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원인으로 관계자들의 안전 불감증과 당사자 의식 부족을 들 수 있다. 시민사회도 ‘효율성 지상주의’의 구조적 병폐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안전성을 제고하려는 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지난 5월2일 국민의 기본권 및 안전 등을 침해할 뿐 아니라 국가의 존립조차 위협하는 법률 개정안을 가결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제출한 ‘원자력시설 등의 방호 및 방사능방재대책법’(이하 원자력방호·방재법) 일부 개정안이다. 주요 내용으로 ‘핵테러 행위의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 및 핵물질 및 원자력시설의 물리적 방호에 관한 협약’과 발을 맞추기 위해 국내법을 보완·강화하고 방사능 재난이 일어났을 때 인근 주민들의 대피·피난 범위를 규정한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의 확대’를 담고 있다.
핵발전소 앞에서 항의해도 정상 운전 방해
원자력방호·방재법에는 핵발전소 같은 위험시설의 비밀 보호를 강조하고 있지만, 국민의 알 권리 및 안전 등 기본권 보장에 관한 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핵발전소 등 관련 시설의 정상적 운전의 방해 행위(제2조 제5항) 및 예비·음모(제47조 제10항)에 대한 조항은 위법성 판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면 핵발전소 정문에서 항의해 직원 출입에 지장이 생겨도 ‘정상적 운전의 방해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원자력방호·방재법의 목적이 핵테러 방지보다는 핵발전소의 반대파를 원천 봉쇄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법은 핵발전의 원활한 추진을 통해 기득권 확대를 꾀하려는 핵마피아의 ‘비밀보호법’에 지나지 않는다.
개정안에는 핵발전소 등의 방사능 사고의 효율적 대응을 명목으로, ‘방사선비상계획구역’(핵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벌어질 경우, 그 피해를 감안해 대피시설과 방호물품 등 주민 보호를 위한 준비를 해두는 구역)의 확대 및 구분에 관한 규정을 새롭게 도입했다. 기존 구역 범위(핵발전소 반경 8~10km)를 최대 30km로 확대하고, 예방적 보호조치구역(PAZ, 핵발전소 반경 3~5km)과 긴급보호조치계획구역(UPZ, 핵발전소 반경 20~30km)으로 나눴다.
이 규정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국제 기준을 반영한 것이나, 주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구역 확대의 경우, 국제 기준의 범위에 맞추고 보자는 의도만 강조하면서 높은 인구밀도 및 핵발전소의 집적도 등 국내의 특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일본 제도를 ‘베낀’(!) 방사선비상계획구역 8~10km를 고집하면서 2002년부터 안전기준(GS-R-2시리즈)을 도입해 회원국들에 구역의 확대·구분을 촉구해온 IAEA의 권고조차 외면해왔다. 심지어 일본이 핵발전소 반경 9km 내에 있는 유일한 도청 소재지(마쓰에시, 인구수 약 21만 명)를 배제할 목적으로 특별히 설정한 8km라는 규정조차 그 영문도 모른 채 줄곧 사용해왔다. 이는 일본의 핵마피아가 도시 인구의 실효성 있는 피난계획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해, 마쓰에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도입한 규정이었다. 한편 일본 제도의 장기간 이용에 따른 학습효과 덕분(?)인지, 개정안에서는 다시 이중적인 구역 범위가 도입됐다. 즉, 대상 인구를 축소해 핵마피아가 피난 및 방호 등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피해도 적게 보이게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 4일 뒤, 북서 방향으로 약 40km 떨어진 이다테무라(읍에 해당)에선 시간당 공간 방사선량이 법적 기준보다 약 200배나 높게 측정됐다. 전 주민 약 6천 명이 지금도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약 60km 밖의 도청 소재지인 후쿠시마시(주민 약 29만 명)에서도 법적 기준보다 20배 이상 높은 오염 지역이 부분적으로 발견됐지만, 필사적인 제거 작업으로 시 주민의 강제 피난 조치를 피할 수 있었다. 방사능 재난의 경우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오염 지역 및 범위가 달라지는 만큼, 예방적 피난 조치가 가장 중요한 피폭 방지 수단이다. 따라서 구역 범위를 이중적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국제 기준처럼 PAZ 5km와 UPZ 30km로 각각 단일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의 제도처럼 ‘음식 섭취의 제한 및 옥내 대피 등의 조치가 필요한 구역’(PPA)으로 최소 80km의 구역을 새로 확정해둘 필요가 있다.
