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박근혜 정부’가 공식 출범한다. ‘국민행복’과 ‘법치국가’는 대선 과정에서 박 당선인이 내세운 두 가지 핵심 과제였다. 새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에 내정된 황교안 후보자의 일성도 ‘법치주의 확립’이다. 그는 2월13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깨끗하고 안전한 사회, 인권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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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Rule of Law)라는 개념은 원래 군주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통제하려는 근대적 기획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경험칙은 법치주의가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해왔음을 웅변한다.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와 이철호 남부대 교수는 공저 에서 과거 군사정부가 ‘법치’의 이름으로 자행한 폭력을 열거한 뒤 “법 집행의 전근대성과 식민성의 이중 구조가 개발독재 또는 군사독재에서는 관료가 자기 편한 대로 법을 통해 지배하고 그 지배 과정에서 법의 내용을 왜곡하고 변조하는 것으로 나아갔다”고 일갈했다.
정태욱 인하대 교수의 저서 는 법치주의라는 구호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법치가 정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맹목적인 법치주의의 주장은 결국 그 토대인 정치를 좌절케 한다. 단지 우매한 것에 그치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그러한 법치의 주장은 곧 교활한 정치 공세라고 본다. 그 진의는 정치적 목적에 있으면서, 단지 법치의 이름만을 내세우는 것이다. 즉 상대의 행위에 정치적 의도가 있음을 이유로 반법치라고 비판하면서 결국 법치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독점하는 것이다.”
송호창 의원(무소속)은 정치에 투신하기 전인 2008년 겨울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헌법 교과서에서 법치주의는 ‘국민의 의사표현인 헌법이나 법률에 의한 통치를 말하는 것으로 헌법과 법률에 의한 국가권력의 제한’을 의미한다. 그 핵심 내용은 인간의 존엄성, 국민의 자유와 평등,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만들어내고 제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원리인 것이다.”
그 누구보다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박 당선인의 인식은 어떨까. 과거 발언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현대자동차 파업이 한창이던 2007년 1월18일 한 특강에서 “법 위에 떼법이 있다. 강성·귀족·비리 노조가 이 땅에 더 이상 발붙이게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공공의 적일 뿐”이라고 맹비난했다. 당시 선거 슬로건으로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를 만든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여전히 유력한 경제부총리 후보자로 거론된다. 때때로 법의 얼굴은 냉혹하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서울 용산 철거민을 강경 진압한 이명박 정부의 논리도 ‘법치주의와 공권력 확립’이었다. 불행하게도 박 당선인의 법치 역시 공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로서가 아니라, 단지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한 사회질서 확립 쪽에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4대 사회악(성폭력·학교폭력·가정파괴범·불량식품) 근절을 여러 차례 강조하거나 정부조직 개편 과정에서 행정안전부의 명칭을 안전행정부로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는 ‘반쪽 법치’에 불과하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최근 한 칼럼에서 “법치주의는 법질서와 치안을 위한 권력의 기술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 인권 보호를 위한 권력 통제의 기술이며, 현대 법치주의는 정치적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방점을 찍는다”고 꼬집기도 했다.
법치를 금도로 여기는 박 당선인이 법리에 대한 몰이해를 여러 차례 드러낸 사실도 자가당착이다. 정수장학회 논란과 관련해 연 기자회견에서 “법원에서 강탈이 아니라고 해서 원고 패소했다”는 언급을 되풀이했다가 이후 정정해야 했다. 박정희 시대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꼽히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법부가 2007년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두고 지난해 9월10일 MBC 라디오 에 출연해 “두 가지 판결이 나왔으니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해 최종심만을 인정하는 우리 사법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비난에 직면했다. 단순한 실수일까? 아니다. 2007년 1월31일에도 그는 기자들과 만나 “(무죄판결은)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생각한다.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이고 이는 역사와 국민이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 5년 사이에 ‘두 개의 판결’이라는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법치의 박근혜’라는 표면적인 이미지와 달리,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 등 법치의 사각지대에서 호의호식한 인물들을 중용한 대목은 차마 웃지 못할 희비극이다. 2월13일 6개 부처 장관에 대한 인선을 발표했지만 각 후보자를 둘러싼 크고 작은 의혹이 벌써부터 불거지고 있다. 극우 안보지상주의자로 ‘미스터 국가보안법’이라는 별명을 지닌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피부병으로 인한 본인의 군 면제와 부인의 땅투기 논란에 휘말렸다.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도 경북 예천 일대의 땅에 대한 증여세 탈루 사실이 확인됐고, 서울 강남의 아파트 투기 의혹도 나왔다. 예편 뒤 독일 군수기업 ‘엠티유’의 국내 중개업체인 ‘유비엠텍’에서 비상근 고문으로 일한 사실도 드러나 부적절한 처신 논란이 제기된다. 김용준 전 후보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양질이라는 평가가 많지만,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도 위장전입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하기도 했다.
