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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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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걸림돌’ 10년 뒤 ‘철거민’

2005년 청계천 복원 뒤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원주민 상인 5명의 울화 터지는 하루하루… 관광객 붐비는 도심 명소 개발 뒤 버려 진 사람들
등록 2015-10-05 20:48 수정 2020-05-02 04:28

2015년 10월1일, 꼭 10년이 지났다. 10년 전 같은 날, 사람들은 서울에 새 물길이 열렸다며 잔치를 열었다. 복원 공사를 마친 청계천이 얼굴을 드러낸 날이었다. 복원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축배를 들었다. 그때 날씨 기록을 살펴보면 어쩐 일인지 그날도 하늘이 어둡고 비가 내렸다.
지난 10월1일 오후 2시, 비 내린 청계 광장에 사람들이 있었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 달뜬 분위기 같은 것이 무거운 공기를 비집고 나왔다. 청계천 복원 10주년을 맞아 서울시에서 마련한 각종 행사 준비로 사람들이 분주했다. 하얀 지붕을 얹은 천막 사이로 해외 공연팀의 화려한 소품이 보였다. 10주년 기념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청계천을 배경으로 너풀거렸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셀카봉을 하늘 높이 향한 채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10월1일 청계천 복원 10주년을 맞아 가든파이브 비상대책위원회, 노동당 서울시당 등은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 ‘청계천 복원 10년, 잊혀진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계천 복원 과정 중 소외된 상인들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정용일 기자

10월1일 청계천 복원 10주년을 맞아 가든파이브 비상대책위원회, 노동당 서울시당 등은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 ‘청계천 복원 10년, 잊혀진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계천 복원 과정 중 소외된 상인들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정용일 기자

“손님 카드 받아 계산해보는 게 소원”

그 가운데 우산도 받치지 않고 흑백의 현수막을 든 사람들이 있었다. 10년 전 청계천 복원 공사에 삽을 보탠 사람들이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을 때, 초청받지 못한 이곳의 옛 주인들이다. 청계천변에서 장사를 하던 22만 명의 상인들에게 청계천은 일상이요, 생활이요, 삶의 터전이었다. 청계천 복원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지난 10년간 떠밀리느라 바빠 할 말을 미처 다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리 외쳐도 청계천의 빛에 가로막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산화(53)씨는 “제발 우리 말 좀 들어주세요”라고 말했다. 1억9천만여 명이 지난 10년간 청계천을 찾았다. 우리는 여기 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나.

청계천 복원 사업이 끝나고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발표한 는 “가장 큰 난관은 상인들의 반대였다”라고 기록한다. 청계천 복원 10년의 역사에서 상인들은 이렇게 걸림돌로 취급되었다.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혀 이리저리 떠밀려난 상인 다섯 명을 만났다.

유산화씨는 청계천에서 가든파이브로 이주한 상인이다. 가든파이브 개점 당시 리빙관 지하 1층에 수입 잡화와 의류 점포를 열었다. 가게를 열었지만 단 한 건의 매출도 없었다. 입점하자마자 백화점이 들어온다고 공사를 해대기 시작해 영업장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손님들 발소리 대신 소음과 분진만 쌓였다. 유산화씨의 소원은 손님이 준 카드를 받아들고 기계에 한 번이라도 시원하게 긁어보는 거다. 지금은 관리비와 임대료가 밀려 명도소송을 당해 쫓겨나온 뒤 서울 강동구 길동시장에서 노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두부를 판다. 노점 주인에게 수수료를 떼어주고 남는 것을 일당으로 받는다. 추석을 앞두고는 두부 대신 강정을 팔았다.

유산화씨는 어머니를 따라 청계천 상인이 되었다. 어머니는 청계천 황학동 삼일아파트에서 1989년부터 식당을 운영했다. 음식 맛이 좋았던 오복식당에는 단골도 많았다. 당시 하루 매출이 200만원을 훌쩍 넘었다. 한창 장사가 잘되던 때에는 권리금이 1억8천만원에 달했다. 신명나게 장사하는 어머니 옆에서는 뭘 해도 될 것 같았다. 유씨는 여동생과 함께 의류 판매를 시작했다. 유씨와 동생의 가게도 하루 매출 200만~300만원을 찍을 정도로 수익이 좋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주말이면 청계천변 상가에 구경오는 손님이 넘쳐났다. 재미있었다. 이렇게 10년쯤 장사를 더 하면 제법 자리를 잡겠다 싶었다. 아이들도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테고 중년에는 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청계천 상인 단체 대표에서 2교대 경비원
10년 전 청계천을 터전 삼아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이제 노점상으로, 경비로,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왼쪽부터 청계천변에서 신발 장사를 했던 주성근씨, 삼일아파트 상가에서 각각 비디오 판매와 의류 판매를 한 안규호씨와 유산화씨. 왼쪽부터 김진수, 류우종, 정용일 기자

