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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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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말고 김정은을 보라

권력 승계 2년, 북한에선 어떤 일이
방북자들 “북한 사회에 생기가 돌고 있다”
등록 2013-12-12 15:13 수정 2020-05-03 04:27

 장성택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이 실각했다. 12월9일 오후 북한 뉴스에 나온 그는 당 정치국 확대회의 도중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북한 당국은 장성택 부장의 죄목으로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를 비롯해 여성관계, 도박, 마약, 외화탕진 등을 언급했다. 이 정도면 그를 공개석상에서 다시 보기는 힘들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주인공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다. 할아버지의 사위, 아버지의 매제, 자신의 고모부로 권력을 휘두르던 장성택 부장을 숙청한 건, 집권 2년 만에 권력이 충분히 굳건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경험 부족일 것만 같았던 김정은 비서가 권력을 승계한 지난 2년 동안 북한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_편집자

지난 8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발표한 북한이탈주민 설문조사를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로 이어지는 세습 독재정권의 지지도를 묻는 항목이 있다. ‘북한에 살았을 때 김정은 비서에 대한 지지도가 어느 정도였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0% 이상’이라고 답한 사람이 61.7%였다. 2012년 1월부터 2013년 5월 사이에 탈북한 이들을 상대로 한 조사였다. 1년 전 조사에서 ‘김정은 비서가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부정적 답변이 57.2%였던 데 견주면 눈에 띄는 변화다. 2011년 조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질문에 한 같은 답변(55.7%)보다 6%포인트 높아졌다.

탈북자 67% “주민 생활 나아졌다”

일종의 집권 초 허니문 효과일 가능성도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권력을 완전히 승계한 직후인 2012년 2월, 북한은 대대적인 사면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자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가 늘어나는 건,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나아지면서 기대 심리가 확산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 이번 서울대 조사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에 견줘 생활이 어떻게 변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좋아졌다’는 응답(66.9%)이 ‘나빠졌다’는 응답(33%)의 배가 넘었다. 좋아졌다는 답변과 나빠졌다는 답변의 격차는 해마다 벌어지고 있다(2011년 0.8%포인트, 2012년 23%포인트).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지표는 또 있다. 바로 탈북 행렬의 감소다. 통일부 자료를 보면 북한이탈주민(국내 입국 기준) 수는 2012년 1502명으로, 2005년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북한이탈주민 수는 2006년 2천 명을 넘어선 뒤 줄곧 상승세를 기록해 2009년 정점을 찍었다. 북-중 국경지역 경비가 강화된 탓인 동시에, 식량 사정이 다소 나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2년 전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이 김정은 체제의 단명을 점쳤던 데 비춰보면, 이런 수치들은 김정은 체제가 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김정은 비서 본인도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나날이 굳건히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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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비서의 리더십에는 역동성이 엿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체육강국’ 구상이다. 그는 2011년 신년사에서 “온 나라에 체육 열풍을 세차게 일으켜 선군조선을 명성 높은 축구강국, 체육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지난 3월4일 사설은 “체육은 국력을 과시하는 중대한 사업” “체육강국의 지위를 올려세우는 것이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며 그 의지를 재천명했다.

의지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지난 2년 동안 이 보도한 김정은 비서의 공개 일정을 살펴보면, 올해 들어 체육 관련 일정이 7배 가까이 늘었다(2012년 4건→2013년 27건). 올해 들어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선수들에겐 평양 시내 카퍼레이드를 열어주고, ‘체육인살림집’이라는 최신 아파트를 제공하는 등 융숭한 대접을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지원을 받아 축구학교를 만든 것도, 일부 학생들을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국비 유학을 보낸 것도 올해의 일이다.

