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진씨는 민주노동당 창당기념일(2000년 1월30일)이 사실 고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국장의 생일이라고 알려주었고, 두 살배기 아들 성율이와 함께 만난 홍원표씨는 노동당 서울시당 상근자인 부인과 결혼식 당일(2014년 3월9일)에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두 세대의 상징적 인물을 잃을 때 진보정치는 아팠다. 그러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아니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꿈이 있다.
김정진 변호사는 지난 6월28일 노동당 당대회에서 ‘진보결집’ 당원 총투표안이 부결된 뒤 당원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정리 국면이라 느껴집니다. …제 해석은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까지 진행되어온 진보정당운동의 국면이 정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세력, 새로운 인물이 무언가 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순환이 마감되고 있다는 느낌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진보정당밖에 몰랐던 이재영 국장이 남몰래 간직하고 싶었던 비밀, 생일에 맞춘 창당기념일에 서른 살 홍기표(45)씨는 당원이 됐다. 민주노동당 창당대회가 열리던 서울 역도경기장에서 입당원서를 썼다. ‘무소속 홍기표’는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진보정당 게시판을 휘젓는 ‘키보드 워리어’였고, 근엄한 ‘운동권 사람들’을 웃기는 ‘홍자루’였다. ‘반북 좌파’ 정당을 하기 위해 최근 노동당을 탈당한 그는 ‘따지자면’ 자주파 출신이다. 바야흐로 1980년대 후반, 고등학생 홍기표는 안창호 사상에 감동받아 무작정 흥사단을 찾았다. 그곳은 당시 고등학생 운동의 근거지였다.
그리고 대학이 아니라 경기도 수원의 공장에 갔다가 군대에 갔다. 돌아와 당시 현장 진출 흐름에 따라 철도청에 입사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철도노조에 들어갔단 표현이 더 맞겠다. 마흔다섯 살 홍기표씨는 말한다. “입사 동기들은 연금 받을 나이가 됐죠.” 열 살, 스무 살 나이 차가 나는 형님들과 운동을 하려니 뭔가 맞지 않았다. 철도청을 나오자 하필 구제금융 위기가 터졌다. 한편으로 7년을 7살 많은 자주파 지도선 형과 지냈다. “저의 오래된 소신은 한국 사회에서 좌파 정당이 대중을 획득하려면 ‘반공좌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이승복 이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가 지난 6월28일 노동당 게시판에 남긴 ‘사랑하는 나의 당을 떠나며’의 일부다.
“어렸을 때부터 장래 희망이 뭐냐고 하면 당원이 되는 거라고 했어요.” 아, 소년의 꿈은 대통령이 아니라 당원이었다. “이 산이 아닌가벼” 하듯이 “이 당이 아닌가벼” 하는 시기가 왔다. 1990년대 중·후반 통일운동이 분열했고, 1996년 강원도 강릉에 잠수함 무장공비가 침투했다. “잠수함 지도부가 일반 사병을 쏴 죽였어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면서 왜 쏴죽이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죠.” 여기서 우리는 환멸을 생각하기 십상이다. “아니에요. 지도선이었던 형이 결혼을 하면서 선이 끊어졌고, 부드럽게 없어졌다고 할까, 좋은 기억이에요.” 1990년대 후반 굶주리는 북의 실상을 보았던 자주파 일부는 뉴라이트가 됐지만, 그는 뉴레프트가 됐다.
