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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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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녀에서 썸녀가 된 그와 삼귀기만 몇 년째

한 대학생의 다단계 연애 사전

불안한 현실의 복판에서 ‘사귄다’까지 가지 못하고 뛰는 심장에 제동을 거는 청춘들
등록 2014-04-16 17:35 수정 2020-05-03 04:27
tvN에서 방영 중인 〈코미디 빅리그〉의 ‘썸&쌈’ 코너는 서로 호감이 있는 ‘썸남/썸녀’ 커플과 한쪽은 관심을, 한쪽은 적대감을 가진 ‘쌈남/쌈녀’ 커플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tvN 제공

tvN에서 방영 중인 〈코미디 빅리그〉의 ‘썸&쌈’ 코너는 서로 호감이 있는 ‘썸남/썸녀’ 커플과 한쪽은 관심을, 한쪽은 적대감을 가진 ‘쌈남/쌈녀’ 커플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tvN 제공

【남사친/여사친】

‘남자사람친구’/‘여자사람친구’의 줄임말. 무슨 관계든 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대상.

【심남/심녀】

관심이 가는 남자 혹은 여자. 막연하게 호감은 가지만, 그렇다고 꼭 연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상대의 호감도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

【썸남/썸녀】

썸을 타는 남자 혹은 여자. 심남/심녀에서 발전한 단계다. 썸을 탄다면 이미 상대도 호감이 있다는 이야기. 잘 발전시키면 사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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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다】

사귀기 직전의 상태 혹은 사귀는 것을 유예한 상태. 사귀지는 않지만, 사귄다고 선언만 하지 않았지 사귀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을 한다.

캠퍼스에 꽃들이 넘쳐난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과 벚꽃이 캠퍼스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수많은 CC(캠퍼스 커플). 여기도 커플, 저기도 커플이다. 오늘도 강의실을 옮겨다니는 도중 수많은 커플들이 나를 지나쳤다. 대부분 새내기나 정든내기 친구들이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에게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속삭이기도 한다.

밝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캠퍼스를 걷는 그들을 보며 나는 인간 소외가 참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저런 낭만이 없다. 낭만을 즐길 여유 따위는 ‘취준생’(취업준비생)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 감히 연애란 말인가. 당장 졸업이 코앞이고, 내 인생은 결정되지 않았다. “뭐 해먹고 살래?”라는 부모님의 질문이 뒤통수를 강하게 때린다. 내가 무엇이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라도 될 수 있으면 좋을 뿐이다. 나도 연애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이 욕망을 스스로 거세하고 있을 뿐이다. 직장에 들어가면 연애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연애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니만….

‘심쿵’ 불러온 ‘여사친’!

연애라는 걸 나도 해보고 싶어서 몇 번의 소개팅을 했다. 우선은 탐색전이다. 이 사람과 현실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을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현재의 신분? 직장인? 졸업생? 수료생?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면 어떤 계통을 준비하는지, 재정 상태는 어떤지를 봐야 한다. 물론 직장인이 가장 좋다. 하지만 직장인이 뭐가 아쉬워서 미래가 불투명한 대학교 4학년 취준생을 만나준단 말인가. 그러니 나머지 중에서 골라야 한다. 데이트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고, 부모님에게서 재정 지원을 받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이어야 연애가 ‘물리적’으로 가능해진다. 아무리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면 뭐하나, 연애가 불가능한 상태면 말짱 도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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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미래 속에서 연애를 시작하기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그냥 ‘삼귄다’. 서로 좋아하고 같이 일상을 공유하고 있는데, 굳이 공식적으로 연애를 시작할 필요가 있겠는가.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이제 슬슬 상대가 나의 관심권에 들어올지 말지를 판단해야 한다. 물론 상대가 나의 심녀가 된다면, 나도 상대에게 심남이 되어야겠지. 외모가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성격이 좋아서 관심이 갈 수도 있다. 심녀는 같은 과 선배나 동아리 후배일 수도 있다. 같이 수업을 듣지만 아직 한 번도 얘기해본 적 없는, 언제나 창가에 앉아서 몽롱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다른 과 여자사람도 나의 심녀가 될 수 있다. 여사친이 심녀가 되기도 한다. 그냥 그날, 그 상황, 그 순간에 갑자기 심쿵(심장이 쿵 하고 충격을 받는 것)하게 되면 심녀가 되는 거다.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이 정도 단계에서 끝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여기에서 다시 여사친이 될 수도 있고, 썸녀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제 마음이 간다면 썸을 타야 한다. 썸의 단계에 이르면 상대편도 이쪽에 전혀 호감이 없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친구보다 가깝고 연인보다 먼 이 단계에선 서로의 ‘밀당’이 중요하다. 단둘이 데이트를 하고, 메시지도 주고받는다. 선톡(먼저 말 거는 SNS 대화)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 선톡에 답장은 성실하게 오는가, 답장이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대화 주제가 무엇인가, 내가 선톡을 하지 않을 때 선톡이 오는 경우가 있는가, 정말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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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프터’에서는 고백하려고 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고백이다. 만약 소개팅을 통해 만난 사이라면 삼프터사프터 정도에서 고백하는 게 정석이지만, 예외도 있다. 여사친에서 시작해 썸녀가 된 거라면 그야말로 천차만별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썸을 타다가 고백을 했는데 차이면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접근하고 확인했건만 차이다니, 나는 물고기에 불과했던 거라는 생각에 화가 치민다. 상대가 나를 어장관리하고 이용해먹었다는 생각에 집에 가서 이불이나 걷어차지 않으면 다행이다. 만약 받아준다면? 드디어 연애 시작이다.

