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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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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어도 좋아, 나는야 몰링족

대형 복합쇼핑몰에 가는 게 ‘일상’이 된 청소년과 20∼30대… 거대한 미로의 “당혹감을 주는” 공간 속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고, 여가를 쇼핑하면서 즐기는 문화를 만들고
등록 2015-02-17 14:56 수정 2022-11-08 18:56

“몰에선 길을 잃어야 제맛이죠.”
윤성은(39·푸드스타일리스트 전공)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대형 복합쇼핑몰에서 길 잃는 것까지 즐기는 ‘몰링(Malling)족’이다. “‘자라(ZARA)에 가서 세일하는 거 사야지’라는 목적을 갖고 몰에 간다고 쳐요. 그런데 자라로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자라에서 나왔을 때 새로운 가게, 새로운 트렌드를 발견하고 느낄 수 있어요. 그게 몰링의 재미예요.”

2012년 서울 여의도에 생긴 IFC몰의 내부 모습. 2000년 삼성동 코엑스몰을 시작으로 영등포 타임스퀘어, 김포공항 롯데몰, 잠실 제2롯데월드몰 등 서울 전역에 쇼핑에 문화 기능을 결합한 복합쇼핑몰이 들어섰다. 정용일 기자

2012년 서울 여의도에 생긴 IFC몰의 내부 모습. 2000년 삼성동 코엑스몰을 시작으로 영등포 타임스퀘어, 김포공항 롯데몰, 잠실 제2롯데월드몰 등 서울 전역에 쇼핑에 문화 기능을 결합한 복합쇼핑몰이 들어섰다. 정용일 기자

윤 교수는 덥고 추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여름과 겨울에는 거의 모든 약속을 몰에서 한다. IFC몰, 롯데몰, 코엑스몰, 센트럴시티, 타임스퀘어 등 위치 불문하고 다양한 몰을 즐긴다. 몰을 좋아해서 지난해 11월 롯데자산개발에서 인천 송도 롯데몰 개발·운영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남편과 함께 이라는 책도 썼다. 미국의 소비심리 분석가인 파코 언더힐이 쓴 을 제외하면 국내에 출간된 책 가운데 몰에서 쇼핑과 여가를 동시에 즐기는 ‘몰링’을 다룬 유일한 책이다.

도시 공간에서 다양하게 세포분열

서울에 복합쇼핑몰이 처음 생긴 때로부터 15년이 지났다.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르면 복합쇼핑몰은 쇼핑·오락·업무 기능이 한곳에 집중된 복합성을 가져야 하고, 매장 면적의 합계가 3천m² 이상이어야 하며, 1개의 업체가 개발·관리·운영하는 점포의 집단을 말한다. 2000년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삼성동 코엑스몰은 지난해 11월 오랜 내부 공사를 마치고 재개장했다. 역시 같은 해에 문을 연 서울 반포동 고속터미널의 복합쇼핑몰 센트럴시티도 최근 ‘파미에 스테이션’이라는 식음료 전문몰을 열었다. 복합쇼핑몰의 원조들이 새 단장을 하는 사이, 2005년 용산 역사에 아이파크몰, 2009년 영등포에 타임스퀘어, 2011년 김포공항에 롯데몰, 2012년 여의도에 IFC몰 등이 생기면서 10여 년 사이 서울 전역에 수평·수직으로 규모를 과시하며 복합쇼핑몰이 들어섰다.

몰이 도시 공간에서 다양하게 세포분열을 하면서 몰에 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된 몰링족도 생겨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 몰이 있어 몰에 익숙한 청소년이나 20∼30대 젊은 층이 몰링족에 속한다. 물론 여전히 몰에 갈 때마다 낯설고 불편하며 헤매는 사람도 많다. 올해 50대에 접어든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동네에 처음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파트 1층에 손님이 물건을 마음대로 집어 입구의 계산대에 가져다놓은 다음 돈을 지급하는 슈퍼마켓의 시스템이 정말 신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마트와 서점,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각종 식당, 의류·신발·가방·화장품 등 온갖 종류의 상품을 다루는 매장이 모두 모여 있는 복합쇼핑몰이라는 ‘더 신기한 장소’가 일상인 시대다. 류동민 교수는 소비공간에 대한 생경함을 바탕으로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가 만들고 만들어지는 도시, 서울을 사유하는 책 를 썼다. 이 책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공간이 코엑스몰이다. 코엑스몰은 그에게 “한번 들어서면 출구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한” ‘당혹감’을 주는 공간이지만, “지방에 사는 제 수업을 듣는 20대 친구들에게는 서울에 가면 꼭 가는 장소이고, 청소년인 제 아이들은 놀 때 꼭 가고 싶어 하는 즐거운 공간”이다. 그가 코엑스몰에서 ‘서울 유물론’을 시작한 이유다.