그리고 다가온 PC통신 시대, ‘키보드 워리어’ 홍기표가 탄생했다. 나우누리 진보통신모임 ‘찬우물’에서 만난 이들은 아직도 만난다. “민주노동당 강령에 ‘사회적 조절을 중심에 놓고 시장경제를 병행한다’ 정도의 구절이 있어요. 저는 반대로 생각했지만, 이 정도 강령이면 활동하면서 내 당으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찬우물을 통해서 만나는 이들에게 민주노동당은 이런 의미였다. “당장 국회의원 출마는 아니지만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참여할 유일한 통로였던 거예요. 노동자를 대변하는 당이 의회에 진출해야 실질적인 의회가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당선 그리고 하나의 행운과 하나의 불운그러다 낚였다. 민주노동당 창당 직후 전라도 남원에 당원 연수원이 생겼다. 당시 연수원장 황광우씨가 그에게 연수원지기를 하라고 권했다. “서울 밖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데 대뜸 그러는 거예요. 두번 세번 선배들이 하라기에 ‘에라’ 하고 갔죠.” 남원에 앉아서 전국의 당원을 만나는 호사를 누렸다. “계획하지 않고 그때그때 한 선택”은 민주노동당 중앙당 인터넷위원회 부장으로 이어졌다. 60만원 상근비를 받았다. 자주파, 평등파 등등 ‘한 지붕 여러 가족’의 시끄러운 동거였다. “국회의원 한 명도 없었지만 사건·사고는 무지하게 많았던 당. 저는 그 당이 좋았습니다. 당은 제게 숨겨둔 애인 같았습니다. 물론 당 이름 때문에 그랬지만, 엄마한테 말하지 않고 나 혼자 간직하고 있던 비밀스런 당이었습니다. 당을 떠나려 생각하니 정말 숨겨둔 애인을 떠나보내는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당을 떠나며’의 일부다. 그러니 애인을 뺏으려는 이들과 벌였던 투쟁은 사랑싸움으로 생각하고 생략하자.
그리고 ‘마약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노동자와 서민은 민주노동당에 국회의원 10석의 선물을 안겼다. 당시 홍씨는 울산북구에서 조승수 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마침내 개표일, 새 아침이 밝았다. “당선 인사와 낙선 사례를 동시에 써야 했는데, 아예 낙선 사례는 쓰지도 않았어요. 당선 인사를 쓰는데 눈물이 났죠.” 그는 “하나의 행운과 하나의 불운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총선 직후 당내 선거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장악했다. 어쩌나, 월급이 오르고 주목도 받는 호시절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자주파를 견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그는 지도부를 둘러싼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당직을 사퇴했다.
2006년은 예언자 홍기표의 탄생으로 기록된다. 키보드 워리어 본업으로 돌아온 그는 당 게시판에 ‘민주노동당 분당계획’을 올려서 풍파를 일으켰다. “마음은 이해하나…”라고 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2007년 대선 직후 분당으로 이어진다. “맨땅에서 시작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했는데, 노회찬·심상정씨가 따라나오니까 대성공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분들이 속으로는 분당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서 결국 2011년 통합진보당으로 갔죠. ‘노심’이 같이 나오지 않거나 가지 않았다면, 통합진보당 사태에 북한에 비판적인 진보가 있다는 사실을 알릴 기회가 있었겠죠.” 그렇게 진보신당 시절을 ‘분리주의자’ 홍기표는 돌이켰다.
그는 “진보당은 보석가게 이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아저씨 홍기표’의 명함엔 “복지국가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자본주의보다) 짧기 때문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맨땅에 헤딩하길 두려워 않는 기표씨는 사회민주당을 해보려고 한다. 노동당 영등포 당원 홍기표의 고별사는 이렇다. “당은 몸에 안 좋은지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담배 같았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가슴 아픈 사랑을 또 해볼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가 일하는 여의도 정치기획사 사무실 창문 너머엔 2004년 민주노동당이 있다. 그곳이 당시 당사 자리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라는 산울림의 노래처럼 그는 “가끔씩 거기서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본다”고 말했다.
김정진(45) 변호사에게 진보정치는 그들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2002년 민주노동당 정책부장으로 상근을 시작했다. 그는 2015년 408일 만에 지상으로 내려온 스타케미칼 해고자 차광호씨를 보면서 2003년 자결한 고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을 생각했다. “김주익씨가 숨진 크레인에 진상조사단으로 올랐던 적이 있어요. 이런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 진보정당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했었죠. 12년이 지나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데 어디 가서 할 말이 없어요.”