10년 전 청계천을 터전 삼아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이제 노점상으로, 경비로,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왼쪽부터 청계천변에서 신발 장사를 했던 주성근씨, 삼일아파트 상가에서 각각 비디오 판매와 의류 판매를 한 안규호씨와 유산화씨. 왼쪽부터 김진수, 류우종, 정용일 기자

꿈은 허망하게 깨졌다. 아침 9시에 나와서 밤 9시가 넘어 퇴근한다. 12시간씩 일하지만 손에 남는 것은 오가는 교통비, 여기저기 관절이 아파 약을 지어먹는 병원비 내기에도 빠듯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든 큰딸이 실질적 가장이다. 늘 울화통이 터진다. 어디서 폭탄만 구할 수 있다면 당장 어깨에 메고 청계천 문제로 얽힌 SH공사 사람들과 가든파이브 관리단을 향해 뛰어들고 싶다.

유산화씨가 이른 아침 종종거리며 출근 준비를 하는 그 시각, 서울 잠실의 한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안규호(64)씨가 얼굴을 비비며 모자란 잠을 겨우 털어내고 있을 테다. 안규호씨는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36개 상인 단체 대표였다. 아파트 경비일을 한 지 1년이 좀 넘었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업무 패턴은 1년이 훌쩍 넘고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가장 힘든 건 잠자는 일이다. 동료 직원과 번갈아가며 3시간씩 쉰다. 지하에 대충 칸막이를 쳐 마련한 자리가 수면실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앞뒤로 시간을 잘라먹고 나면 제대로 자는 시간은 2시간 남짓이다. 20시간 이상 깨어 있다 집에 돌아가면 파김치가 된다. 피곤한 몸을 좀 누이고 나면 어느덧 오전이 훌쩍 지나 있다. 그렇게 남은 하루를 쪼개 쓰다보면 다시 출근 시간이 돌아온다.

큰아들은 결혼해 출가하고 37살 딸은 아직 결혼하지 않고 안씨 내외와 함께 산다. 딸은 청소년 상담 관련 일을 하며 전국 단위로 강의를 다닌다. 학창 시절 공부를 아주 잘했다. 그래도 대학원 나오고 외국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고 온 사람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안씨는 딸이 능력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 결혼하지 않은 것 모두 자기 탓만 같다.

청계천 복원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 피가 빨린 기분이다. 청계천에서 못 받고 나온 권리금은 가든파이브에서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벌금 독촉장뿐이었다. 시위를 이유로 SH공사와 가든파이브 관리단으로부터 업무방해죄로 고소당했다. 700만원 벌금을 갚지 못해 구치소에 갇혔다가 유산화씨 등 주변 상인들과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났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임대료가 밀린 가든파이브의 매장은 종이 조각 한 장 없이 깨끗하게 치워졌다.

청계천 복원 10주년 행사 ‘불편한 초대장’
10월1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청계천 복원 10주년 기념식에서 이제원 서울시 행정2부시장(가운데) 등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2005년 10월1일 태어난 ‘청계둥이’ 어린이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10월1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청계천 복원 10주년 기념식에서 이제원 서울시 행정2부시장(가운데) 등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2005년 10월1일 태어난 ‘청계둥이’ 어린이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그 무렵 유산화씨의 가족은 살 곳이 없어 뿔뿔이 흩어졌다. 유산화씨도 명도소송을 당해 티끌 한 톨 남기지 않고 가게를 비워야 했다. 팔아보지도 못한 물건들이 그렇게 손에서 떠났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는 지금 황학동에서 중고 의류 판매 노점을 한다.

안규호씨는 요즘 하는 일을 그만둘까 고민 중이다. 고단하게 일해도 생계를 이어가기엔 늘 셈이 부족하다. “아내 건강도 챙겨야 하고, 돈이 더 필요해요. 정보지를 보니 장례지도사가 돈을 많이 번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다 같은 사람이었는데 시신 만지면 어때요. 더럽고 무섭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지금 미리 마음으로 여러 번 그림을 그려보고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던 얼마 전 문자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청계천 복원 10주년을 기념한 행사에 이명박 전 대통령과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하는데, 그 자리에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한가하게 청계천 복원 공사가 주변 상인들의 타협으로 이뤄졌다는 선전에 동원되는 기분이었다.