“몰링은 힐링이 돼요”

몰이 일상인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낮의 몰을 채우는 사람들의 7할은 유모차나 아기띠에 아기를 실은 엄마들이다. 인천 계양구에 사는 김유진(33)씨는 일주일에 세 번은 김포공항 롯데몰에 간다. 8개월 아기는 물론이고 7살 조카를 둔 언니와 같이 갈 때가 많다. 그에게 쇼핑몰은 육아에서 잠깐 쉴 틈을 주는 육아도우미다. “집에서 하루 종일 아기랑 둘만 있으면 혼자서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요. ‘엄마’ 이외의 정체성을 느끼기도 어려워요. 언니랑 같이 몰에 가서, 시간을 나눠서 제가 조카랑 아기를 보고 있을 때 언니가 쇼핑하고, 언니 일이 끝나면 제가 쇼핑해요. 꼭 들르는 매장은 자라나 H&M, 코데즈컴바인 등이에요. 제 옷이랑 아기 옷을 함께 볼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죠.”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의 평일 오후 모습. 낮의 쇼핑몰은 ‘나 홀로 육아’를 하는 젊은 엄마들에게 육아도우미 역할을 한다. 젊은 엄마들은 쇼핑에서 힐링을 찾았다. 바야흐로 소비의 시대가 몰과 함께 도래했다(왼쪽). 최근 새롭게 문을 연 서울 반포 센트럴시티의 식음료 전문몰 파미에 스테이션. 각종 맛집이 포진해 있다고 소문나면서, 유명한 식당에서 먹으려면 대기를 많이 해야 한다. 정용일 기자, 류우종 기자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의 평일 오후 모습. 낮의 쇼핑몰은 ‘나 홀로 육아’를 하는 젊은 엄마들에게 육아도우미 역할을 한다. 젊은 엄마들은 쇼핑에서 힐링을 찾았다. 바야흐로 소비의 시대가 몰과 함께 도래했다(왼쪽). 최근 새롭게 문을 연 서울 반포 센트럴시티의 식음료 전문몰 파미에 스테이션. 각종 맛집이 포진해 있다고 소문나면서, 유명한 식당에서 먹으려면 대기를 많이 해야 한다. 정용일 기자, 류우종 기자

여의도에 집과 직장이 있는 김유라(33)씨는 2012년 여의도에 IFC몰이 생기고 쾌재를 불렀다. 김씨 역시 돌이 지나지 않은 아이의 엄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가고 많게는 세 번도 간다. “여의도에 가족이 갈 곳이 없어요. 다양한 밥집이 빌딩 지하마다 있긴 한데, 직장인들이 빨리 먹는 곳이지 가족이 여유롭게 식사하는 분위기는 아니에요. 웬만한 큰 식당이 아니면 아기의자 같은 건 당연히 없고요. 그런데 IFC몰이 생기면서 아이랑 함께 유모차를 끌고 가 서점에서 책도 보고 쇼핑도 하고 밥까지 편하게 먹을 수 있으니, 육아휴직 중에도 트렌드에 뒤지지 않고 갇힌 육아가 아니라 열린 육아를 하는 느낌이에요.” 김씨는 아이를 낳기 전부터 몰을 즐기던 몰링족이었다. “코엑스몰까지는 멀어서 잘 못 갔어요. 몰이 집 근처에 생기기 전까지는 쇼핑은 백화점에서,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며 분리해서 여가를 보냈죠. 몰이 생긴 이후로는 영화 보고 쇼핑하고 원스톱으로 할 수 있으니까 대체로 몰만 가게 됐어요. 용산 아이파크몰, 영등포 타임스퀘어도 자주 가요. 주차도 편리하고요.” 김씨는 캠핑, 트레킹 등 야외에서 즐기는 여가활동보다 몰링이 훨씬 편안하고 즐겁다고 했다. “야외에서 놀면 힘들고 위험한 느낌인데 몰링은 힐링이 돼요.”

쇼핑몰에서는 맛집도 이용자를 모으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서울 신사동에 사는 직장인 이현미(33)씨는 집에서 가까운 반포동 센트럴시티에 자주 간다. 최근에는 맛집이 포진한 ‘파미에 스테이션’에서 이름난 식당에 가려고 세 번 시도해 마지막에 겨우 성공했다.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요. 지난 주말(2월8일)에도 소문난 맛집이 있어서 갔는데 대기자가 많아 결국 다른 집으로 갔어요. 기다리는 일이 좀 지치기는 하지만, 맛있다니까 가보고 싶어요. 백화점이랑 붙어 있으니까 쇼핑하기도 편하고요.” 각종 안전 이슈로 방문객이 많지 않은 제2롯데월드몰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인기 있는 브런치 레스토랑 등 국내에서 처음으로 입점한 식당의 경우 식사 시간에는 기다려서 먹어야 한다.

