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싸움은 계약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 2007년 은행들은 수출 중소기업을 찾아다니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름도 낯선 통화옵션 파생상품 ‘키코’(KIKO·Knock-in Knock-out) 가입서였다. 은행들은 키코를 “안전한 환헤지 상품”이라고 소개했다. 환율 하락으로 고민하던 중소기업들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1년 전만 해도 1달러당 1천원대던 원-달러 환율은 당시 900~950원대까지 내려와 있었다. 해외 거래업체로부터 대금을 달러로 지급받는 수출기업들은 급격한 환율 하락(달러 약세)으로 앉아서 막대한 환차손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중소기업들은 단순한 선물환 거래로 환헤지를 하고는 있었지만, 최첨단 환헤지 상품이라는 말에 키코에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은행은 미래에 환율이 떨어지더라도, 중소기업이 그보다 높은 가격에 달러를 팔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했다(풋옵션). 게다가 수수료도 없다고 했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환율이 일정 수준 이상 낮아지면(녹아웃 구간) 계약이 자동 해지되면서 기업은 환헤지를 포기해야 한다. 더군다나 환율이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면(녹인 구간) 기업이 시중보다 2배 이상 비싼 가격에 달러를 사서 은행에 싸게 팔아야 한다고 했다(콜옵션). 환헤지를 하긴커녕 기업이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율이 급격히 오를 리 없다는 은행의 전망을 철석같이 믿은 중소기업들은 너도나도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5년 소송, 중소기업의 완벽한 패배
그러다 몇 달 뒤 미국에서 터진 금융위기의 여파로 환율이 치솟자, 키코 계약은 무서운 본성을 드러냈다. 환율이 급등해 은행이 콜옵션을 행사하자, 중소기업은 수십억~수백억원까지 손실을 입었다. 1~2년간은 계약을 해지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금융감독원의 집계에 따르면, 2010년 6월 기준으로 적어도 734개 기업이 총 3조2천억원가량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110개 중소기업은 자금 압박에 시달리다 폐업하거나 법정관리·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이 기업들은 “애초에 불공정한 행위로 맺어진 키코 계약은 무효이며, 그러한 불법행위로 끼친 손해를 배상하라”며 은행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지난 9월26일. 대법원은 대법관 전원 일치로 중소기업과 은행 간의 치열한 법정 공방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놨다. 같은 사안을 다루는 1·2심 재판부가 따라야 할 판례가 생긴 것이다. 결과는 중소기업의 완벽한 패배였다. 대법원 판단에 따라 이날 확정판결을 받은 수산중공업·세신정밀·삼코·모나미 등 4개사 외에도 항소심·상고심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214개 기업은 은행으로부터 손해배상을 한 푼도 받지 못하거나, 극히 일부만 배상받게 됐다. 은 대법원이 은행의 손을 들어준 근거를 쟁점별로 살펴봤다.
# 키코는 환헤지에 적합한 상품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양승태 대법원장)는 “전체 환율 구간이 아닌 일부 구간에서만 환위험 회피가 된다고 해서 구조적으로 환헤지(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없애는 작업)에 부적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마디로 키코가 정상적인 환헤지 계약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부분적 환헤지도 환헤지”라는 은행(피고) 쪽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키코가 환헤지에 적합한 구조로 설계돼 있는지는 그동안 중소기업(원고)과 은행이 다퉈온 핵심 쟁점이다. 만약 키코가 정상적인 환헤지 상품이 아니라고 한다면, 환율 하락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상품인 줄 알고 키코에 가입한 기업은 ‘사기나 착오로 인한 계약 취소’를 요구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키코는 좁은 환율 구간에서만 환헤지가 되고 오히려 환헤지가 가장 필요한 환율 급등락 구간에선 환위험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게 중소기업 쪽 논리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고객이 외환 현물(달러)에 대한 환헤지 목적으로 계약을 체결하면, 환율이 상승할 경우 통화옵션 계약(키코 계약) 자체에서는 손실이 발생하지만 외환 현물에서는 그만큼 환차익이 발생하므로 환율이 상승하더라도 전체적인 손익은 변화가 없다"고 결론 냈다. 판결 요지를 풀면 이렇다. 환헤지를 목적으로 가입한 기업은 달러 표시 수출대금을 갖고 있다. 만약 환율이 상승하면 은행과 맺은 키코 계약에 따라 기업은 약정금액에 해당하는 달러를 시중 환율보다 싸게 은행에 팔아야 하므로 손해가 발생한다. 그러나 어차피 보유 중인 수출대금에선 환율 상승으로 인한 환차익이 발생하는 덕에 손실이 상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대법원도 환율이 급등하는 녹인 구간에선 기업이 은행과의 약속에 따라 적어도 약정금액의 2배 이상에 해당하는 달러를 시중 환율보다 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손실이 커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기업이 보유 중인 수출대금의 환차익으로도 키코 계약에 따른 손실을 상쇄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선 “통화옵션 계약이 고객과 은행 사이에 상호 부여하는 옵션의 이론가 차이가 있거나 환율이 상승할 경우에는 고객에게 불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러한 통화옵션 계약을 체결하면 계약 이전보다 오히려 더 큰 환위험에 노출된다고는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 키코는 약관이 아니다대법원이 내린 “키코 계약의 구조가 약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도 은행 쪽 주장과 일치한다. 그간 중소기업 쪽에선 “키코 계약은 사실상 약관 계약”이라는 논리를 펴왔다. 겉으로는 기업과 은행이 일대일로 개별적인 계약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 은행이 다수의 기업과 동일한 계약을 체결한 만큼 약관 계약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이런 주장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키코 계약이 약관에 해당한다면 은행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책임을 좀더 엄격하게 물을 수 있어서다. 약관법은 약관 계약의 무효 사유로 판매사의 설명 의무 위반, 불공정·장기 계약에 따른 불이익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민법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가 있을 때 개별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다고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키코 계약의 구조는 은행이 고객의 필요에 따라 그 구조나 조건을 적절히 변경하여 사용하기 편하도록 표준화된 구조로 미리 마련해놓은 것일 뿐, 그 구조만으로는 거래 당사자 사이에서 아무런 권리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며 중소기업 쪽 의견을 배척했다.