오래된 싸움이다. 청계천포럼을 이끌었던 전 서울시 교통연수원장 조광권씨가 쓴 에는 2002년 7월 청계천 복원 계획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2003년 3월에는 상인들의 영업손실보상요구가 쟁점이 되면서 서울시는 과거 사례를 중심으로 보상 전례가 없음을 이유로 보상 불가 입장을 고수, 법적 쟁송 대비와 대안 모색을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청계천 복원 사업과 관련한 갈등 관리 전략에 관해 펴낸 책 에는 상인과의 갈등 관리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영업손실 보상 등 간접보상은 없다. △이주 문제와 리모델링·재개발·재건축, 관련 금융 지원 등의 협상안에 대한 문서계약은 없고 오직 구두로 설득하고 협상한다. △이주 의지가 있는 상인에게는 행정적·재정적 지원에 대한 방안을 최대한 찾아준다.

청계천에서 가든파이브로 휩쓸려오며 재산을 탕진한 상인들은 피해를 증명할 자료가 없었다. 가든파이브에 신발 매장 두 개를 열었던 최상훈(가명)씨는 그래서 답답하다. 최씨는 “사기업이 하는 일이었으면 그렇게 믿고 따르지 않았을 거다. 시가 우리 잘살게 해준다고 해서 하는 대로 따라갔는데….” 잘 정돈된 쇼핑몰에서 매장을 운영하며 인터넷 쇼핑몰도 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서울이 아닌 아시아를 대상으로 장사하게 되리란 기대 같은 것이 상인들 사이에 심어졌다.

가든파이브로 휩쓸려와 재산 탕진
청계천 이주 상인들이 입점한 가든파이브 점포는 기괴할 정도로 적막하다. 명도소송으로 철거된 매장, 손님이 없어 영업하지 않는 가게에 철 지난 물건들이 쌓여 있다. 류우종 기자

청계천 이주 상인들이 입점한 가든파이브 점포는 기괴할 정도로 적막하다. 명도소송으로 철거된 매장, 손님이 없어 영업하지 않는 가게에 철 지난 물건들이 쌓여 있다. 류우종 기자

최씨의 눈은 늘 충혈돼 있다. 상훈씨는 지난 5년간 하룻밤도 잠을 편하게 잔 적이 없다. 화병이 나서, 자려고 누우면 늘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내에게 손톱을 세워 머리를 긁어달라고 한다. 그러면 뜨거워진 머리가 좀 식는 것 같다. 그렇게 겨우 잠이 들어도 악몽을 꾼다. 매일 우황청심환을 먹는다. 아내는 빚을 지고 들어간 가든파이브에서 파리만 날린 다음부터 몸이 아파 물병 하나도 제대로 못 든다. 쇠약한 몸은 마음의 병으로 이어졌다. 최씨의 몸 어느 한 곳에 기대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늘 손을 잡고 잔다. 어떤 때는 헐겁게 쥔 손이 불안해 잠결에 깍지를 꼭 낀다.

기자를 만난 9월30일 동대문 신발도매상가에서 장사를 마치고 온 최씨는 이날 신발을 단 한 켤레도 팔지 못했다고 했다. 가든파이브에 있는 매장은 밀린 임대료 이자만 겨우 내며 유지하고 있다. 가든파이브에 입점하자마자 NC백화점이 들어왔다.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모든 동선이 백화점 중심으로 꾸려지자 청계천 신발 상인들이 몰려 있던 가든파이브 리빙관 2·3층에는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았다.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여러 소송을 진행하며 변호사 선임 비용이 부담스러워 법정에도 직접 섰다. 지은 죄가 없는데도 판사 앞에 서면 가슴이 뛰고 손이 떨렸다.

