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수탈, 강제 노동, 강제 이주.’
지난 2년간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분 버마(미얀마)에 더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이다. 15년간 가택연금을 당했던 ‘민주화의 아이콘’ 아웅산 수치가 차기 대권을 꿈꾸는 세상이 왔다.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은 1988년 창당 이래 처음으로 지난 3월10일 전당대회를 열고, 2015년 총선 본격 채비에 들어갔다. 테인 세인 정권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야 떨쳐버릴 수 없지만, 버마에 변화의 바람이 부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듯하다.
그 바람은 세계 최장기 내전 지역 카렌주에도 이르렀다. 반군 카렌민족연합(KNU)과 버마 정부는 지난해 1월12일 휴전협정을 맺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방콕 주재 미 대사관은 올 6월 이후로는 버마 난민들의 ‘미국 재정착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타이 정부도 국경지대 수십만 버마 난민 송환 계획을 언론에 흘리고 있다. 모두 정글 너머 땅이 ‘안전’하고, ‘살 만하다’는 전제 때문일 거다. 과연, 2살짜리 개혁은 60살 내전 지역을 안전하게 만들어놨을까?
카렌인권그룹(KHRG)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 ‘빼앗기는 땅’은 버마 개혁에 대한 장밋빛 덧칠에 경각심을 준다. 2011년 1월부터 2012년 11월까지 카렌주에서 진행 중인 35개 개발 프로젝트를 모니터한 이 보고서는 주민 증언록 809건 중 개발 프로젝트와 직결된 99건을 추려 분석했다. 이 가운데 토지 수탈, 강제 이주, 강제 노동으로 볼 만한 증언은 각각 54건, 31건, 26건씩이다. 보고서는 수력발전용 댐, 인프라 구축 사업, 벌채, 광산 개발, 플랜테이션 농업 등 분쟁 때문에 막혀 있다가 휴전 직후 밀려드는 각종 개발사업으로 주민들이 광범위한 토지 수탈과 생계 위협에 내몰렸음을 고발하고 있다.
“버마군 제549 대대가 주둔하면서 내 땅이 사라졌다. 내 농지에 내가 가는데도 ‘당신이 이 땅 주인이라는 문서라도 있냐?’고 묻질 않나…. 여긴 군인들 땅이고, 모든 건 군부 소유라면서 말이다.”
카렌인권그룹이 인터뷰한 카렌주 파안 지역 주민 나우(54·여·가명)의 말이다. 파안은 벌채 산업, 광산 채굴, 플랜테이션 농업 등 여러 사업이 동시에 진행 중인 카렌주 주도다. 또 다른 파안 주민 사우(60·남·가명)는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조직적으로 땅을 뺏지는 않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전에는 일정한 대가를 갖다바치면 농사는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2012년부터는 토지를 몽땅 빼앗아갔다. ‘개발사업에 땅을 양보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을 하라는데, 거부하면 ‘이 땅은 국가 소유이고 마을 주민들은 권리가 없다’고 윽박지른다.”
‘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군사정권이 마련해 2008년 5월 국민투표로 통과된 버마 헌법 1장 37조 1항은 “버마 연방의 지상과 지하, 해상과 해저, 그리고 공중에 존재하는 모든 토지 및 천연자원의 궁극적 소유주는 정부”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토지를 국유화해 무상분배 방식으로 토지개혁이라도 하겠다는 건 결코 아닐 터다. 이 조항의 노림수는 지난해 3월 버마 의회가 통과시킨 ‘휴한지와 신착지 관리법’에 잘 나타나 있다.
