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31일 낮 12시 전남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 전원마을 터. 버스 4대가 멈추자 전국에서 찾아온 조합원 200여 명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전원마을 택지의 주변 환경을 살폈다. 가까이는 굽이 도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너른 들판이 낮게 엎드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 지리산 왕시루봉의 펑퍼짐한 산등성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읍내가 구례의 강북이라면, 이곳은 구례의 강남입니다.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일자리와 교육·문화·복지를 갖춘 생태공동체를 가꾸려 합니다.”
전원주택 설명회에 조합원 200여 명 ‘북적’이날 설명회를 마련한 아이쿱(iCOOP)은 2017년까지 4만5천m²의 터에 단독주택 72동을 공급하겠다고 소개했다. 건축사 김재화씨는 택지를 돌며 주택 디자인과 전선 지중화를 비롯해 커뮤니티센터의 기능, 자치위원회의 구성 등 전원마을의 장점을 상세하게 들려줬다. 조합원들은 휴대용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을 한 대목이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대에선 한옥 한 채가 한창 올라가고 있었다. 한옥의 기둥과 들보 앞에 서자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서울 말씨뿐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 여러 지역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었다. “남쪽이 어디죠?” “몇 층까지 짓는데예?” “수돗물이에유, 지하수예유?” “건축비는 얼매나 든다요?” 풍경을 사진에 담던 은퇴자 부부는 “구례는 자연이 좋아 늘 오고 싶은 곳이다. 이곳에서 살 수 있으면 행운이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는 전남 구례에서 아이쿱은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본보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안전한 식품을 원하는 조합원들의 열망을 디딤돌 삼아, 정부도 기업도 포기했던 농업 분야에 승부수를 던졌다.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낙후한 지역을 골라 사회적 경제의 성공 모델을 다진다는 청사진을 먼저 그렸다. 이어 청정 지역인 구례에 유기식품 집적단지를 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자리·문화·교육·의료·복지가 어우러진 전원형 생활공동체를 가꾸는 실험을 한창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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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쿱은 2011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구례군 용방면 죽정리 농공단지 14만4천m²를 통째로 분양받았다. 물류단지 입지를 찾던 아이쿱과 농공단지 분양을 원한 구례군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아이쿱은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고, 구례군은 지원금 7억원을 내줬다.
아이쿱은 4년 동안 600억원을 들여 구례자연드림파크를 조성했다. 우리밀 라면을 비롯해 김치, 만두, 한과, 정육, 오리, 유정란, 막걸리, 글루텐(밀 등 곡류에 함유된 수용성 단백질) 등 유기식품을 생산하는 공방 15곳을 잇따라 지었다. 이 중에는 전분, 제분, 도정, 전처리센터 등도 포함됐다. 수제 맥주와 수제 치즈를 만들어냈고 앞으로 요구르트도 생산할 예정이다.
숲 속에 있는 구례자연드림파크는 외관이 단아해 공단이라기보다 공원이나 학교 같은 느낌을 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조경과 건축이 방문자의 눈길을 끈다. 단지 전체를 분양받아 계획적으로 개발한 덕분이다. 내부에 들어서면 잔디공원을 중심으로 분수대와 그늘막, 산책로가 들어서 있어 평화로운 분위기다. 이에 어울리게 시설의 이름도 공단 대신 ‘파크’, 공장 대신 ‘공방’으로 붙였다. 흔한 용어인 공장 대신, 생산자가 식품에 혼과 정성을 불어넣는 장소라는 뜻으로 붙인 공방은 어감이 친근하다. 견학 통로에서 방문자가 작업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건설비의 20%를 추가로 들여 공방을 지었다.
방문객만 9만4천 명, 구례 주민의 3~4배이곳의 새로운 실험이 알려지면서 견학 일행은 갈수록 늘고 있다. 아이쿱의 78개 지역조합뿐 아니라 전국의 학교와 단체, 마을과 기관이 앞다퉈 방문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이곳을 찾아 조합 활동의 방향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우리밀로 라면과 만두를 생산하는 공방을 견학한다. 피자나 쿠키, 소시지나 케이크를 만들어 한 끼를 해결하는 체험에도 참여한다. 또 산 속에서 맥주나 커피를 마시거나 최신 개봉 영화를 즐기며 느긋하게 재충전을 하기도 한다.
주택설명회가 열린 이날도 광주엔지오시민재단, 100세시대대안포럼, 하남중촌마을향우회, 혁신도시건설지원단, 한려해상국립공원 등 10여 개 단체 500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주말에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점심때는 식당 건물 밖까지 긴 줄을 서야만 했다.
