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11일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사고 지역 사람들의 질서정연함을 세계가 칭찬하고 있다는 것은 지진 뒤 어느 시기부터 일본 미디어가 자주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쓰나미 당시 비정부기구(NPO)와 자원봉사단체들이 잔해 철거 작업을 위해 종종 위험 지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은 일들이다. 경찰도 이를 묵인해줬다.
‘이시노마키’라는 지역의 피난민 얘기를 들어보면, 시내 파친코 점원들이 원래 경품으로 주려 했던 식재료를 업소 내 주차장에 피난했던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시민들이 자신의 집에 있는 식재료를 피난민들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는 도처에서 들을 수 있다. 나 역시 지진으로 우리 집 샤워실이 망가진 뒤에는 이웃 주민의 배려로 그 집 샤워실을 거의 매일, 한 달 이상 빌려 썼다. 일상생활에서 이웃에게 자신의 샤워실을 내준다든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자신의 자동차에 태운다든가, 부족한 식재료를 이웃에게 나눠주지는 않는다.
3·11 사고 당시, 평소라면 냉엄하게 나뉘어 있던 자신과 가족, 동료, 타인이라는 경계를 여기저기서 대담하게 뛰어넘는 ‘공생’이 실천됐던 것이다. 이런 현상이 일본이기 때문에, 혹은 일본의 동북 지역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한때 일본인-외국인 모두 공생2010년 일본어 번역판으로 나온 리베카 솔닛의 는 세계 여러 곳의 재해 현장 조사에서 다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대재해가 일어났을 때,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위기에 편승해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 울분을 푸는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해서 사회가 혼란 상태에 빠질 거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대재해 상황에선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이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와 창의적인 대응으로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다. 동일본 대지진에서 ‘경계’를 넘어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의 광경은 보편적인 인간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하는 게 적절하다.
당시 한국인을 포함한 주일 외국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피해 현장에서 외국인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발생했던 한국인 학살처럼 끔찍한 폭력이나 차별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외국인이 일본 사람에게 여러 형태의 구조 지원 활동을 했다. 외국인 역시 일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공생의 능동적인 주체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3·11 이후 필자가 실시한 ‘피해지역 외국인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면, 센다이시 가모 지구에서 피해를 당한 한국인 남성이 아내와 함께 쓰나미에 휩쓸렸다. 그는 아내를 끌어안은 채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농구 골대를 붙잡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힘겹게 수면 위로 올라온 곳은 학교 체육관 안이었다. 건물 안에서는 한 교원이 부상자들을 응급처치하고 있었다. 한국인 남성은 자신이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다른 부상자의 응급처치를 돕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의 국적을 따졌을 리 없다.
자원봉사하러 돌아온 한국인도다가조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 청년이 사고 뒤 청소와 안마 자원봉사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일도 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희망을 느꼈다. 이곳이 내 고향이라는 느낌도 강해졌다”고 말했다. 쓰나미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은 한국인 결혼이주여성이 자신의 집에서 피난민들을 한동안 돌보거나, 음식점을 하는 이들이 공짜에 가깝게 이웃 주민에게 요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비상사태 때, 농밀한 공생의 실천을 볼 수 있는 예다. 나라와 민족, 문화의 차이를 고정적으로 인식하는 ‘교조주의적 다문화 공생’과는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차이’를 아예 잊어버리는 ‘망각’에 기초한 공생인 셈이다. 실제로 자신이 큰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다른 피난민의 응급처치를 도운 이는 ‘자기와 다른 사람’ 사이에는 어떤 사회적 카테고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사실 이전에 순수하게 당시 ‘그 상황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재해 지역에서 국가와 민족에 관한 사회적 카테고리를 일시적으로 중단한 상태의 외국인-일본인 사이의 공생이 도처에서 실천되고 있었다.
하지만 3·11 사고 이후 ‘비상사태’에서 ‘일반상황’으로 전환하면서 일본에서는 국가와 민족적 카테고리를 본질로 하는 배타적 태도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 이런 태도가 여러 장면에서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공생을 지향하는 태도를 배척하는 모습이 전면에 나타난 것이다.
우선 일본의 민족주의와 배타주의에 지진·재해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대형 재난은 공생을 통해 지역사회의 활성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경찰과 자위대 같은 국가 단위의 구조와 지원 활동을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국가의 힘을 국민에게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형 재난은 항상 민족주의와 (국민이 빠진) 국가주의의 흐름을 창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현 아베 신조 정부가 재난을 포함한 긴급사태 때 정부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려는 ‘긴급사태 조항’을 신설하는 개헌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 대한 배타주의를 지탱하는 것은 일본 내에 만연한 역사수정주의인 것이 분명하다. 이같은 배타주의는 꽤 뿌리가 깊다. 역사수정주의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비판이 곤란한 문화상대주의와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사상은 어떠한 입장과 견해도 최종적인 근거가 없고, 따라서 각자의 자유라고 하는 ‘속류 상대주의’로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가 되고 말았다.
한·일 모두 국가주의 고개 들어한국에서도 민족 간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발언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등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정부가 교과서 국정화를 도모하는 등 국민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국가주의의 움직임도 활성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추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하면 좋을까. 양국의 현상이 이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지난 재해 때, 국가를 넘어서 보여줬던 농밀한 ‘공생’을 상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사고 당시 두 나라 국민 사이에 공생이 실천됐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많은 물자와 지원금, 지원의 손길이 보내졌다. 명령이나 도덕률, 공동체의 습관에 따라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공리적 판단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절한 바람에서 생겨난 실천이 아니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당신도 또한 살기를 원한다. 이 세계에 얼굴을 내민 이상 ‘당신’이 어디의 누구라도.” 이런 바람이 국민과 민족에 상관없이 모두의 몸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것이라고 희미하게나마 믿을 수 있을 때, 그때의 공생 광경을 이어갈 지평이 보이지 않을까.
곽기환 일본 도호쿠학원대학 경제학부 교수※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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