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감독이 2014 브라질 월드컵 축구대표팀과 튀니지의 평가전이 열린 28일 오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선수들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정작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나면 감독이 맡은 역할은 제한적이다. 벤치에서 온갖 액션을 취하고 소리치며 선수들을 독려하지만, 경기장 안에서 순간순간 벌어지는 모든 플레이는 오롯이 선수들의 몫이다. 이런 이유로 축구에서는 ‘감독의 탈을 쓴 필드 위의 감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을 일컬어 ‘리더’라고 한다. 혹은 영화계에서 감독의 속뜻을 가장 잘 파악하고 표현해내는 배우를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를 원용하곤 한다.
미국 월드컵 값진 수확, 홍명보의 발견1974년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 1994년 브라질의 둥가, 1998년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월드컵에서 성공한 팀의 족적을 따라가다보면 감독을 대신한 훌륭한 리더가 있었다는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홍명보 감독은 ‘원 팀, 원 스피릿, 원 골’(One Team, One Spirit, One Goal)을 천명했다. 하나의 정신으로 뭉친 하나의 팀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본선을 앞둔 홍 감독의 시름은 깊다.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낼 구심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선을 앞두고 홍명보호를 향해 쏟아지는 불안한 시선과 다양한 비판은 대체로 리더 부재에서 기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브라질 월드컵의 최대 화두는 지난 10년간 박지성으로 대표되던 한국 축구의 페르소나를 대신할 새로운 리더의 발견일 것이다. 20년 전 홍명보 감독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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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감독은 20년 전인 1994년 미국 월드컵 때의 자신을 추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미국 월드컵은 한국 축구 역사에서 세대교체기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대표했던 차범근과 허정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이끌던 최순호·박경훈·변병주·이태호·정용환 등이 모두 은퇴한 터라 베테랑이 부재한 시기였다. 당연히 미국 월드컵 대표팀엔 ‘최약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김호 감독은 “주축 선수들이 대거 은퇴한 상황에서 새롭게 선수를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홍명보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고 리더십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홍명보는 나이답지 않은 묵직함과 냉정함으로 대표팀의 중심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전술적인 핵심을 맡았다. 김호 감독은 홍명보를 중앙수비수로 기용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플레이메이커로 전진 배치하는 ‘홍명보 시프트’로 스페인·독일 등 세계적인 강호를 위협했다. 스페인과 치른 첫 경기에서 0-2로 뒤지던 상황에 프리롤을 부여받고 미드필드까지 진출한 홍명보는 추격골을 터트린 데 이어, 서정원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기염을 토했다. 독일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0-3으로 뒤지자 다시 한번 리베로로 나서 2-3까지 추격하는 오른발 중거리골을 뽑아냈다. 유럽은 그에게 ‘아시아의 베켄바워’라는 찬사를 보냈고, FC 바르셀로나도 영입에 관심을 보일 만큼 홍명보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비록 예선 성적 2무1패로 아쉽게 본선 16강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미국 월드컵은 새로운 리더 홍명보를 발견한 값진 수확을 남긴 대회였다.
한국 축구의 리더십 다시 세운 박지성홍명보는 정신적·전술적인 리더만은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났고, 때로는 스스로를 낮추면서도 자신의 소임을 잊지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뒤 한때 ‘홍명보 무용론’이 거세던 적이 있었다. 당시 부상 중인 홍명보를 향해,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잃었다는 평가와 함께 홍명보 같은 스위퍼는 일자 수비가 대세인 새로운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냉정한 비판이 이어졌다.
홍명보는 9개월간 대표팀을 떠나 있었다. 그러다 최악의 졸전으로 히딩크 감독의 경질론까지 불거지던 2002년 3월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왔다. 화려한 복귀는 아니었다. ‘벤치에 앉는다고 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온 백의종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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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는 낮은 자세로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증명해 보였다. 지옥훈련이라고 불리던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에서 홍명보는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속된 말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고, 또 뛰었다. 그의 솔선수범에 대표팀의 기강은 단단해졌다. 우리 팀이 튀니지와의 평가전을 시작으로 무패 행진을 달리자 ‘역시 홍명보’라는 예전의 평가를 되찾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폴란드와 첫 경기가 열리기 직전, 히딩크 감독은 홍명보를 따로 불러 “만일 선제골을 내주게 되면 네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 냉정하게 경기를 이끌어달라”고 당부했다. 그의 복귀를 두고 고민하던 히딩크 감독마저 리더 홍명보를 인정한 것이다. 한-일 월드컵 4강을 확정짓던 스페인과 8강전 승부차기 골 이후 홍명보가 쏘아올린 환한 웃음은 리더의 소임을 마친 해방감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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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홍명보의 계승자다. 홍명보가 한-일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한 뒤 한때 흔들리던 한국 축구의 리더십을 다시 세운 이가 바로 박지성이다. 박지성은 홍명보 같은 위엄과 카리스마를 갖추진 않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리더십을 전파했다. 박지성의 리더십은 소통과 배려였다. 박지성의 존재감이 워낙 컸기에 그의 섬김 리더십은 더욱 빛났다.
