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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8일 랑군은 하루 종일 오락가락 내리는 잔비에 젖었다. 25년 전 이맘때 랑군은 피에 젖었다. 1988년 3월부터 학생들은 랑군공대 시위를 신호탄 삼아 독재 타도를 외쳤고 결국 7월23일 26년 묵은 철권독재자 네윈 장군이 물러났다. 이어 8월8일 버마 전역에선 학생과 시민 수십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를 외쳤다. 이른바 ‘8888 민주항쟁’이었다.
8888 민주항쟁, 25년 만의 부활그러나 그 평화 시위는 군인들의 무자비한 총칼에 찢겼고, 이어 9월18일 쿠데타로 집권한 소마웅 장군이 유혈 진압에 박차를 가해 수천 명 웃도는 시민이 살해당했다. 그날 세상은 아무도 버마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국제사회도, 언론도 모조리 9월17일 시작한 서울올림픽에 미쳐버린 탓이다.
그렇게 잊혔던 역사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장을 통해 시민들 앞에 나타났다. 2011년 3월 등장한 테인세인 대통령 정부가 변화를 외치는 공간에서 ‘8888 민주항쟁’도 다시 되살아난 셈이다. 지난해 말부터 ‘88세대’와 ‘버마학생민주전선’을 비롯한 당시 항쟁 주역들이 올 25주년 기념식을 준비해왔고, 8월6일부터 8일까지 3일 동안 미얀마컨벤션센터에서 민주포럼을 비롯해 공연과 사진전을 마련했다.
실무를 맡았던 ‘88세대’ 간사 툰민아웅은 “정부도 간섭 없었다. 다만 행사장 낀 구청에서 제목을 ‘8888 민주혁명’이나 ‘8888 민주항쟁’ 대신 그냥 ‘8888’로만 해달라는 걸 우겨서 결국 우리 뜻대로 했다”며 별 탈 없었던 준비 과정을 소개했다. 비록 기념식에 정부 대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테인세인 정부의 변화 가운데 가장 중대한 변화로 기록할 만한 대목임엔 틀림없다.
테인세인 대통령을 비롯해 현 ‘준군사정부’ 구성원들 거의 모두가 8888 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했던 군인들로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군인정치인들이 스스로 급소를 드러내고 배수진을 친 셈이다. 아직 랑군에서는 8888 유혈 진압 조사나 책임자 처벌 같은 말이 공식적으로 나돈 적이 없지만, 정부가 이번 25주년 기념식을 허락함으로써 앞날에 대비한 안전판을 깔기 시작한 것으로 볼 만하다.
어쨌든 이번 25주년 기념행사는 랑군뿐 아니라 만달레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지면서 3일 동안 그야말로 시민사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랑군 도심에서는 민주화 상징 깃발인 쿳다운(싸우는 공작)을 걸고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자동차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8888 당시 교사로 시위에 참여했던 모헤인은 전시회 한 귀퉁이에서 “아직 완전한 건 아니지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류에 빠져 있는 열일곱 먹은 신세대 대학생 마난달킨은 “학교에서는 배운 적이 없지만 어른들한테 이야기를 들었다”며 호기심에 찬 눈으로 전시회장을 헤집고 다녔다.
특히 8월8일 기념식에는 아웅산수찌를 비롯한 야당 정치인과 소수민족 대표, 그리고 시민단체 대표가 모두 참여해서 뜨겁게 흥을 돋우었다. 8888 당시 버마학생회연합(ABSFU) 의장으로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학생운동 지도자 민꼬나잉이 가장 먼저 연단에 올랐다. 미얀마컨벤션센터를 메운 4천여 청중으로부터 폭발적인 박수가 터져나왔다. 정교하게 들어보면 그 폭음 속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비교하자면, 1시간30분이나 늦게 기념식장에 도착한 아웅산수찌를 향한 폭발음은 우상을 좇는 광적 비명이었고.