‘어디서 쓰느냐’를 중요한 이슈로

3천m²가 넘는 거대한 미로 같은 공간에서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윤성은 교수는 “길을 잃는 게 몰의 콘셉트”라고 말했다. 몰링족은 길을 헤매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집에서 10분 거리여서 일주일에 한두 번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가는 고1 학생인 임규리(16)양은 “특별히 길 찾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다”고 했다. “자주 와서 그런지 ‘어디를 가야 한다’는 목적이 있을 때는 머릿속에 동선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고요. 새로 생긴 매장을 가게 되면 안내데스크를 이용하기도 해요. 그런데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즐겨요. 10분이면 가는 거리를 30분쯤 걸려서 가는 게 재밌어요. 가는 길에도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눈요기를 하게 되니까요.”

몰에 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된 몰링족도 생겨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 몰이 있어 몰에 익숙한 청소년이나 20∼30대 젊은 층이 몰링족에 속한다. 물론 여전히 몰에 갈 때마다 낯설고 불편하며 헤매는 사람도 많다.

올해 고3이 되는 김민지(18)양은 2009년 타임스퀘어가 처음 생겼을 때는 거의 매일 타임스퀘어에서 놀았다. “옷 사러 멀리 안 가도 되겠다 싶어서 좋았어요. 영등포가 발전하는 것 같아서 자랑스럽기도 했고요. 길을 헤맬 때는 개척지를 탐험하는 기분이었어요. 매일 와도 새로운 물건이나 새로운 가게를 보게 되니까 신났고요. 이제는 길을 다 외워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와서 밥 먹고 카페에 가고, 핫트랙스에 가서 음반 구경을 하고 지오다노에 가서 옷을 구경하며 놀아요. 시간 낭비는 좀 심한 것 같아요. 여기 오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요.” 미국에서는 이렇게 쇼핑몰 구석구석을 구경하며 채우는 10대들을 몰을 돌아다니는 생쥐에 비유해 ‘몰랫’(Mallrat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쇼핑몰과 함께 성장한 한국의 10대들도 쇼핑몰을 즐겁게 돌아다니는 몰랫에 가깝다.

아파트가 어떻게 중산층의 욕망과 감수성을 형성했는지를 추적하면서 도시공간에 대한 사유를 넓혀온 박해천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디자인연구)는 복합쇼핑몰이라는 공간이 개인의 정체성을 ‘소비자’로 빠르게 포획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대형 복합쇼핑몰이라는 공간이 생기면서 일상의 여가시간을 쇼핑이 점유하게 됐다. 이 시기는 1990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가 정점을 찍으면서 ‘국민’과 ‘민중’ 대신 ‘개인’과 ‘소비자’가 생겨나는 시기 바로 다음에 온다. 신도시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이 당시 대형마트에서 주 1회 쇼핑을 하면서 ‘쇼핑의 가족화’가 이루어졌다. 신도시가 아닌 도심 내부에서는 복합쇼핑몰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족이 함께 쇼핑하는 문화, 여가를 쇼핑하면서 즐기는 문화가 생기면서 이제 개인과 가족의 정체성은 빠르게 ‘소비자’로 포획됐다. 동시에 각종 ‘푸어’가 생기기 시작했다. 쇼핑몰에서 사람들은 ‘어디서 버느냐’ ‘얼마나 버느냐’를 잊는다. 쇼핑몰은 모든 개인이 자신을 소비자로 인식하게 하면서 ‘어디서 쓰느냐’는 이슈만을 부각한다.”

‘욕망’이 아닌 ‘소통’이 그곳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제 쇼핑과 여가를 동일시한다. 물건을 사는 게 곧 여가가 되고 ‘힐링’이 되는 시대가 됐다. 서울 곳곳에 들어찬 몰이 바로 ‘쇼핑과 여가의 동일시’를 이끌어낸 견인차다. 19세기 발터 베냐민처럼 서울을 사유하며 산책한 하루를 담은 의 저자 류신 중앙대 교수(유럽문화학부)는 산책 내내 서울의 쇼핑몰에서 “자본주의 상품 물신의 적나라한 실체”를 봤다. 다만, 그는 아케이드 공간의 ‘광장성’에도 주목했다. “쇼핑몰은 편하게 돈을 쓰게 하는 공간이다. 돈이 없는 자를 배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이 삭막한 공간이긴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공명하는 연대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이 아닌 ‘소통’이 쇼핑몰에 들어찰 수는 없을까. 그게 산책을 마치며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이수현 인턴기자 alshgogh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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