# 은행이 수수료를 미리 알릴 의무는 없다은행이 키코를 판매하면서 수수료가 없는 ‘제로코스트 상품’이라고 광고한 것이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도 기업과 은행이 다퉈온 핵심 쟁점이다. 중소기업은 은행이 복잡한 상품 구조 속에 수수료를 숨겨온 만큼 사기에 해당한다고 강조해왔다. 실제 은행이 기업에 제시한 상품가격표에는 자신들의 권리인 콜옵션 가격이 중소기업의 권리인 풋옵션 가격과 똑같이 표시돼 있지만, 실제로는 콜옵션이 풋옵션보다 2~7배 비싸게 상품이 설계된 것으로 하급심 판결에서 드러났다. 은행 쪽은 두 옵션의 가격 차이가 은행의 비용과 수수료 등(마이너스 시장가치)에 해당하며, 굳이 이를 계약 때 알릴 의무는 없다고 맞서왔다. 대법원은 이 쟁점에서 은행의 주장을 채택했다. “일반적으로 재화나 용역의 판매자가 자신이 판매하는 재화나 용역의 판매가격에 관하여 구매자에게 그 원가나 판매이익 등 구성 요소를 알려주거나 밝힐 의무는 없고, 이는 은행이 고객으로부터 별도로 비용이나 수수료를 수취하지 아니하는 이른바 제로코스트 구조의 장외파생상품(거래소 없이 일대일 거래가 일어나는 파생상품) 거래를 하는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더 나아가 대법원은 “은행이 장외파생상품 거래의 상대방으로서 일정한 이익을 추구하리라는 점은 시장경제의 속성상 당연하여 누구든지 이를 예상할 수 있다”며 은행이 숨겨놓은 수수료도 정당한 영업이득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이런 판단은 외국 법원의 판례와 상반된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2005년 한 위생용품 판매업체가 도이체방크를 상대로 “이자율 스와프 상품 가입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며 낸 소송에서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은행이 비용과 이익을 숨긴 탓에 기업은 계약 당시부터 8만유로에 이르는 마이너스 시장가치를 떠안아야 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연방대법원의 판결 내용이다. “은행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리스크를 의도적으로 구조화했고, 그러한 리스크를 시장에 팔기 위해 비용을 고객에게 부담시켰다. 은행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조화된 마이너스 시장가치는 심각한 이해 상충을 나타냈다.”
# 은행이 모든 정보를 제공할 필요는 없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은행이 키코와 같은 고위험 상품인 장외파생상품을 판매할 때는 각별히 설명에 유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금융기관이 일반 고객과 사이에 전문적인 지식과 분석 능력이 요구되는 장외파생상품 거래를 할 때에는, 그 거래의 구조와 위험성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거래에 내재된 위험 요소 및 잠재적 손실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인자 등 거래상의 주요 정보를 적합한 방법으로 명확하게 설명하여야 할 신의칙상의 의무가 있다.” 기업이나 은행에서 다툼이 없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은행이 파생상품 판매시 의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주요 정보’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쟁점이 돼왔다. 중소기업은 주요 정보의 범위를 넓게, 은행은 좁게 해석했다. 실제 하급심 판결에서 설명 의무 위반에 따른 은행 책임 비율이 10~70%로 천차만별이었던 데는, 하급심 재판부마다 인정한 주요 정보의 범위가 제각각이었던 영향이 컸다.
대법원은 그간의 논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장외파생상품 계약의 구조와 주요 내용, 고객이 그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발생 가능한 손실의 구체적 내용, 손실 발생의 위험 요소 등은 은행이 고객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하는 주요 정보에 해당한다.
다만 장외파생상품의 상세한 금융공학적 구조, 상품 구조 속에 포함된 수수료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마이너스 시장가치, 거래를 중도에 해지할 수 있는지 여부 등은 주요 정보에서 빠졌다. 실제 대법원은 이날 4개 기업에 대해 기업 패소, 기업 일부 승소 등의 판결을 확정했는데, 기업의 운명을 가른 건 은행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대법원이 정한 주요 정보에 해당하느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이 인정한 주요 정보만으로는 복잡한 파생상품을 설계한 은행과 이를 소비하는 기업 간 ‘정보의 비대칭성’(경제 주체 사이에 정보 격차가 생기는 현상)을 완화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오세경 건국대 교수(경영학)의 지적이다. “통화옵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가 옵션 가격의 차이다. 여기에서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마이너스 시장가치도 결정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은행들이 숨겨온 것은 해외 판례에서도 판시하듯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파생상품 비전문가인 개인이나 중소기업에는 치명적이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은행이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앞으로 누가 파생상품을 사려 하겠는가.”
공대위 “약자 배려는 차지하더라도”중소기업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은 대법원의 판결에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대위는 성명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오늘은 정의 수호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어왔던 대법원마저 비겁한 금감원에 이어서 타락한 은행들의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합법화시켜주었다.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차치하고서라도 공정하고 투명한 분쟁 해결을 기대하며 5년을 인내해왔던 우리 키코 피해 기업들은 심한 허탈감을 느낀다.”
참고 문헌: (오세경 박선종 공저·2013)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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