뜻밖의 종교 편향 논란마저 불거질 조짐이다. 박 당선인 본인은 특별한 종교를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황교안 후보자는 2012년 7월 펴낸 에서 속세의 실정법과 교회 법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경우 “우리 기독교인들로서는 세상 법보다 교회 법이 우선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이 세상보다 크고 앞서시기 때문”이라고 썼다. 법무부 장관으로서의 자질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인식이다. 국내 최초의 ‘기독교 법률사무소’를 표방한 법무법인 로고스 대표변호사를 지낸 정홍원 총리 후보자도 독실한 신자다.
단지 검증 과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에게는 유독 관대한 ‘박근혜식 법치’의 표리부동은 정부 출범 과정에서부터 이미 드러나고 있다. 박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책임총리제’를 공언했다. 그러나 후보자를 선임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폐기됐다. 그다음 부상한 논리가 ‘책임장관제’였다. 실질적인 책임총리제의 도입이 어렵다면, 행정부의 전권을 부처 장관들에게 부여하겠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절차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우리 헌법에 국무총리가 장관을 제청하게 되어 있고, 박 당선인도 책임총리를 도입하겠다는 약속을 여러 차례 했지만 김용준 낙마 사태 이후 총리가 공석인 상태에서 박 당선인은 장관을 임명했다. 이 자체가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이렇게 지적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박 당선인은 법치를 강조하지만 시간이 없다, 사람이 없다는 식의 상황 논리가 법보다 우선하고 있는 것이요. 먹고살기 힘들어 도둑질했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뭐가 다른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집권했지만 결국 정해진 일정 안에 정부를 출범시킬 준비도, 실력도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시대’를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쇳말은 아마도 부친인 ‘박정희의 그림자’일 것이다. 유민봉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는 2월6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새 정부를 ‘박정희 정부’라고 말했다가 급히 정정했다. 그는 대선 과정에서 박 당선인의 발언 등을 자세히 소개한 뒤 “이것이 새로 출범하는 박정희, 아니 박근혜 정부의 굉장히 중요한 코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프닝이었지만, 실제 박 당선인의 리더십을 두고 박정희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은 적지 않다.
