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는 서해의 해상분계선이 없다. 정전협정에서는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못한 것이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30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서해에 북방 한계선(NLL)을 선포했다. NLL은 서해에 해상분계선이 없는 상태에 서,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의 통제 아래 있는 배들의 북상을 가로막 는 선이었다.
클라크 사령관이 NLL을 선포한 1953년 당시 작전명령서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클라크 사령관의 NLL 선포를 확인 하는 문서인 ‘해군본부 작전기밀 제1235호’(3급 비밀)도 폐기돼, 지금 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전협정을 통해 서해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NLL은 실질적 분계선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1991년 체결된 남북 기 본합의서의 약속대로 앞으로 남과 북이 해상분계선을 합의하기 이전 까지는, NLL이 해상분계선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정보원이 지난 7월10일, 이런 NLL을 무력화하는 데 악용될 수도 있 는 성명을 냈다.
국정원의 성명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 주장하는 공동어로구역 설정에 동의를 해줬단다. NLL과 북한이 1999년 9월2일에 선포한 해상군사경계선 사이가 이때 합의한 공동 어로구역이라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이를 설명하는 지도까지 성명에 첨부했다.
국정원·정문헌 의원의 이적행위국정원이 이 성명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2007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으로 본 북방한계선(NLL)’이라는 자료 집을 배포했다. 정 의원이 배포한 자료집에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 무현 대통령이 NLL과 북한이 주장해온 해상군사경계선 사이에 공 동어로구역을 설정하는 데 동의했다고 돼 있다. 이것이 곧 ‘NLL 포 기’의 증거라는 것이다.
다시 확인하자. 정전협정에는 해상분계선이 없다. 클라크 사령관 이 NLL을 선포한 작전명령서도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노무현 전 대 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NLL을 지켰다. NLL을 기준으로 등면적 의 남북공동어로구역을 북한에 제시했다. 그런데 국정원과 정문헌 의원은 노 대통령이 NLL을 부정하고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문 서를 유포한 것이다.
만약 국제사법재판소에서 NLL에 대해 판결해야 하는 상황이 벌 어진다면 어떨까? 국가기관과 집권당 국회의원이 배포한 지도는 어 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NLL을 선포한 작전명령 서도 없고, 이를 접수한 한국 해군의 문서도 없다. 미국은 1970년대 까지 NLL을 단순한 북방정찰한계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상태에 서 국가기관과 집권당 국회의원이 정략적인 목적으로 전직 대통령이 이를 포기했다는 문서를 배포해버렸다. 정략에는 맞을지언정 명백히 국가 이익에는 배치되는 행위를 한 게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뒤부터 정전협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의제는 당연히 군사분계선을 확정하는 것이다. 당시 유 엔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의 우세를 바탕으로 한반도 주변 수역과 공 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상에서는 경계선을 만들 기준인 유 엔군과 공산세력의 군사력이 만나는 ‘접촉선’(line of contact)조차 없었다. 그래서 영해 설정과 관련해 유엔군 쪽은 3해리를 주장했고, 북쪽은 12해리를 주장했다. 결국 합의를 보지 못했다.
당시 미국 쪽은 정전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당면한 과제로 인식하 고 있었다. 따라서 유엔군은 상대방이 본래 통제하던 후방의 도서로 철수하고, 특별히 합의된 도서로부터도 모든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를 근거로 유엔군은 서해에서는 압록강 하구로부터, 동해 에서는 나진 연해로부터 상대방의 지상구역을 봉쇄하지 않는 선까 지 전면 철수했다. 유엔군이 서해에서 철수하면서 서해 5도를 제외 하고 점령도서들을 모두 북한에 양보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한국의 관할 아래 있던 섬들조차 휴전 당시 북한이 점령한 황해도 남북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에 북쪽에 양보했다.
이런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에서는 서해 섬들 에 대한 관할권만을 명시했지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았다. 해상 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해상에 대해서는 교전 쌍방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둘째 유엔은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휴전 을 유지하기 위한 적대행위의 중단과 재발, 그리고 유엔군의 안전에 만 주력했고, 셋째 한국전쟁 당시 해양은 유엔군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공산 쪽은 바다나 섬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를 피했던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정전협정 4조 60항에서는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 군 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정전협정 조인 뒤 3개월 이내에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기로 명시하고 있다.
서해에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못했지만 정전협정 조인 3개월 이 내에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해서 미확정된 해상분계선을 설정 하자는 것이 정전협정에 담긴 취지다. 그런데 1954년 스위스 제네바 에서 한 차례 정치회담이 소집된 이래 단 한 차례도 추가 회담이 열 리지 않았다. 서해 일대의 불안함은 이런 불안전한 정전체제에서 비 롯된 것이다.
