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논란은 고용노동부의 직무유기에서 출발한다. 노동부의 통상임금 산정지침은 1988년 제정된 이후 네 차례 개정됐는데 그 내용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를 노동부가 무시해온 탓이다. 대통령령인 ‘훈령·예규 등의 발령 및 관리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정부가 고시하는 각종 훈령·예규는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3년마다 재검토하고 이를 다시 고시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방하남 노동부 장관은 마치 대법원 판례와 노동부 행정 지침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최근의 논란은 (노동부 의) 지침과 (대법원의) 판례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법률 해석의 최종 기관인 사법부의 판단에 노동부는 따를 수 없다는 태도다. 김지형 전 대법관(현 지평지성 고문변호사)은 “통상임금 산정 지침은 행정기관의 내부 지침에 불과해 법규로서 구속력이 없다. 통 상임금에 관한 판례가 달라지면 노동부는 행정지침을 당연히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철수 서울대 교수(법학)도 “노동부의 예규 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조속히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자동 차의 사례처럼 순진하게 노동부 예규만 믿었다가 2조원 이상의 임금 부담을 새로이 안게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25년 전 통상임금 산정지침 고수하는 노동부대법원 판례와 노동부 행정해석은 어떤 차이가 나는 걸까? 통상 임금 범위와 관련해 법리와 행정해석 모두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판단 요소로 삼는다. 그러나 해석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대법원은 시대적 흐름에 맞춰 통상임금 범위를 확대하며 성장했지만 노동 부는 제자리만 맴돌았기 때문이다.
첫째, 판례는 ‘임금일체설’(모든 임금은 노동의 대가)의 입장이지 만 행정해석은 1995년 이전 대법원이 취한 ‘임금이분설’을 여전히 고 집한다. 식비·교통보조비 같은 복리후생비를 판례는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만 행정해석은 그렇지 않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95년 12월21일에 판례(94다26721 판결)를 변경했다. 종래에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받는 교환적 부분과 노동 자로서 지위에 따른 생활보장적 부분으로 구분(임금이분설)했다. 그래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는 쟁의행위 기간에도 생활보장 적 부분은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 임금이분설을 폐기해 모든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파악했다. 가족수당·주택수당도 노동시간과 직접적·비례적으로 대응하진 않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는 거라고 견해를 바꿨다.
근속수당·식비·가족수당 두고도 해석 엇갈려둘째, 정기성을 해석할 때도 행정해석은 ‘1임금 산정기간’(1개월) 외에 지급되는 임금 항목은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하지만 판례는 1 개월을 넘더라도 인정한다. 명절이나 여름철 휴가비가 이에 해당한다. “노동자에 대한 임금이 1개월을 초과하는 기간마다 지급되는 것이라도 그것이 정기 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것이면 통상임금 에 포함될 수 있다. 노동시간에 직접적 또는 비례적으로 대응해 지급되는 임금이 아니라 도 그것이 노동에 대해 지급되는 임금이 아 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사유만으로 임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할 수 없다.”(대법원 1996 년 2월9일 선고 94다19501 판결) 셋째, 일률성도 행정해석은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경우에만 충족한 것으로 본다. 반면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면 충분하다는 게 판례 입장이다. 육아수당이 대표적이다. 모든 노동자 에게 주진 않지만 어린 자녀가 있는 사람에겐 조건 없이 주기 때문에 통상임금이다. 명목상 수당 몇 개를 정리해봤다.
근속수당은 근속연수에 상관없이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경우에만 통상임금에 포함하는 게 행정해석이다. 하지만 근속연수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경우에는 제외한다. 판례는 이러한 경우도 통상임금으로 해석한다. 식대보조비는 노동의 질과 양이나 출근일 과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일률적으로 지급되더라도 행정해석은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식대보조비가 매월 정액으로 나오면 평균임금에는 포함한다. 판례는 실제 근무일수와 상관없이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경우 통상임금이라고 판단한다.
승무수당은 행정해석과 판례가 유사하다. 노동일과 무관하게 정 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면 통상임금이고, 노동일에 따라 차등 지급하면 그렇지 않다. 가족수당은 무조건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행정 해석은 규정한다. 반면 판례는 정기적으로 계속 지급하면 가족수 당을 임금으로 인정한다. “가족수당을 지급하면서 미혼자 등 가족이 없는 경우에도 일률적으로 부양가족이 있는 노동자가 지급받은 가족수당의 절반을 줬다면 이는 노동의 질과 양에 대한 기본급에 준하는 수당이다.”(대법원 1992년 7월14일 선고 91다5501 판결) 하지만 가족 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경우는 판례에서도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본다. “부양가족의 경우 지급하는 가족수당, 중·고등학교 에 입학 또는 재학 중인 직원의 자녀에 대해 지급하는 학비보조금 은 통상임금에서 제외한다.”(대법원 2003년 10월9일 선고 2003다 3077 판결)
이러한 대법원 판례를 노동부는 당당히 무시한다. “법원 판결로 통상임금 범위와 관련한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아직까지 법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섣불리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변경하면 혼란을 불러 올 수 있다.”
판례 회피하려 단체협약 고치는 기업들덕분에 사용자 쪽은 판례를 거부할 명분을 얻는다. “기업이 국가 기관이 정한 기준에 어긋나게 임금을 지급한다면 제재를 받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이 신뢰해온 통상임금의 명확한 기준이 뿌리부터 흔들림으로써 지금껏 국회, 정부 및 법원을 신뢰해온 성실한 기업이 억울한 일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7월1일 전국 상의 회장 단 공동건의)
한발 더 나아가 대법원에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하도록 단체협약과 취업규칙을 개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한 노무법인이 내놓은 통상임금 교육자료를 읽어보자. ‘첫째, 지급의 무조항을 임의적 지급조항으로 변경하라. 예를 들면 ‘상여금을 지급 한다’를 ‘상여금을 지급할 수 있다’라고 바꾼다. 또 상여금을 ‘경영성 과급’으로 개명해야 한다. 둘째, 지급조건과 지급기준액에 변동적 요건을 추가하라. 성과평가나 출근성적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적으로 준다고 명시하거나 휴직·정직·퇴직자에겐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밝히도록 하자.’ 노동부와 사용자가 손잡고 대법원 판결을 끊임 없이 흔들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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