취준생인 내 친구는 스터디를 같이하는 친구와 삼귀는 상태다. 삼귀다는 사귀기 직전 상태이지만, 사귀는 것의 유예이기도 하다. 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됐고, 그 강도도 진하다. 하지만 사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호감을 알고 있다. 둘이 같이 공부하고, 둘이 같이 밥 먹고, 둘이 같이 영화도 본다. 스킨십도 어느 정도까지는 허용한다. 서로의 처지를 아니까, 누구도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는 상태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다 아는 상태에서 고백 여부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싶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사귄다는 것은 일종의 선언이다. 너와 나의 관계를 규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정도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 규정과 정의가 부여하는 책임이 두려울 것이다. 불안한 미래 속에서 연애를 시작하기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그냥 삼귄다. 서로 좋아하고, 같이 일상을 공유하고 있는데, 굳이 공식적으로 연애를 시작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도 그 친구는 술을 마실 때면 꼭 “취업에 빨리 성공해서 커플링을 사다가 그 애한테 고백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애매한 상태에 빨리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하는 그 욕망. 연애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 한탄이 녹아 있어 나는 애꿎은 소주잔만 같이 부딪혀줬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연애를 수식하는 ‘단계’가 많아졌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그 사람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설레어하고, 그러다 사귀거나 차이는 ‘단순한 과정’은 점차 선배들의 옛사랑 추억담이 돼가고 있다. ‘남사친/여사친→심남/심녀→썸남/썸녀→삼귀다→사귀다’의 ‘다단계’를 거치다가 연애 시작 직전 뛰는 심장에 제동을 거는 청춘이 많아지고 있다.

내게도 몇 번의 소개팅이 있었고, 그보다 적은 심녀가, 그보다 적은 썸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모두 실패했다. 서로가 가진 ‘신분’의 한계는 결국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연애라는 것을 하고 싶으면서도, 연애를 할 용기가 없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가며 사는 주제에 연애질에 돈을 쓰는 것도 죄송스러웠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상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아,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와 같은 생각도 여러 번 떠올랐다. 그래서 포기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취업에 성공할 때까지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고백→사귐’은 추억이 되고

그 뒤로도 몇 번의 고백이 들어왔다. 여사친도 있었고, 심녀도 있었고, 썸녀도 있었다. 모두 거절했다. 지금의 연애는 기만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하는 기만. 연애에 충실할 수 없고, 상대방에게 충실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이어가는 연애가 무슨 소용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나와 같은 신분의 취준생과 소개팅을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냥 둘이서 신세 한탄하며 술이나 잔뜩 마신 뒤 헤어졌다. 그 사람은 잘 살고 있으려나. 에라이 술이나 마시러 가야겠다.

곽우신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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