수 주민이 법정 소송까지 불사하며 공동재산을 지킨 특별한 경험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2리는 주민들이 “우리 마을에는 동백숲 하나 빼면 자원이랄 게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곳이다. 이들은 2007년 ‘동백마을만들기’를 시작했다. 전체 주민 500여 명 가운데 80명 안팎의 주민이 토론회에 참여해 뜨거운 논의를 거듭했다.

마을 단위 공동주택 설립도 활발

이곳은 제주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사유지였다. 마을 주민들은 동백나무 군락지의 ‘마을 공유화’를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수천만원의 숲 매입 자금을 확보했다. 동백고장보전연구회라는 주민협동조직을 새로 만들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겼다. 이들은 “동백마을이 앞으로 300년간 우리 마을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반적인 농촌마을 인구가 고령층으로 구성된 것과 달리, 신흥2리 연구회는 40대 중심으로 운영된다. 여성 참여도 활발하다. 이들은 지자체 지원을 받아 동백기름 가공 공장 ‘동백 방앗간’도 신축했다. 주민들이 힘을 모으자 지자체가 동백마을 살리기에 지원금 1억원을 냈다.

2009년부터 동백열매를 활용한 기름 생산이 시작됐다. 동백공장은 3년 만에 매출액 1억2천만원의 ‘작은 기업’으로 성장했다. 마을 어르신들은 열매 수확을 돕고, 적당한 수입원을 확보했다. 지역의 청장년들은 시간당 1만원 정도 인건비를 받는다. 남·여 차이도 없다. ‘깨끗한 동백기름’이란 상품을 통해 청정한 마을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덤이었다.

당시 제주도 정책보좌관으로 동백마을을 지원했던 이승택 제주시 현 도시재생지원센터장은 “지역 숲을 주민들이 공유화하면서 마을공유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이를 통해 주민들에게는 경제적 여유와 자긍심을, 외지인들에게는 자연적 가치가 보존된 숲을 방문할 기회를 열어준 소중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는 중산간 농촌마을이면서도 지역 내 학교를 살려내는 데 마을 역량을 모은 사례로 눈길을 끈다. 납읍초등학교는 300명 안팎의 학생이 다니던 곳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학생 수가 100명 아래로 떨어지더니 분교장 개편 대상 통보를 받게 됐다. 이때부터 20년간 주민들의 학교살리기 노력이 시작됐다.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학교가 폐교되면 노인만 남아 마을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절박함이 작동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2012년 낸 자료집 를 보면, 당시 강태희 마을회 고문은 “어린이들이 없으면 마을이 늙어지고 황폐해진다. 거리에도 골목에도…. 낮에도 밤에도 사람이 안 보인다. 집에서 야단치는 소리도 나야 하고, 애들 울음소리도 나야 하고, 다투는 소리도 나야 하는데 이런 소리가 안 난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을 위해 공동주택이 건립됐다. 마을의 목장조합, 자생단체가 기부금을 냈고, 80~90살 어르신들은 쌈짓돈을 모았다. 3차에 걸친 마을 단위 공동주택 설립 사업으로 현재는 100명 안팎의 초등학생을 유지하고 있다.

한라산 서쪽 낙천·산양·저지·청수리 등 4개 지역이 ‘웃뜨르권역’을 형성해 마을 기초시설인 웃뜨르빛센터와 승마체험학교를 실현한 사례도 있다. 이들은 웃뜨르문화축제, 웃뜨르마라톤대회도 함께 열고 있다. 어촌마을 하도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어촌마을 생태계를 지켜냈다. 2000년 중반 이후 어촌계의 소라 채취가 기존 70t에서 절반 가량 줄자, 잔소라·해조류 채취 금지 등을 통해 수년 만에 생산량을 4배 넘게 증가시킨 사례가 있다. 이들은 어촌계를 중심으로 어촌체험마을사업도 진행한다.

땅과 가치를 공유하라!

긍정적 사례에 비해, 마을의 훼손을 막는 수준에 급급한 곳도 적지 않다. 최근 제주에 ‘중국발 개발자본 열풍’이 불어닥친 여파가 크다. 또 마을만들기 진행 과정에서 원주민이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제주의 마을만들기가 정부나 도의 정책을 따라 ‘관제 성격’을 띠고, 이들의 지원금을 받는 게 주요 목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라해문 소장은 “마을만들기의 기본 목표는 마을 사람들이 공유하는 땅과 가치를 확장시키는 데 있다. 가시리나 신흥2리가 마을 공유지를 통해 마을살리기에 성공한 경우가 단적으로 이를 설명한다”며 “그러나 최근 마을만들기 사업을 보면, 정부나 지자체에서 주는 혜택이나 돈을 받아야만 마을을 변화시킬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마을만들기의 진짜 목적과 목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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