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9년간의 미국 연방 대법관 생활을 마친 데이비드 수터(당시 69살)는 상자 하나를 낡은 폴크스바겐에 싣고 뉴햄프셔주로 낙향했다. 1990년 대법관에 지명돼 워싱턴으로 이사할 때 가져온 그 상자에는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사진 등이 가득했다. 하지만 수터는 그 이삿짐을 워싱턴에서 사는 동안 풀지 않았다. 몇 년만 지나면, 아니 언제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면서 말이다.
11살 때부터 수터가 살아온 고향집은 전형적인 시골 농가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우편함엔 녹이 슬어 있다. 낡은 지붕에서 비가 곧잘 새고, 그러면 독신인 수터가 몇 시간씩 수리하곤 한다. 다른 시골 농가와 다른 점이라면 수천 권의 책이 도서관처럼 정리돼 있다는 것 정도다. 종신직인 연방 대법관(9명) 가운데 넷째로 젊은(?) 수터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퇴직을 선언한 이유는 이 고향집이 그리워서였다. 법복이 장롱에서 가장 화려한 옷이었던 그는 ‘대법관 수터’에서 ‘지역주민 데이비드’로 돌아가 변함없이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일본에서도 개업, 정계 진출 거의 없어국무총리 후보에 지명됐던 안대희(59) 전 대법관의 낙마로 사법부가 맞닥뜨린 고질적 병폐와 새로운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관예우 관행과 행정부의 인력 창고로 전락한 사법부의 현주소가 그것이다. 2009년만 해도 안 전 대법관의 재산은 대법관 중 최하위였다. 검사장 출신인 그는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청렴한 법조인이란 영예를 얻었다. 2006년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도 그는 퇴직 뒤 변호사 개업을 할지에 대해 묻자 “구체적인 사건을 수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랬던 그가 총리 후보자로 지명돼 재산을 공개해보니 변호사 개업 10개월 만에 27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하루 수입이 1천만원에 육박한다. 청렴·강직 이미지가 우르르 무너졌고 결국 지난 5월28일 전격 사퇴했다. 이 때문에 전관예우만큼이나 심각한, 최고 법관의 행정부행은 도마 위에 오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는 고위 법관을 잇달아 차출하고 있다. 전·현직을 가리지 않는다. 김용준(76) 전 헌법재판소장을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 이어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고(자진 사퇴), 황찬현(61) 서울중앙지법원장을 감사원장에, 최성준(57)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방송통신위원장에 앉혔다. 이명박 정부 때 대법관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않고 감사원장으로 옮겨갔던 김황식(66) 전 대법관은 2년5개월간의 총리직 수행을 끝내고 2014년 새누리당 서울시장 경선 후보자로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다. 검사 출신인 정홍원 총리의 후임으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지명함으로써 고위 법관의 행정부행은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행보는 전관예우와 그 인식의 뿌리가 맞닿아 있다. 법관을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논문 ‘법치주의와 사법부 독립’에서 이렇게 밝혔다. “미국은 물론 영국, 독일, 프랑스, 심지어 우리와 법조 제도가 유사한 일본의 경우에서도 법관들이 ‘옷을 벗고’ 변호사로 개업하고 또 이어서 정계로 나가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번 법관이면 끝까지 법관으로 남는 것이며, 중도에 나가는 것은 수치 혹은 불행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법관의 자리가 경력 관리 코스처럼 돼버렸다.”
지난 3월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지명됐을 때 최성준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법부에서 닦아온 지식이 다른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회가 왔을 때 평생 법관을 고집하는 것보다 (행정부로 가는 쪽이) 나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김황식 총리도 2013년 2월 와의 인터뷰에서 그랬다. “행정도 결국 법 집행이니까 법조인이라면 자질을 갖췄다고 보지만 행정 경험이 부족한 게 문제죠. 저는 감사원장을 거쳤기 때문에 원한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주어졌어요.”
‘잘하면 출세시켜줄게’라는 메시지고위 법관의 행정부행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소장 장유식 변호사)는 안대희 총리 후보에 관한 논평에서 이렇게 우려했다. “법관들이 행정부의 고위직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순간, 미래의 임명권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나 정치세력들에게 친화적 판결을 선고하거나 사법행정을 펼칠 유혹에 빠져든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잘하면 출세시켜줄게’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행정부가 사법부까지 장악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배 법관이 공직자로 가는 것을 보면 적잖은 후배 법관이 행정부 고위직으로 간다는 기대나 욕망을 가질 수 있다. 후배 법관들의 중립적 판결을 위해 임명권자의 요청이 있더라도 사양하는 게 바람직한 자세다”라고 말했다. 실제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내려왔다고 해도 사법 불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판결은 공정할 뿐 아니라 공정해 보여야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브렌다 헤일 영국 첫 여성 대법관)
둘째,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 우리 헌법은 입법·행정·사법부가 각각 독립성을 지켜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돼 있다. 어느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 독재가 출현할 수 있고 국민의 권리도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권분립은 미국의 독립 과정에서 탄생한 대통령제의 기본 원칙이다.
미국은 특히 사법부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미국 헌법을 기초한 알렉산더 해밀턴의 말이다. “사법부는 칼도 돈도 갖고 있지 않으며, 사회의 힘이나 부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 사법부는 힘도 의지도 없으며, 단지 판단만을 내린다.” 현실적 권력이 없는 사법부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한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현실적 권력을 심판하고 감시해야 하는 사법부의 초월적 권위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사법부의 초월적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해밀턴은 법관의 종신제를 선택했다. “종신직만큼 사법부의 확고부당함과 독립성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종신제는 사법부의 설립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돼야 한다. 국민의 정의와 안전을 위한 피난처로 간주해야 한다.” 법관이 ‘경유지’가 아니라 ‘종착지’가 돼야만 사법부가 정치적 영향에 휘둘리지 않고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200년 전 해밀턴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종신제, 사법부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됐다는 것은 공직자와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대법관으로 취임한 뒤 사망이나 퇴직이라는 사유가 발생할 때까지 그 직을 수행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관은 무려 36년을 재직했고 올리버 홈스 대법관은 91살에 대법관직에서 퇴직했다.”(강승식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저서 ) 미국처럼 최고 법관이 ‘종착지’가 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안대희’가 계속 이어질 것인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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