체육강국 구상… 골프·마라톤 관광도

생활체육 육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9월 준공된 류경원·인민야외빙상장·롤러스케이트장을 필두로, 지난 5월에는 20여만m² 규모의 복합체육시설인 능라인민체육공원이 들어섰다. 1973년 처음 개관한 평양체육관은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 10월3일 다시 문을 열었다. 초대형 워터파크인 문수물놀이장도 같은 달 15일에 준공됐다. 군용 기마훈련장을 개조해 만든 승마장(미림승마구락부)은 10월25일 일반에 개장됐고,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마식령스키장도 이르면 12월 안에 개장할 거란 보도가 있었다.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김정은 비서가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인 스포츠에만 자원을 집중시킨다는 비판론도 있다. 세계 최빈국 수준의 경제 상황에서 무리한 노선이란 지적도 있다. 그러나 스포츠 육성은 경제와 외교의 숨통이 사실상 봉쇄된 북한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난 4월 북한은 ‘평양 마라톤 관광 2013’이라는 관광상품을, 5월엔 ‘외국인 아마추어 골프대회’ 상품을 판매했다. 3차 핵실험 이후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등 남북관계가 최악의 경색 국면으로 치닫던 시점이라 큰 소득을 기대할 순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골프대회는 30명 예정자 가운데 9명만 참가하면서 규모가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외화벌이 수단으로서 스포츠의 가능성은 충분히 확인한 셈이다. 특히 중국의 스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일본·한국·스위스 등이 유치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북한의 마식령스키장은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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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데니스 로드먼의 방북처럼 스포츠 외교가 가져오는 대외적 효과도 눈여겨볼 만하다. 로드먼을 통해 흘러나오는 김정은 비서 가족의 이야기는 긍정적 평가가 두드러진다. 대내적 효과도 크다. 국력이 약한 나라들은 스포츠를 통해 주민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돈은 있지만 쓸 곳이 없는 북한의 부유층에게, 발전된 스포츠 시설은 숨통을 틔워주는 구실도 할 것이다.

외모뿐 아니라 소통도 ‘김일성식’

김정은 비서의 리더십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김일성 따라하기’이다. 그는 첫 등장 때부터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복장과 머리 모양을 따라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김정은 비서가 지난해 대중연설(4월15일)에 나선 것도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다. 생전의 김일성 주석은 대중에게 직접 국정 운영 방식을 제시하고 지지를 호소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평생 단 한 차례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1992년)라는 짧은 육성을 공개했을 뿐이다.

대중과의 만남에서 취하는 태도도 아버지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예컨대 지난 9월2일 무도·장재도 방문 당시 상황을 보도한 조선중앙방송 화면을 보면, 군중 속에서 김정은 비서가 동네 아이들을 끌어안고 뺨을 어루만지는 장면이 나온다. ‘신비주의’ ‘은둔의 지도자’ 김정일 위원장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그러나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던 김일성 주석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할아버지 따라하기’는 비단 겉모습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김정은 비서는 김정일 시대에는 거의 소집되지 않았던 당의 집단적인 정책결정기구들(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 회의 등)을 통해 중요 정책을 결정 및 발표하고, 대중적인 스킨십을 중시하며, 군사적으로는 매우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매우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그의 부친 김정일과는 차별화된 리더십을 드러냈다.”(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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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김정일 위원장이 당중앙위 비서나 전문부서 부장들이 만들어 올린 문건을 결재하는 식으로 지시를 내렸던 것과는 매우 달라진 셈이다. 비단 당 기구뿐만이 아니라, 김정은 비서는 논의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관련 기관의 고위 간부들이 참석하는 ‘협의회’ 형식의 기구를 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주석 때의 방식이다.

이같은 리더십을 바탕으로 ‘김정은의 북한’은 한층 적극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협동농장과 기업에서는 인센티브가 도입됐다. 협동농장의 분조를 20명가량에서 3~5명으로 줄였고, 국가 납부분을 제외한 잉여분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됐다. 기업에서는 독립채산제가 도입됐다. 마찬가지로 국가 납품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독자적으로 매각하거나 종업원에게 나눠줄 수 있게 됐다. 균등분배는 옛말이다. 게다가 북한 전역에 경제개발구 14곳이 들어서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개발 노선에 발동이 걸렸다. 2003년 총리가 되어 경제개혁을 추진하다가 한 차례 실각했던, 그러다 올해 다시 돌아온 박봉주 총리의 작품이기도 하다.

평양엔 출퇴근길 차량 정체

최근 북한을 다녀온 대북지원단체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평양을 중심으로 차량이 늘어나 출퇴근 정체가 생겨났다고 한다. 평양 시내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여성 교통순경이 감당할 수 없는 교통량 규모가 된 까닭에, 어느덧 그들은 보이지 않고 신호등이 들어섰더라는 전언도 있다. “북한 사회에 생기가 돌고 있다”는 게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다.

김정은 비서가 들어선 뒤 북한이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차례 장거리로켓을 발사했고 3차 핵실험을 실시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올해 상반기 개성공단 폐쇄까지 이어졌던 일련의 사태에서 그의 호전적인 모습이 거듭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습만 되새기며, 남북관계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괜찮은 걸까. ‘장성택 실각설’을 바라보는 2013년 한국 사회의 풍경은, 어디 먼 나라의 괴이한 소년 지도자 얘기를 다루는 듯하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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