다 그만두고 싶은 적도 여러 번이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차라리 뛰어내리면 후련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가만 돌아보는데 거실에 아이들이 조르륵 앉아 있었다. 아내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119에 전화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구급차를 타고 실려가 상담을 받고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일상과 가정이 파괴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습니까. 욕도 모르던 사람한테 욕을 하게 만드는 세상이에요. 가든파이브 입주부터 지금까지 5~6년간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유산화·안규호·최상훈씨는 그나마 이른바 이주대책에 포함된 ‘해당자’들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편이 낫다 할 수 없지만, 청계천 복원 사업 초반 이주권조차 얻지 못한 ‘미해당’ 상인들은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확신도 없는 공간으로 떠밀려다녔다. 동대문으로 신설동으로 내쳐지다 지방자치단체의 철거 집행으로 그마저도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청계천 하류? 귀신 나올 지경이야”

청계천 복원 이전 그곳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은 거래했던 서류나 세금계산서 같은 것을 제대로 챙겨놓지 못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하루, 손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곳에서 오래 장사를 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전에 철거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복원 공사로 파헤쳐져 스산해진 청계천변에 남아 버티긴 어려웠다. 하루라도 장사를 하지 않으면 곧장 손실을 보는 영세 상인들은 그렇게 힘을 잃고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남아 싸운 이들이 성동기계공고 근처 노점에서 장사를 이어나갔다. 그중 한 사람이 주성근(59)씨다. 황학동 벼룩시장 골목을 빠져나와 성동기계공고 담벼락을 끼고 돌면 인도 위에 쪼르르 놓인 파라솔 몇 개가 보인다. 허름한 파라솔이 마련해주는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이 아침 9시면 나와 물건을 진열한다.

주씨는 인천의 재활용업체에서 떼온 중고 운동화며 정장 구두 같은 것을 매일 아침 나란히 진열한다. 어제 안 팔린 신발은 오늘도 팔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누군가 발 맞는 이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16살에 전라도 영광에서 상경해 청계천변에서 구두 장사를 하던 외삼촌의 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40년 넘는 세월을 사람들 발만 보고 살았다. 그의 양쪽 옆자리에서 신발을 파는 하종호(78)·김덕선(84)씨도 이곳에서 사람들 발만 보고 산 세월이 40년을 훌쩍 넘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계천에 물길 만드는 바람에 시장 상권 버린겨. 그래도 10년 전엔 먹고살 만큼은 팔았지. 청계천 구경하는 사람 많지 않냐고? 청계천 하류는 삭막혀. 귀신 나올 지경이야.” 주씨는 푸념했다. 물가는 계속 올랐는데 하루 매출은 10년 전만도 못하다. 1만~1만5천원짜리 신발을 하루 두세 켤레 파는 게 고작이다.

더구나 최근엔 중구청이 노점상 철거에 나서는 바람에 장사하던 매대도 뺏기고 “요 모양 요 꼴”로 버틴다. 점심밥 시켜먹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 하씨·김씨와 막걸리라도 한잔 할라치면 돈이 모자란다. 부인이 식당일 다니는 걸로 먹고산다.

양춘석(62)씨는 평화시장 인근에서 30년째 과일 노점을 한다. 신혼집도 삼일아파트였다. 오랜 일터이자 삶터의 표정이 가장 크게 변했다고 느낀 건 청계천 복원 전후다. “복원 이전에는 공구나 특수한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골동품을 찾는 고정 단골들로 붐볐는데, 지금은 뜨내기 관광객뿐이다.”

복원되기 전 청계천은 각기 다른 품목의 업종이 어울려 상호 보완을 이루며 공생했다. 에서 저자는 “공구상가 일대에서 하루를 보내는 상인들의 식사와 음료, 세척과 휴식, 그리고 물품의 이동을 돕는 다양한 생산자 서비스 업종들이 청계천의 공간과 영업 특성에 맞게 적응하면서 각 틈새에서 활발하게 기능”했다고 썼다. 그러므로 이들을 간단하게 나눠 쾌적하고 넓은 공간에 옮겨놓는다는 것은 긴밀한 시장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양씨에게 지난 10년을 물으면 “싸운 기억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복원 공사를 시작하면서 용역과 포클레인 기사들과 싸우고 2013년에는 노점상 단속이 심해 싸웠다. 양씨 가게 옆쪽 청계천변에서 장사를 하다가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옮긴 20여 명 가운데 이제껏 남아서 장사를 하는 이는 4명뿐이라고 한다. “나머지 16명은 개인 용달을 하기도 하고, 죽은 사람도 있고, 자식들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서울시에서 하란 대로 풍물시장에 들어간 사람은 자리는 있어도 교통비도 못 벌어 관두는 식이다.”

그나마 하루 15만~20만원 매출에 15~20%의 이윤을 남기는 양씨는 이를 채우기 위해 12시간을 꼬박 일한다. 사과·배·감 등을 작은 소쿠리에 담고 멜론을 잘라 나무젓가락에 끼우는 그의 웅크린 등 뒤로 하루 종일 자동차 경적 소리와 뿌연 매연 냄새만 흐른다.