“제도를 바꾸고 싶었어요.” 진보정당을 했던 이유를 그렇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제도는 법과 관행을 포함해 사회를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는 “최소한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에 관해선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고 싶었다”며 “문제제기는 한 것 같지만 성공적이진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민주노동당 정책부장, 법제실장 등을 지냈다. 이재영 정책국장과 함께 부유세 같은 정책을 만드는 역할도 했다. 2011년 분당 사태 당시 진보신당 부대표였다. 지난 6월28일 노동당 당대회에 다녀온 소감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대의원 동지들도 많이들 바뀌셨더군요. 제가 아는 얼굴들은 지방에서 오신 고참 대의원들 정도였습니다. 앳된 얼굴들이 중년이 되고 머리카락도 없어지고… 그렇게 다들 풍화되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 차례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아직도 진보의 재구성부터 출발하는 진보정당운동을 바꾸고 싶다는 기개들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기회는 있다고 본다”고 낙관했다. 여전히 대변되지 않는 이들이 있고, 이들의 고통에 민감한 정신이 있으며, 진보정당을 통해 무언가 해보려는 청년들이 있어서다. “그러나 그 기회는 우리 당의 새로운 세대와 세력들이 두려움 없이 임할 때 옵니다”라고 그는 글에서 덧붙였다. 노동당 당원인 그는 정의당 당대표 후보에 출마한 30대 조성주씨의 용기를 높이 샀다. “정규직 노조가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를 용기 있게 했죠. 경영자들이 얘기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정규직 노조가 양보하지 않으면 비정규직 문제가 완화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에요.”
30대 청년 김정진이 진보정당 활동가로 마주한 세상은 생각과 달랐다. 노동자 일반을 대변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진보정당은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놓은 세상에 직면했다. “어… 어떻게 해야 돼?” 당연한 당황이었다. ‘하나의 노조, 하나의 정당’ 노선에 기반한 민주노동당은 정규직 노조의 지원을 받았고, 대안을 제시하려면 전통적인 지지층에 싫은 소리를 해야 했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이제는 이렇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조언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는 자기 입장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진보정당 후세대에게 “비판적 조언과 우호적 지원을 해주고 싶다”고 희망했다.
“의탁하지 않고 자기 정치를 하라”다만 당부는 있다. 15년의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의탁하지 않고 자기 정치를 하라”고 당부한다. 진보정당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탁이 자신과 다른 결정을 하는 그들에 대한 과도한 분노를 낳았고, 지독한 배신감으로 이어졌단 것이다. 진보결집 당원 총투표안을 부결시킨 지난 노동당 당대회 결정을 그는 “저를 포함한 진보정치 주도세력에 대한 탄핵으로 본다”고 말했다. 오히려 지금이 진보의 재구성이 진정으로 시작될 때인지 모른다. 그는 그것을 “지연된 시도”라고 말했다. “폐허에서 뭔가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그 말의 끝이 물음표인지 마침표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양솔규(42)씨는 진보정치를 ‘아래에서’ 경험했다. 한반도 남쪽엔 진보벨트 울산·창원·거제가 있다. 그는 주로 경상남도 창원에서 활동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가 이어진 곳이다.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87세대’의 고령화는 시작됐다. 그는 “자녀들이 대학에 가면서 실리적 경향이 생겨 당이나 노조가 대신해주기를 바랐다”고 돌이켰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했지만, 정규직 중심의 폐쇄성은 더해졌다. “무언가 해결해줄 국회의원이 필요하고, 의원을 만들려면 선거에서 이겨야 하고, 선거에서 이기려면 자금이 있어야 하고, 자금은 (정규직) 조합원의 세액공제에서 나오고.”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산별노조, 진보정당’의 양날개는 꺾였다. 갈수록 산별노조는 형식만 남았고, 진보정당은 갈라졌다. “창원이나 울산북구가 인구통계를 보면 굉장히 젊은 지역이에요. 그런데 당원들은 고령화됐죠. 젊은 비정규직들이 오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1973년생 솔규씨는 막내로 지냈다.