정전협정의 불안정성을 보완할 안전장치는 ‘한 급 높은 정치회담 소집’을 약속한 것뿐만 아니라 협정 문안 내부에도 마련돼 있다. 대 표적인 것이 정전협정 13조 d항 ‘신무기반입금지조항’이다. 이 조항은 “한국 국경 밖으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류, 무기 및 탄 약의 반입을 정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무기 반입을 금지하는 조 항은 정전체제 아래서 평화를 보장하는 안전핀과도 같은 조항이다.
한국전쟁 이후 정전협정의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무기가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이를 감시하고 검증하기 위해 중립국 감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몇 년간 이 위원회는 남북한에서 실질적으로 무기가 반입되는지를 검사했다. 이 기간에는 한반도에 핵무기가 들 어오지 않았다. 위원회가 무기 반입을 검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7년 6월 이후 정전협정의 신무기반입금지조항은 무시 돼버린다.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드와이트 아 이젠하워 행정부는 “적의 침략에는 대량 보복의 응징이 따른다는 사 실을 인식시킴으로써 전쟁을 억지한다”는 대량 보복 전략을 세웠다. 정전협정 13조 d항이 사문화되고 핵무기가 배치된 것이다. 이후 한 반도는 지속적으로 군비 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정전체제가 지속되는 한반도에서 군비 경쟁은 정전체제를 뒷받침 하게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과거 미-소의 대결에 따라 한반도에 주한미군의 핵무기가 배치된 것처럼, 앞으로 미-중의 대결에 따라 한반도의 군사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 정전체제가 한반도에서 미- 중 대결의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서해에서 미국의 항공모함이 참가한 군사훈련이 벌어진 것이 이를 입증한다.
정전체제 매개로 한 남북의 적대적 상호의존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 총리회담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잇따른 남북 장관급 회담은 분단체제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분단과 정전 60주년을 맞이한 지금 되돌아보면, 지난 60년은 분단체제를 흔드 는 사건들을 제압하면서 분단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온 과정 이었다.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은 전쟁 이후 만들어진 정전체제를 유지하 면서 분단과 적대를 뒷받침하는 의식·제도·기제들을 만들어왔다. 남북이 서로 상대를 적으로 몰며 자기정당성을 강조하는 권위주의 체제를 형성해온 것이다. 정전 60년 동안 이렇게 만들어진 의식·제 도·기제들은 권위주의 체제 내부의 단결과 발전을 뒷받침했다.
새누리당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 는 허위 사실을 유포해서 대통령 선거에 활용한 것도 지난 60년간 유 지해온 분단체제의 작동 원리를 다시 한번 대통령 선거에 이용한 것 이다. 국정원과 정문헌 의원이 노 대통령을 부관참시하면서 국제법적 으로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는 소재를 만들어가면서까지 NLL 관련 허위 지도를 배포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렇게 허위 사실을 유포해야만이 정전체제가 만들어낸 의식·제도·기제들에 의 해 자신들의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반면 진보·개혁 세력은 새누리당이나 국정원이 NLL 공세를 퍼부 을 때 이를 회피하는 게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NLL 공세뿐만 아니라 다른 안보 문제나 북 한 이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새누리당의 공세에 방어적인 위치가 되어서 어젠다 선정에서 수세적인 것은 틀림없다.
새누리당의 ‘NLL 프레임’이나 ‘안보 프레임’은 이를 뒷받침하는 의 식·제도·기제들이 갖춰져 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할 필요 도 있다. 회피해서 프레임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새누리당의 공세는 그 자체로서 정전체제 60년간 형성된 의식·제도·기제들을 작동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잠든 괴 물을 깨우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전시작전권 환수까지 연기해달라는 한국군 수뇌부해법은 뭘까?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꿔야 한다. 이를 통해 독 재와 분단과 사대예속을 재생산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설령 ‘친북용공’ 행위가 된다고 할지라도 새누리당은 ‘NLL 프레임’ 같은 것을 다시 사용하려 들 것이다. 그만큼 정전체제가 만들어낸 괴물의 위력은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에 미국에 전적으로 의 존하는 심리적·군사적·제도적 상태가 만들어진 것도 정전체제의 특 징이다. 미국만이 모든 문제를 풀어줄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침내 자 기 나라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까지 연기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은 가시밭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정전체제 60년은, 고스란히 냉전체제 60년이었다. 냉전은 오늘도 계 속된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 changsoo@outlook.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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