법에 따라 버마 정부는 이른바 ‘버려진 땅’을 ‘농업 생산과 광물 채굴, 기타 장기적인 국가 이익이나 공중의 이익을 위해 주민들과 사전 논의 없이 사기업에 재분배할 권한’을 갖게 됐다. 버마 인구 3분의 2 이상이 농민이다. 카렌주를 포함한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선 농토와 관개수로 등을 전통적으로 공동 소유한다. 새 법이 어떤 현실을 만들어낼지 어렵잖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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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란 깃발 아래 급증하는 각종 개발 프로젝트로 돈을 긁고 있는 집단도 관심거리다. 먼저 이른바 ‘개혁’ 이전엔 한 몸뚱이였던 관료와 군인, 국경수비대가 있다. 한때 마약왕 쿤사의 경쟁자였던 로싱한이 이끄는 ‘버마의 삼성’인 아시아월드컴퍼니 등 국내외 거대 기업도 빼놓을 수 없다. 휴전 이전부터 호시탐탐 버마 개발사업을 노려온 중국·타이 등 주변국과 다국적기업도 이익 선점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1995년과 2007년 각각 카렌민족연합에서 떨어져나간 민주카렌불교도군(DKBA)과 카렌평화위원회(KNU/KNLA PC) 등 카렌 민병대도 ‘떡고물’의 수혜자다. 마지막으로, 정부군과 휴전에 들어간 반군(KNU) 역시 일부 개발업자와 밀착해 주민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카렌인권그룹은 보고서에서 한 주민의 말을 따 “천연자원 개발을 원하는 업자들이 반군이나 민병대 조직 지도부와 안면을 트기 위해 찾아오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이 바로 파안·타톤·카익토 등지에서 광산 개발을 한답시고 주민들을 쫓아낸 자들”이라고 전했다.
지난 60년여 내전 기간에 강제 이주와 토지 수탈은 일상이었다. 사실상 ‘내부 식민지’였던 게다. 카렌인권그룹 대변인 쿠쿠주는 “개발사업 현장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바로 휴전 이전까지 소수민족을 살상하고 강제 노동과 강제 이주를 주도해온 자들”이라고 말했다. ‘민족 해방’을 내걸고 싸우던 ‘아군’마저 그들과 합세했으니, 주민들이 느낄 좌절감의 깊이는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휴전 이후, 카렌의 ‘내부 식민지화’는 되레 속도가 빨라지는 모양새다. ‘버마를 위한 아세안대안네트워크’(Altsean) 활동가 데비 스토타드는 이렇게 말했다.
“카렌 주민들은 지난 60년 동안 당해온 일들을 지금도 똑같이 겪고 있다. 땅도, 삶의 기반도, 안전망도 모두 빼앗기고 있다. 주변국들은 카렌 난민을 버마 땅으로 밀어낼 생각만 하는데,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건 이익에 혈안이 된 관료와 군인, 은퇴한 반군과 업자들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국내난민(IDPs)으로 떠돌거나, 타이 등지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내몰리고 있다.”
카렌 지역뿐 아니다. 지난 2년여, 버마 전역에서 군대를 동원한 ‘땅따먹기’가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군부가 소유한 ‘미얀마이코노믹홀딩스’(UMEHL)가 중국 기업 완바오와 함께 북서부 라파다웅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구리광산 개발사업(라파다웅 프로젝트)이 대표적 사례다. 광산 개발 과정에서 수질오염과 농토 파괴, 불교 사원 훼손 등이 잇따르면서 지난해 11월29일 현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지만, 중무장한 군경에게 무참히 짓밟혀 승려를 포함해 적어도 90여 명이 다쳤다.
항의 시위가 이어지자 버마 정부는 아웅산 수치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는 지난 3월11일 내놓은 자체 조사보고서에서, ‘과도한 물리력을 동원한 무리한 시위 진압이었다’는 점을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책임자 처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또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내세워, 구리광산 개발사업은 지속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치를 믿었던 주민들로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치, 더는 민주화의 상징 아냐”“만일 사업을 중단한다면 (그간의 공사로) 파괴된 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은 어디서 구할 건가?” 지난 3월13일 현장 방문길을 가로막고 해명을 요구하는 주민들에게, 수치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라파다웅 주민들과 수치 일행이 대치하는 장면은 유튜브 등을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소식이 알려지자 300명 남짓이던 라파다웅 시위대는 3천 명까지 늘었다. 이를 두고 버마 망명 언론인들이 타이에서 발행하는 독립매체 는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꼬집었다.
“1988년 항쟁 이래 아웅산 수치는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수십 년간의 가택연금 중에도 그는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더는 아니다. 수치가 하는 일은 모두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던 시대는 끝났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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