경남 사천에서 온 이서영(36·여)씨는 “보건소 아토피 치유교실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오게 됐다. 생태 탐방로를 걷고 친환경 간식거리를 만들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곳이 금세 좋아졌다”고 호평했다. 체험공방에서 만난 아이들도 표정이 밝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정은표(8)군은 “평소 원하던 대로 초콜릿을 듬뿍 얹은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며 즐거워했다. 이고은(8)양은 “피자 반죽이 생각보다 어렵다. 잘 구워서 동생이랑 나눠 먹겠다”며 웃었다. 영화관에서 만난 주민 오향화(60·구례읍 봉서리)씨는 “외지에서 찾아온 친지들을 꼭 데려온다. 산골에 하우스맥주, 북카페, 개봉 영화 등 별별 게 다 있다며 다들 깜짝 놀란다”고 전했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지난해 4만6천여 명, 올해는 10월까지 9만4천여 명을 기록했다. 한 해 동안 구례 주민의 3~4배에 이르는 사람이 방문한 셈이다. 지난 8월 잔디공원에서 열린 록페스티벌에는 4천여 명이 한꺼번에 몰렸다. 서울에서 330km 떨어진 지역의 행사인데도 대박이 나서 주민과 직원들을 들뜨게 했다.
여러 공방들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서 구례자연드림파크는 2012년 152억원, 2013년 247억원, 2014년 366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조합원한테 주문받은 식품의 생산·수집·가공·배송을 같은 공간 안에 계열화한 데 따라 인력과 비용의 절감 효과도 나타났다. 사업 과정에서 현지 농산물을 사들이고, 현지 주민들을 채용한다는 원칙도 일관되게 지켜지고 있다.
2년 만에 매출 2배, 직원 평균나이 36.2살이곳은 올해 들어 밀·배추·부추·파·버섯 등 20여 가지 농산물 10억4천만원어치를 구례에서 사들였다. 가공식품 원료가 75%, 식당의 식재료가 25%를 차지했다. 전국의 아이쿱 사업체들이 지난해 구례에서 구매한 농산물을 합치면 20억원에 이른다. 여태껏 구례에선 어렵게 농사를 지어도 판로가 없어 고민해왔다. 이곳이 문을 열자 농민들은 쌀과 밀, 고사리·취나물·쑥부쟁이 등 각종 농산물을 걱정 없이 팔 수 있게 됐다. 김영택 군 도시경제과장은 “아이쿱 덕분에 구례 농민 모두가 유기농 재배로 전환했다. 작게는 마을경제, 크게는 지역경제에 활력이 붙으면서 ‘인구 3만 명 회복’이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반겼다.
이곳의 직원 430명 가운데 현지 주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80%에 달한다. 읍내에 있는 전남자연과학고(옛 구례농고) 졸업생만 39명이다. 나이별로는 30대가 133명으로 가장 많고, 20대 122명과 40대 113명이 뒤를 잇는다. 평균연령은 36.2살로 주민의 평균나이인 50대 초반보다 훨씬 젊다. 안내를 담당한 직원 모란(28·구례읍 봉동리)씨는 “일터가 가깝고 보수도 괜찮아 만족한다. 친지들도 좋아해서 후배들한테도 취업을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례자연드림파크는 최근 비어락하우스, 게스트하우스, 피트니스센터, 휴센터, 가족호텔 등을 지으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이제는 자리가 비좁아 2차 단지를 물색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유기식품 분야의 기반이 탄탄해지자 아이쿱은 지역사회 공헌 활동을 본격화했다. 구례에 없었던 영화관을 새로 열고, 산부인과 병원을 개설하는 데 앞장섰다. 앞으로 소아과와 피부과 병원도 열겠다는 구상이지만, 읍내에 있는 치과는 피하기로 했다. 신성식 아이쿱생협사업연합회 시이오(CEO)는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상생 모델을 구례에 구현하려 한다. 주민이 원하는 개봉영화관이나 청소년센터 등을 공익적 차원에서 운영하되 가능하면 수지를 맞추려 애쓰겠다”고 말했다.
구례를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들려는 아이쿱은 교육과 주거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구례의 학생들한테 실습과 인턴 과정을 열어 한 발짝 다가서고, 해마다 적지 않은 장학금과 일자리를 제공해왔다. 올해는 지역의 학교에 장학금 4700만원과 시설비 1천만원을 전달했다. 11~12월 매주 화요일 저녁엔 ‘지역,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이라는 주제로 군민과 직원을 위한 교양강좌도 이어간다.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귀촌자와 젊은 층이 자연 속에서 도시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전원마을 사업도 반응을 봐가며 차츰 확대하기로 했다. 장시준 구례교육장은 “구례는 급격한 이농으로 한때 7만8천 명이던 인구가 2만7천 명까지 줄었다. 자연드림파크가 들어오면서 용방면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학령 아동이 늘어 올해부터 유치원을 개설했다. 지역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놀라운 변화이자 희망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구례=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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