“여러분, 다들 기억하시지요. 여기, 사랑하는 이들과 멀리 떨어진 국경에서 목숨 바쳐 민주화 투쟁 의무를 다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그 장한 이들이 우리와 가슴을 맞대고 함께 일하고자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학생군 동지들 일어나주십시오.”
민꼬나잉의 연설에 숨죽이던 미얀마컨벤션센터는 다시 한번 터질 듯한 박수로 뒤덮였다. 의장 탄케를 비롯한 34명의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대표단은 상기된 얼굴로 일어나 인사했고, 시민들은 뜨겁게 학생군을 맞았다. 시민들로부터 자신들의 무장투쟁 정당성을 인정받은 학생군들 눈가에는 이내 물기가 돌았다.
하루 전만 해도 학생군은 기념식장에 군복을 입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의장 탄케는 8월7일 자정 무렵까지 커피숍에 앉아 망설였다. “민꼬나잉이 군복 입고 떳떳하게 등장하라고 했지만 시민항쟁 기념식에 우리가 군복을 입는다는 게 어색하지 않을까? 어떻게 할까?”
그동안 민꼬나잉은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무장투쟁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나 거리감을 두는 이들을 향해 늘 학생운동의 뿌리가 같음을 강조하면서 학생군을 온몸으로 감싸왔다. 이날 기념식에서도 그이는 휴전협정차 랑군을 방문한 34명 학생군 대표단에게 주인공 자리를 안겨주었다. 개나 소나 비폭력 평화를 외쳐온 세상에서, 누구보다 그 비폭력 평화운동 상징성이 강한 민꼬나잉이 무장투쟁 전사들을 ‘동지’라고 외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그이의 용기가 비폭력 평화운동의 새로운 개념을 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편 이번 8월 랑군에서는 ‘8888 민주항쟁’ 25주년 공개 기념식 못지않은 또 다른 역사적인 일이 벌어졌다. 지난 25년 동안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며 국경 산악전선에서 무장투쟁을 벌여왔던 버마학생민주전선과 정부가 휴전협정을 맺었다. 8월5일 주단위(State Level) 휴전협정에 이어, 10일 연방단위(Union Level) 휴전협정까지 맺으면서 학생군과 정부는 전면적인 휴전을 선언했다.
내전 종식 내건 테인세인 정부테인세인 정부는 내전 종식과 평화 정착을 내걸고 2011년 말부터 ‘휴전협정-정치회담-연방회의’라는 3단계 로드맵에 따라 각 소수민족해방 세력들과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2012년 들자마자 1월부터 카렌민족해방군(KNLA), 친민족전선(CNF), 몬민족해방군(MNLA), 카레니군(KA), 아라칸해방군(ALA), 샨주군(SSA)과 줄줄이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2013년 8월 현재 14개 소수민족해방군과 휴전협정을 맺었고 이제 까친독립군(KIA)과 팔라웅주해방군(PSLA) 정도만 남았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유일한 무장 민주혁명 세력으로 비록 군사력은 미미하지만 상징성이 강했던 버마학생민주전선과 휴전협정에 큰 공을 들임으로써 내전 종식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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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학생군의 휴전협상 과정을 최초 밀담부터 취재해온 기록에 따르면 곡절이 없지는 않았다. 두 진영의 휴전협상은 2012년 1월10일 정부 휴전협상 대표단을 이끌었던 아웅타웅 하원의원(집권 연방단결개발당 소속)의 밀담 제의로 시작됐다. 이어 2월9일 타이 국경도시 매솟에서 예비회담을 했다. 그러나 4월8~10일로 잡았던 랑군회담이 뚜렷한 이유 없이 연기되면서, 학생군 쪽에서는 불신감이 커졌다.