또한 실효성 없는 피난계획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리 핵발전소 반경 20km 내 지역 주민들의 피난계획의 경우, 과연 충분한 수송수단·수용시설 등이 준비돼 있는지 의문이다. 후쿠시마 사고에서는 노약자, 특히 고령자의 사망이 많아 사고 직후 3개월 동안의 사망률이 평소보다 3배나 높았다.
주민들 집단 피난훈련 4년에 한 번뿐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정부는 고령자 및 중환자의 경우 즉각 피난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현재의 시설에서 대기하는 방침을 정해 시설의 방재 기능을 강화(창문의 이중화 및 통풍구의 필터 설치 등)하는 데 보조금을 교부하고 있다. ‘피난 약자’가 될 수 있는 신체·정신 장애인 및 어린이, 임신부들의 명단도 파악하고 있다. 5km 내의 지역 주민들에게는 갑상선 방호약품(요오드제)도 미리 배포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의 피난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요오드제를 정확히 배포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요오드제 복용 대상의 연령 제한(40살 이하)을 없애 전 주민으로 확대하고, 알약의 복용이 어려운 유아를 위한 요오드제도 개발하고 있다.
주민의 피난훈련이 얼마나 철저한지도 의문이다. 현재 핵발전소가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는 주민의 집단 피난훈련(합동훈련)은 4년마다 1회에 불과해, 주민들의 피난계획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또 거리별로 주민의 피난이 단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전제조건도 의미가 없다. 일단 5km 내 주민의 피난이 시작되면, 그 밖의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피난도 함께 시작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후쿠시마 사고의 경우, 교통체증 때문에 이동시간이 평소보다 약 10배나 더 걸렸다. 핵발전소 5·6호기가 위치한 후타바마치에서는 주민 약 7천 명의 피난이 미처 끝나기 전에 방사성물질(죽음의 재)이 마을을 덮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본 정부가 주민 피난(3km 내 지역)을 최초로 지시한 뒤 약 18시간 만에 1호기가 폭발한 탓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국내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다면, 과연 구역 주민들이 모두 18시간 안에 안전지역으로 대피할 수 있을까?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뿐만 아니라 핵연료 가공 공장이 있는 대전 지역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번 개정안은 주민의 ‘피폭선량의 최소화’가 아니라 전력회사의 ‘안전비용의 최소화’에 중점을 둔 것으로, 안전 신화 추종자들의 안전 불감증을 공공연히 드러낸 셈이 됐다. 언뜻 보면 IAEA가 주장하는 심층 방호의 마지막 5단계인 ‘피해 경감을 위한 방재계획 강화’를 반영하는 형식이나, 여전히 핵마피아의 경제성을 앞세운 탓에 실질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오랫동안 핵마피아들은 핵발전소 사고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방재계획, 특히 피난계획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해왔다. 안전 신화가 의심받아 기득권의 유지 및 확대가 곤란하게 되므로, 최대한 ‘긁어 부스럼’이 되는 행위를 피해온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가장 합리적인 길은 핵발전소 멈추는 것
방사능 재난은 철저한 피난(방재)계획을 세워 훈련하는 것 말고는 사고 피해를 줄일 방법이 없다. 관계 당국의 말과 서류로는 결코 주민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피난계획의 수립·실시·평가 등에 지역 주민이 주체적으로 참가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또한 잠재적 가해자(한국수력원자력)를 위한 ‘방호’와 피해자(주민)를 위한 ‘방재’를 하나의 법으로 묶는 법 체계가 아니라, 각각 분리된 법의 제정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실효성을 보장하는 피난계획을 세울 수 없다면, 핵발전소의 건설을 중지하고 가동을 멈추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대 교수·경제학(원자력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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