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행정기관의 장은 대통령령 등 행정입법이 법률에 위배되는 등 (국회) 의견이 제시된 때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1998년 12월 야당 국회의원 시절에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 제98조의 2다. 청와대가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나고 행정부를 마비시킬 수 있다”고 비판한 이번 국회법 개정안보다 한발 더 나아가 있다. 지난 5월29일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내용은 이렇다. “(국회) 상임위원회는 대통령령 등의 법률 위반을 검토해 법률 취지·내용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중앙행정기관에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행정기관은 수정·요구받은 사항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상임위에 보고해야 한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처리’라는 표현은 ‘따라야 한다’고 규정한 1998년 국회법 개정안보다 훨씬 강력해 보인다. 17년 전 초선 의원 시절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공동발의할 만큼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 강화는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원칙적으로 입법권은 국회의 권한이다. 다만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위임받은 사항에 대해 시행령을 정할 수 있다. 위임입법권이다. 시행령은 상위법인 법률의 취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사례가 자주 나타난다.
국회법 개정안의 불씨를 댕긴 ‘4·16 세월호 참사 특별법’ 시행령은 물론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도 그랬다. 기획재정부는 2009년 3월 국가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해 4대강 사업을 검증할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어린이집 누리과정(3~5살 무상보육) 보육료를 시·도교육청으로 떠넘기려고 정부는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등을 개정했다. ‘학교 앞 모텔법’이라 불리는 학교보건법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자 교육부는 장관 훈련으로 관광호텔업에 관한 학교환경위생정화위원회 심의규정안을 만들었다. 모두 상위법 위반이었다.
국회 법제실이 펴낸 ‘행정입법 분석 평가 사례’를 보면, 2011~ 2013년에 국회가 검토한 1800건의 행정입법 가운데 모법에 어긋난 경우가 61건이었다. 행정부 소속인 법제처도 지난해 8월 한국법제연구원에 의뢰해 법령 335건의 위헌 여부를 조사했더니 시행령 21건이 상위법과 어긋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 위의 시행령’이 반복되자 전문가들은 ‘행정입법 수정요구권’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2014년 12월 발간한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 통제권 강화에 관한 연구’를 보면, “위법한 행정입법에 대해 국회가 시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해 행정부가 이를 수용하도록 하는 게 타당하다”고 돼 있다. 이 보고서는 국회사무처의 연구용역을 받아 박태우 고려대 연구교수가 작성했다.
같은 시기에 국회개혁자문위원회도 “국회가 행정입법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국회법 제98조의 2를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국회개혁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김현태 창원대 교수(법학)는 “행정입법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의회 승인을 받도록 하는 것인데 미국이 그렇다. 수정요구권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서 간접적 통제라 볼 수 있는데 과잉 행정입법을 막으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도 국회의 행정입법 수정요구권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당 법안에는 정의화 국회의장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여야가 낸 총 5개 국회법 개정안이 병합돼 5월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국회에서 하는 예·결산 심사에도 적용돼이번 국회법 개정안이 삼권분립에 위반된다는 주장에 대해 한상희 건국대 교수(헌법학)는 “행정부가 수정 요구에 따르지 않았을 때 제재할 조항이 없어 강제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수정 요구나 처리 보고는 행정입법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현행 국회법에는 국회가 예·결산 심사가 끝난 뒤 그 결과에 위법이 있으면 시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 정부는 시정 요구를 받은 사항을 지체 없이 처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한 교수는 “행정입법은 위임받는 권한이고, 예·결산은 고유한 행정권이다. 그런데 왜 예·결산 수정요구권은 삼권분립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국회사무처가 외부 법무법인에 법률자문을 의뢰했더니 역시 “강제성이 없어 위헌이 아니다”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필요 이상의 법적 구속력으로 행정입법 권한에 대한 본질적 침해로 평가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판단된다.”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한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서는 행정입법에 대한 ‘의회 거부권’을 오래전부터 인정해왔다. 하지만 1983년 연방대법원이 의회의 거부권 행사를 위헌이라 판결하며 위기를 맞았다. 이유는 입법적 거부권 행사에 상·하원의 공동의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이 판결은 미국 의회의 행정입법 통제를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1996년 의회심사법을 제정해, 행정입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이전에 의회가 이를 충분히 검토하고 주요 행정입법은 상·하원이 불승인 결의할 수 있도록 했다. 본질적으로 거부권과 다를 바 없는 권한을 의회가 행사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법체계가 비슷한 독일에서도 주요 행정입법은 의회가 동의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행정입법의 40%가 그렇다. 또 의회가 행정입법을 수정하거나 폐지할 권한도 갖고 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은 의회에 의한 통제가 가장 발달돼 있다. 행정입법은 반드시 그 효력이 발생하기 전에 의회에 제출되는데 이를 심사하는 위원회를 상·하원에 두고 있다. 대부분의 행정입법은 그대로 효력이 발생하지만 의회가 행정입법 폐지를 의결할 때도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행정입법 통제권은 걸음마 수준이다. 이마저도 18년이나 걸렸다. 국회법 변천사를 되짚어보면, 행정입법의 국회 제출 제도가 탄생한 것은 1997년이다. “대통령령 등 행정규칙이 제정·개정될 때는 7일 이내에 국회에 송부해야 한다”는 제98조 2항이 신설된 것이다. 최초의 행정입법 통제 정책이다.
이듬해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여야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한다. “대통령령 등이 법률 취지·내용에 부합하지 않아 국회가 수정 의견을 내면 이를 따라야 한다”는 제98조 2의 개정안이다. 그 시절 초선 위원이던 박근혜 대통령도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 법은 국회 상임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00년 2월에는 ‘시행령과 모법이 어긋나 있다고 판단할 경우 국회가 시정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국회법 개정안이 본회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이 “위헌 요소가 있다”며 시정 요구를 ‘그 내용을 통보한다’로 순화했다. 이 수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2005년에는 “행정부가 통보받은 내용에 대한 처리 계획과 그 결과를 지체 없이 상임위에 보고해야 한다”고 추가했다.
법률 어긋난 152건 중 국회 보고는 ‘0건’그러나 ‘통보’와 ‘처리 계획과 그 결과 보고’만으로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정입법을 국회가 바로잡는 게 불가능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국회가 행정부에 법률에 어긋난다고 통보한 행정입법 152건 가운데 정부가 그 처리 결과를 국회에 보고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정성호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18개 상임위원회별 시행령 조치 보고 현황을 파악한 결과다. 처리 계획은 112건만 제출했다.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의 통제가 좀더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여야에 형성된 이유다. 지난 5월29일 재석 의원 244명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211명이 국회법 개정안에 찬성했다. 반대는 11명, 기권은 22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6월23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한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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