그 무렵 정부 대표 아웅타웅이 4월1일 보궐선거 지원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설만 나돌았다. 그러다 5월 들어 아웅타웅이 물러나고 모든 휴전협상은 철도장관 아웅민 손으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 카운터파트도 아웅민으로 바뀌었다. 그즈음 학생군 쪽에선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깊어지면서 휴전협상을 매우 회의적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11월9일 아웅민이 타이 북부도시 치앙마이로 날아와 학생군과 직접 밀담을 벌이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24년 만의 귀향, 그리고 휴전밀담을 마친 날 밤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케는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린다. 아웅민 장관이 우리 의제를 전면적으로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고 하니”라며 적잖이 흥분했다. 그날 밀담에서 학생군이 요구한 버마 내부 ‘현실 점검여행’이 받아들여졌고, 12월18일부터 17일 동안 학생대표단 9명이 24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학생군 진영에서는 아웅민 장관이 말한 “조건 없는 수용”을 믿기 시작했다.
이제야 밝힐 수 있지만, 심지어 학생군은 현실 점검여행 실무회담에서 의제와 상관없는 내 이름을 명시한 외신기자 동행 허락까지 요구했고, 치앙마이 밀담에서 아웅민 장관이 내게 직접 특별허가서를 약속했다. 그동안 블랙리스트에 올라 비자마저 받을 수 없었던 나는 학생군 현실 점검여행단을 따라 16년 만에 버마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학생군 휴전협정은 외부 요인으로 지연되었다. 해방구 없이 각 소수민족해방 세력들에 더부살이해온 학생군의 특수한 사정 탓이었다. 예컨대 이미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은 카렌민족해방군 진영에 자리잡은 버마학생민주전선 본부는 자동적으로 휴전에 들어간 상태였지만, 휴전협정을 맺지 않은 북부 까친독립군 진영에 배치해온 학생군 주력들은 여전히 정부군에 맞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독자적인 해방구 없이 각 소수민족 영역에 병력을 분산 배치해온 학생군은 독자적으로 휴전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아주 애매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지난 5월 정부와 휴전협정 전 단계인 이른바 ‘7개 항’에 서명한 까친독립군이 학생군들 입장을 배려함으로써 결국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8월 초 눈에 차오른 버마, 이제 더 이상 그 변화를 부정할 마음은 없다. 버마는 변하고 있다. 가판대에 깔린 신문들은 저마다 1면 머리기사로 ‘8888 민주항쟁’ 25주년 기념식과 버마학생민주전선의 휴전협정 소식을 실어날랐다. 사설은 정부를 대놓고 타박했다. 정부는 올해부터 일간 신문 발행을 허락했고 시사를 다루는 매체만도 100개가 넘는다. 서점에는 민족해방·민주혁명을 다룬 책이 수북이 쌓여 있다. 가 버젓이 나돌고도 있다. 시민들은 민꼬나잉이나 아웅산수찌가 대문짝만하게 찍힌 셔츠를 입고 다닌다. 휴전협정차 랑군을 찾은 학생군들은 군복을 걸친 채 아무 탈 없이 시내를 걸었다. 지난 25년 동안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지난 25년 동안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버마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직은 군인들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수도 없이 교전 중지 명령을 내렸음에도, 군인들은 지금도 소수민족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대통령 명령마저 무시할 수 있는 60년 묵은 정치군인들의 저력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개헌을 봉쇄할 수 있는 의회 의석 25%를 당연직으로 쥐고 있는 군인들, 정치와 정책을 모조리 결정한다는 11인 국방안보회의(NDSC)를 쥐락펴락하는 군인들, 여전히 부정부패와 이권 개입으로 배를 불리는 군인들, 아직은 버마의 진정한 변화를 말하기 힘든 까닭이다. 버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투자 유치에 혈안이 된 정부는 외국 기업들에 인허가를 남발하며 지역사회를 초토로 만들어버렸고, 차기 대권에 눈멀어 정부 나팔수 노릇을 마다 않는 아웅산수찌는 야당 없는 정치판을 만들어버렸다. 정치에 볼모로 잡힌 불교는 이슬람을 살해하고 있다. 아직은 ‘8888 민주항쟁’ 역사를 접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직은 버마학생민주전선의 깃발을 내릴 수 없는 까닭이다. 2013년 8월10일, 랑군 시민들은 내달리는 자동차가 퉁기는 빗물을 피해 조심스레 길을 걷고 있다.
랑군(버마)=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beyondheadline1@gmail.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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