‘박지성과 함께 뛴다’는 것만으로도 팀 동료들에게는 두려움을 떨치고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을 앞두고 벌인 한-일전을 벤치에서 지켜보던 구자철은 “지성이 형이 볼을 뺏기자 악착같이 쫓아가 다시 되찾아오는 플레이에서 리더의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한-일전 결승골의 화려함보다는 헌신적인 플레이가 후배들에게는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박지성이 뛴다’는 것은 상대에게는 위압감과 압박감을 주었다. 한-일전에서 골을 터트린 뒤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정적으로 몰아넣었던 ‘산책 골뒤풀이’는 박지성 존재감의 하이라이트였다.
남아공 월드컵 16강전을 마친 뒤 박지성에게 다가가 유니폼을 교환한 우루과이 선수 수아레스는 훗날 “당시 감독에게서 ‘맨유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은 큰 경기에 강한 선수다. 90분 내내 박지성을 놓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와 유니폼을 교환하는 건 큰 영광이다”라고 회고했다.
“운동장 안에 감독이 없다”나무가 크면 그림자가 길고,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다. 데니스 베르흐캄프가 은퇴한 네덜란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본선조차 오르지 못했고, 지단이 은퇴한 프랑스는 아직껏 리더십을 회복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어떤 조직이든 존재감이 컸던 리더의 부재를 치유하는 데는 필연적인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출정식으로 펼쳐진 5월28일 튀니지와의 평가전 패배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홍명보호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수비조직력 불안, 골결정력 부재, 전술적인 미스 등 다양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가장 큰 핵심은 리더 부재였다. 안정환 MBC 해설위원은 “운동장 안에 감독이 없다”면서 “모래알 같다”는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홍명보와 박지성이 보여준 솔선수범의 리더십은 물론, 홍명보의 카리스마와 박지성의 헌신의 리더십도 보이지 않았다. 기성용은 본연의 임무를 잊고 마치 자신이 골을 넣어야겠다는 듯이 드리블하기 바빴고, 이청용(볼턴), 손흥민(레버쿠젠), 구자철(마인츠), 김보경(카디프시티) 등 박지성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이들 역시 팀보다는 개인을 앞세웠다.
홍명보와 박지성은 강렬한 개성과 신비감이 넘쳐 자칫 냉소적이며 통제가 힘든 스타들을 화학적으로 녹여낼 수 있는 강력한 ‘용매’(溶媒)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23명이 화학적으로 하나 되게 하는 리더십의 구현이야말로 본선까지 남은 기간에 홍 감독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미션이다.
홍 감독은 최종 엔트리 선발 과정에서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유럽 리그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한 박주영(아스널)과 윤석영(QPR)을 전격 발탁했기 때문이다. 홍 감독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점을 브라질에서 증명해야 한다.
역대 월드컵을 살펴봐도 최종 엔트리 논란에서 자유로웠던 감독은 없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김호 감독은 국내 평가전에서 2경기 연속골을 터트린 조진호를 월드컵에 출전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차범근 감독은 약관 이동국을 발탁한 것을 두고 “월드컵에 테스트용 선수를 뽑는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허정무 감독은 아버지와의 친분으로 오범석을 발탁했다는 어이없는 루머로 고생했다.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길 가라최종 엔트리 선발을 두고 저마다의 생각이 있겠지만, 결국 선수 선발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다. 역대 월드컵 감독들은 홍 감독에게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고 조언한다. 차범근 SBS 축구해설위원은 “모든 것은 감독이 결정해야 한다. 홍명보 감독이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 엉켜져 있는 실타래를 잘 풀어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뚝심 있는 지도자다. 자신의 리더십을 구현할 새로운 리더를 찾는 동시에 2년 전 런던 올림픽을 통해 보여준 자신의 철학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해내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브라질 월드컵을 통해 전쟁에 나선 장수를 신뢰하고 끝까지 지지하는 성숙한 폴로어십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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