복원 뒤 10년 “싸운 기억밖에 없다”

청계천을 따라 높은 건물이 들어설수록 그 그림자는 크고 짙게 드리운다. 청계천은 원래 서민들의 개천이었다. 조선시대까지 이름 없는 개천이었던 청계천은 도심의 하수구이자 빨래터였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청계천 복원 논의 당시 에 기고한 칼럼에서 지난 수백 년간 청계천이 도시 주민과 맺어온 역사·문화적 관계를 발전적으로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곳은 가난한 도시민들의 휴식처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대보름날이면 서울 장안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연을 날리고 다리밟기 놀이를 즐기던 축제 마당이었다.” 지금 청계천은 마침내 사람들이 소풍을 나오고 밤 산책을 즐기는 도심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원래 이곳을 터전 삼았던 사람들은 이제 청계천 쪽으로 고개도 돌리기 싫다고 말한다. 청계천에 흐르는 물이 피눈물처럼 보인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상인들 철거민으로 전락시킨 실패한 이주정책


청계천  물  돈으로  바꿔  자본만  배불렸다


청계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던 2003년 12월 청계천 노점상 강제철거를 규탄하며 전국노점상연합이 투쟁대회를 열었다. 류우종 기자

청계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던 2003년 12월 청계천 노점상 강제철거를 규탄하며 전국노점상연합이 투쟁대회를 열었다. 류우종 기자

지난 10월1일 오후 2시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 소외된 상인들의 목소리를 모은 기자회견이 열렸다. 노동당 서울시당을 중심으로 가든파이브비상대책위원회, 2015반빈곤권리장전실천단, 빈민해방실천연대, 빈곤사회연대, 서울시민연대 등은 청계천 복원으로 변화한 이주 상인들의 삶을 조명했다. 김상철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은 “도시가 세련되어질수록, 필연적으로 그 자리에 살던 사람들, 상인들은 철거민으로 전락하게 된다”며 실패한 이주정책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서울시는 그동안 8차에 걸친 신청 과정을 통해 청계천 상인들의 가든파이브 이주를 독려했지만 2008년 11월부터 2012년 9월까지 최종 분양률은 58%에 불과했다. 이주 대책 내용 중 당초 입점 지정 개시일부터 3개월 내 청계천 상가 정리, 계약일로부터 3년간 명의 변경 금지 등의 규약이 입점 및 영업 개시 기한 연장, 청계천 점포 기한 연장 및 폐지, 다점포 공급, 전매 제한 기간 단축, 계약금률 인하, 대출이자 추가 보전, 임대 가능 연령 폐지 등으로 완화됐다.
SH공사의 이와 같은 이주정책 지원은 상인들의 안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분양률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실제 가든파이브에서 영업을 하던 이주 상인들은 자리를 잡기보다 SH공사가 제기한 소송에 의해 쫓겨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소송은 건물 명도소송인데, 2009년부터 지금까지 총 104건으로 임대료 등 장기 체납에 의한 것이다.
SH공사는 공식적으로도 정책 실패를 자인했다. 지난 6월 서울시의회 도시계획관리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가든파이브 이주 대책은 ‘정책 실패’라고 보고했다. SH공사는 △가든파이브에 부적합한 방식으로 청계천 상가를 그대로 옮겨놓은 점 △전용 7평의 일률적인 구성 △변화하는 유통 트렌드에 탄력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 △상인 예상 7천만~8천만원 선의 공급가격이 실제 1억5천만원 수준이었다는 점 등을 실패의 원인으로 꼽았다.
SH공사 사업운영팀 담당자는 앞으로 이주 상인 구제책에 대해서 “과거 여러 차례 이주 상인을 위한 우대 정책이 있었다. 조건이 맞지 않아 이주를 포기하는 상인들이 있었고, 상가 활성화가 안 돼 어려워져서 나간 분들도 있다”며 “현재 이주 상인들을 위한 대책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SH공사는 청계천 상인들이 주로 입점했던 리빙관, 테크노관 등 미활성화 구역을 대형 유통업체에 일괄 임대하는 방식으로 활성화를 추진 중이다. 올해 안에 현대백화점 아웃렛을 일괄 임대로 유치해 향후 통매각 방식으로 전환 운영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자회견에서 2015반빈곤권리장전실천단원은 “빈곤 철거민으로 전락한 이주 상인들의 삶은 개인의 노력으로 복구할 수 없다”며 “청계천에 흐르는 물을 돈으로 바꿔 대형 자본에 넘겨준 셈”이라고 규탄했다.

신소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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