청와대와 정부조직 개편 과정에서 경호처를 경호실로 확대해 장관급 경호실장을 두기로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3년 설치한 경제부총리 제도도 부활시켰다. 매머드급 조직으로 탄생할 미래창조과학부를 박정희 시대에 경제부처들을 상대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던 경제기획원에 빗대는 시선도 있다. 단지 조직 외관만의 문제일까? 이미 내부에서는 과도한 ‘충성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박 당선인의 양친인 박정희·육영수의 사진을 부착한 휴대전화 고리를 사용하는 모습이 포착돼 논란을 빚었다. 그는 1972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박 전 대통령에게서 대통령상도 받았다고 한다. 인수위는 “다시 한번 ‘잘살아보세’의 신화를 만들겠다”는 박 당선인의 말에 따라 ‘제2의 새마을운동’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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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밀봉·나홀로 인사 스타일도 박정희 시대의 그것과 판박이다. 육사 출신과 법조인을 선호해 ‘육법당의 귀환’이라는 비난도 제기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혼자만의 인사수첩을 활용했다. 박정희의 인사수첩은 염라대왕의 수첩이라는 뜻의 일본말 ‘엔마초’(閻羅帳)라고 불렸다. 박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정계에 진출했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2월15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자기 수첩에 ‘누구는 쓸 만하다, 누구는 못 쓴다’라고 다 메모를 해뒀고 그것을 살펴서 인사를 했다. 박근혜 당선인의 별명이 ‘수첩공주’인데 아버지에게 보고 배운 것 같다.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것일 수 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적어둔 것이니까. 다만 그렇게 하다보면 인선의 폭이 아주 좁아진다. 현재 박 당선인도 인선 폭이 좁은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널리 인재를 구하는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등용하란 것은 아니지만, 수첩에 적힌 사람만 가지고 하다보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탄식이 나온다. 한 친박 의원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사람이든 정책이든 당선인 혼자만 아는 세계는 좁다. 원칙을 두고 고집을 부리는 게 좋지만 그 목표를 추진하는 전략은 유연해야 한다. 특히 나홀로 인사는 정말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협소한 인재풀은 결국 관료 출신 인사들의 전진 배치로 이어진다. 비교적 무난한 방식이라는 판단에서다. 정홍원 총리 후보자를 포함해 외교부 윤병세, 교육부 서남수, 국방부 김병관, 문화체육관광부 유진룡, 안전행정부 유정복, 법무부 황교안 후보자 등 2월15일 현재까지 지명한 총리 및 장관 후보자는 모두 관료 출신이다. 유정복 후보자도 직업 정치인으로서 박 당선인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영원한 비서실상’으로 꼽히지만, 역시 행정고시 23회의 내무부 관료로 친정에 복귀하는 경우다.
정치인으로 살아온 ‘대통령 박근혜’는 정치를 불신한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비교적 여의도 정치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탕평보다는 측근, 민주적 검증보다는 밀봉, 정치인보다는 관료를 선호하는 박 당선인의 인사 스타일을 전임자 못지않은 ‘정치 불신’의 전조로 여기는 시선도 적지 않다. 김형준 교수는 “지금까지 보여준 박 당선인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행정주도형”이라고 전제한 뒤 이렇게 지적했다. “관료나 학계 인사들을 중용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당선인도 정치를 오래 했지만 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정치를 갈등지향적이고 비효율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1970년대 제3세계의 개발독재 체제를 설명하는 모델이 기예르모 오도넬의 ‘관료적 권위주의 모델’(BA·Bureaucratic Authoritarianism)인데, 그 전형이 한국에선 박정희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박근혜를 봐라. 똑같은 방식이다. 우려스럽지만 이런 식의 국정 운영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관료 중심의 국정 운영은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에서 “(1987년 이후) 정치 엘리트들이 관료 엘리트의 도움 없이는 국정 운영 자체가 어렵게 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의존이 급속히 커지고, 행정관료 엘리트의 권력이 (과거 군부독재의) 권위주의 시기보다 커지고 있다”며 “역설적으로 민주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보다 더 관료에게 포획된 정부가 된다”고 우려한 그대로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 컨트롤타워’였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해 펴낸 는 박 당선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청와대를 곤혹스럽게 했던 한국 관료사회 특유의 폐쇄적 이기주의를 이렇게 지적했다. “관료들의 커뮤니티는 단지 관료 선후배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관료조직 외부의 이해관계자와 고객집단까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서적 공동체로 이뤄지기도 합니다. 일종의 네트워크이고 공유된 정서라 눈에 잘 띄지도 않지요. 이 커뮤니티의 힘이나 영향력이 때로는 대통령의 그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특히 집권 후반기에는 말이지요.”
현재 박 당선인의 시선은 관료집단에 머물러 있다. 가용 가능한 인사수첩의 명단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박 당선인 처지에선 별다른 대안도 없다. 비교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만한 인물들 중에서 자신의 국정철학을 잘 이해하고 실현한 사람을 인선해야 한다. 바로 관료집단이다. 일본의 개혁론자 오마에 겐이치는 저서 에서 “관료기구는 자기개혁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외압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자기증식을 계속하게 된다. 그것이 관료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결론”이라고 썼다. 박근혜 시대는 다를까? 결국은 리더십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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