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필리핀 국화다. 자스민 바쿠어나이 이 빌라누에바(Jasmine Bacurnay y Vilanueva)는 1977년 1월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났다. 필리핀에서 ‘삼파기타’(Sampaguita)로 읽는 자스민꽃은 그녀의 이름이 됐다. 그녀는 “필리핀에서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자스민 꽃말은 ‘너에게 약속할게’. 38살 그녀는 남편과 약속, 이주민과 약속 등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공인이 됐다.
필리핀은 섬나라다. 섬마다 언어가 다르고, 섬에서도 언어가 다르다. 마닐라가 속한 루손섬의 타갈로그와 세부가 속한 비사야제도의 언어는 다르다. 단순한 방언 차이가 아니다.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에게 “모어(母語)가 비사야예요, 타갈로그예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모두 해요”라고 답했다. 마닐라 소녀는 11살에 민다나오섬 다바오 인근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보통 ‘어디 출신이냐’고 하면 마지막 살던 장소를 말하잖아요. 저도 다바오라고 말하는데 실은 마닐라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마닐라에서 태어나 11살에 다바오로 이주했다’고 말해도 기자님들은 ‘다바오 출신’이라고 쓰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저는 ‘생물학과를 다녔고, 여기를 졸업하면 대부분 의대에 간다’고 말했죠. 그러면 기자들은 ‘아, 의사가 된다는 거죠?’라고 묻고 ‘의대생’이라고 써요. 그게 제 학력 논란이 생긴 이유예요. 제발 같이 대학 다녔던 애들을 찾아가 물어봐주세요. 걔들 지금 의사예요.”
11살 소녀는 왕따를 당했다. 민다나오 북부에서 쓰는 비사야를 모르는 초등학생 6학년은 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언어를 익혔다. 소녀는 “선생님이 뭘 물어보면 꼭 손을 들고, 운동도 못하는데 육상선수로 나서고” 하면서 적응에 힘썼다. 힘들었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국내 이주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녀는 1993년 ‘아테네오 데 다바오’ 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을 마치기 전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남편 고 이동호씨는 원양어선 항해사였다. 그녀는 “한국에 관해선 학교에서 ‘은둔의 나라’라고 배운 한마디밖에 몰랐다”고 말했다. 12살 연상의 남편은 적극적이었다. “당시 필리핀 무비자 체류 기간이 보름이었는데, 보름에 한 번씩 한국에 돌아갔다가 왔어요. 몇 개월 뒤에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와서 ‘불법체류자가 되더라도 안 떠나겠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1995년 남편 이동호씨와 결혼해 그녀는 이자스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한국으로 이주했다.
4대 모여 사는 집의 맏며느리가 되다“한국에 오기가 무섭지는 않았어요. 다바오 이주 경험이 있었잖아요. 비사야를 배우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한국에 와서도 열심히 동네를 다니며 말을 배웠어요.” 그래도 ‘이주가 가장 쉬웠어요’였을 리는 없다. ‘한 사람이 오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오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이주는 존재의 지반이 뿌리째 변하는 일이다. 그녀도 “오기는 쉬워도 살기는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18살 이자스민은 시부모는 물론 시할머니까지 4대가 함께 사는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저는 (한국에서) 제 나이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이주를 하면서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창이 남편이 됐잖아요. 남편 친구들이 제 친구가 됐죠. 항상 남편 연령대로 살았어요. 저의 18살은 필리핀에 두고 온 거죠. 한국에 건너와 갑자기 (남편과의 나이 차 12살을 더해서) 30살이 됐어요. 지금도 서른여덟이지만 나이에 비해 생각이 많다는 얘기를 들어요.”
그렇게 그녀는 폭풍성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주는 능동적 선택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녀는 “이주를 통해 당당함을 얻었다”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한국에 적응한 그녀는 2005년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일찍이 이주했고 능숙한 한국어 덕분에 결혼이주 여성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한국방송 프로그램 의 고정 출연자가 됐다. 물방울나눔회에서 다문화가정도 도왔다. 서울시 외국인생활지원과 주무관으로 근무하며 행정 경력도 쌓았다.
여름이면 가족들이 놀러가던 곳이었다. 2010년 8월 강원도 영월군 옥천동 계곡에서 남편이 급류에 휩쓸렸다. 물에 빠진 딸을 구하고 아빠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한동안 방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나가보니 애들이 밥을 먹고 있어요. 개학해서 학교에 간다는 거예요. 산 사람은 살아야겠다고 정신을 차렸죠.” 장례를 치르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활동에 나섰다. “아들은 갑자기 어른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딸은 아빠가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엄마한테 잘하려고 하는 게 마음이 아팠죠.”
2010년 영화 출연에 이어 2011년 영화 에서 ‘완득이 엄마’를 연기했다. 하필이면 완득이와 엄마가 해후하는 극적인 장면을 영월에서 찍었다. “버스를 타고 창문을 보는 장면이 있어요. 밖을 봐야 하는데 강이 흘러요. 울면 안 되는 장면인데 눈이 퉁퉁 부었죠.” 남편을 잃은 지 8개월 만이었다. 지금도 방에 걸린 남편 사진은 힘들 때마다 “자스민이 못하면 누가 하겠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15번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사실 가 뜨면서 방송 출연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같은 프로그램 섭외도 왔고요. 강연도 많이 다녔거든요. 주변에서는 ‘왜 정치를 하느냐’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도 선택에 후회는 없다. 앞으로 국회의원이 아니라도 사회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어쩌면 모르고 살아도 좋았겠지만, 이미 알았으니 벗어날 수 없어요. 국회에 들어와서 쌓은 경험과 지식이 많잖아요. 예전처럼 이주민 강사를 해도 좋고, 다문화 관련 자문을 해도 되겠죠.”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회TV 에서 “국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이자스민 의원을 추천했다. 둘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하며 친해졌다. 인 의원은 “딸 같고 동생 같은” 이 의원을 “위안부, 청소년 문제, 통일 문제를 함께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노력파”라고 칭찬했다. “방송이든 의원이든 ‘들어갔을 때와 나왔을 때 같은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요.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변했다’고 하면 좋죠. 포장마차에서 한잔 기울이던 친구로 남고 싶어요.” 자스민 꽃말 같은 자신과의 약속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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