그는 진보정치가 실패한 하나의 이유로 “87년 노동운동이 만든 토착 리더십이 진보정당에서 꽃피우지 못해서”라고 말했다. 울산 현대자동차 위원장, 마산창원노동조합연합 지도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 지역의 노동운동가는 누구도 진보정당의 대표로 성장하지 못했다. 진보신당이 진보의 재구성으로 내세운 가치인 ‘평등·생태·평화·연대’는 신선했으나 새 주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는 “장애인투쟁에 연대하면서 블루칼라 아저씨들이 휠체어도 밀어봤다”며 “시야를 넓히려고 노력은 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난감한 세월이 흐르고 솔규씨가 세대 전승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세대 전승을 해야 하는 중년이 되었다. 그리고 진보결집 그룹이 노동당을 떠나면서 구성된 비상대책위에 언론국장으로 호출됐다.
홍원표(42)씨는 세 개의 진보정당에서 세 번의 상근을 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2010년 진보신당 정책위원, 2014년 노동당 정책실장을 맡은 것이다. 그에게 민주노동당은 ‘어머니가 마지막 투표를 했던’ 정당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을 뽑을 때 그는 “사흘 고민하고 지원했다”고 돌이켰다. “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한테 그랬죠. ‘나 민주노동당에 취직했다.’ 어머니가 돌아 누우시며 ‘그게 그렇게 좋으냐?’ 하셨어요. 총선에서 처음 비례대표 투표를 하는데 ‘어떻게 찍어야 되냐?’ 하셔서 ‘그냥 당만 찍고 와’ 했어요. 비례대표 용지는 투표함에 넣으시고 지역구 투표용지를 가지고 나오신 거예요. 선거관리위원회 사람들이 난리가 났었죠.”
“가장 상식적인 당이 가장 몰상식한 당으로”그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2004년에 가장 상식적이었던 정당이 2007년에 가장 몰상식한 당이 됐다”며 사표를 던졌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내세운 대선 방침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시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신당 정책위원회의 요청을 마다하지 못해 복귀했다. 2011년 8월에 상근을 끝냈지만, 그해 11월 진보신당 명망가들이 탈당한 다음 구성된 김혜경 비상대책위를 외면할 수 없었다. “김혜경 대표를 존경하거든요. 저희 어머니와 연세가 같고 황해도 출신으로 월남해서 만석동에 사신 것도 같아요.” 무엇보다 당대표가 되고도 이주노동자를 먼저 챙기는 “넉넉하고 원칙이 확고했던” 분이었다. 노동당 상근자인 부인과 “사내 부부”인 그는 “사회운동적 대중정당이라는 원칙을 지키고 싶다”며 “다수 진보정당이 공존하는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위 교섭단체’를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등이 공동으로 구성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다.
김정진 변호사는 “농담 반 진담 반”이라며 말했다. “한국에는 세 개의 정당만 있다고 해요. 박정희당, 김대중당, 김일성당. 여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괴로운 거죠.” 2012년 별세한 한국 진보정당의 ‘영원한 정책국장’ 이재영씨는 암 투병을 하며 이렇게 썼다. “의사들은 내게 25%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의사들 입장에서야 낙관적이기 어렵겠지만, 살아오면서 그처럼 커다란 확률을 잡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로또 맞은 것처럼 기쁘다.” 보수 양당 체제가 완고한 땅에서 진보정당이 성공하기란 기적에 가까웠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불가능한 상상이었던 진보정당은 치열했지만 현재까진 성공이라 말하기 어렵다. 아름답게 실패하지도 못했다는 박한 평가도 있다. 그러나 분란의 와중에, 평등파와 자주파라는 앙상한 잣대를 넘어서 ‘진보정당의 편’이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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