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다. 새롭게 살고 싶다는 자못 비장한 결심으로 팔을 걷는다. 책을 토해내고 있는 책꽂이에 눈이 간다. 십수 년 전 구매한 영어 문법책이 홀연히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만 이별을 해야 하나. 아니다. 영어 공부는 다시 시작돼야 한다. 수년 전 면세점에서 지른 화장품 병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앉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기이한 냄새가 올라온다. 이것을 얼굴에 발랐다간 15년은 늙어버릴 것임이 분명하다. 오일과 물, 알 수 없는 성분으로 분리된 내용물을 하수구에 쏟아붓고 있자니 환경파괴자가 된 죄책감, 괜한 쇼핑에 대한 반성, 쓸데없이 큰 용량을 사도록 유혹한 업체에 대한 분노가 솟구친다. 책상은 이미 제 기능, 그러니까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는 가구로서의 구실을 잃은 지 오래다. 책꽂이에서 튕겨나온 책, 갖가지 서류, 우편물, 화장품, 드라이기, 먹다 남은 주전부리 등이 수북이 올려진 거대한 선반. 서랍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만기가 지난 통장들을 과감히 처분하는 작업을 끝으로 청소 대장정이 마무리된다. 홀가분함은 찰나요, 중노동으로 인한 몸살이 찾아들며, 잡동사니는 다시 쌓여가나니. 이런 처참한 삽질을 반복하고 있는 건, 혹시 당신?
방 주인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헷갈릴 만큼 잡동사니를 이고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도 가지가지다. 언젠가는 사용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기능집중형, 추억이 오롯이 서린 물건을 차마 내칠 수 없다는 사연집중형, 마니아 성향의 수집집중형 등. 40대 여성 박아무개씨는 집에서 책을 기른다. 침실을 빼고 난 나머지 두 개의 방엔 책이 가득하다. 전체 책꽂이 수는 11개. 대학 1학년 때 보던 전공 서적도 ‘이사’라는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살아남았다. 바닥에도 책이 쌓여 있어 청소가 쉽지 않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란다. 책 무게 탓에 이사 비용이 많이 들어도, 종종 남편이 불만을 토로해도 책을 버릴 순 없다. ‘언젠가는’ 들춰보기 때문이다. “새벽 한두 시에 무엇인가 찾고 싶은데 서점에 갈 수는 없잖나.” 그에게 책은 삶의 흔적이자 추억이기도 하다. 옛날에 보던 책을 문득 들춰보면, 거기엔 손으로 끄적거린 감상문이 있다. 한때 열심히 모은 도서 시리즈를 볼 때면 그 시절에 생각했던 인생 철학과 꿈을 떠올린다.
| |
죽어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소유해야 할 물건이 넘쳐나는, 소유물이 삶을 압도하는 시대가 낳은 ‘저장 강박’을 앓고 있는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진단도 나온다.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줄자, 개인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일상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건 소비다. 재활용 가구를 만들고 공공 공방을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문화로놀이짱’ 안연정(35) 대표는 20대 시절, 소비로 자존감을 확인하다 보니 늘 결핍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돈 없이도 살 궁리를 하다 2006년 책장과 책꽂이를 만드는 경험을 하며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무엇인가 스스로 생산하는 과정은 ‘돈 굳었다’는 차원을 넘어선 엄청난 몰입과 활력을 선물했다. 친구들끼리 음식을 나눠 먹고, 작업 기술을 서로 품앗이로 가르쳐주며 돈 앞에 주눅 들지 않는 다른 차원의 풍요로움이 생겨났다. “세상 전체가 미친 듯이 구매하라고 외치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고, 외롭고 바쁜 사람들에게 가장 빠르게 만족감을 주는 건 소비다. 노는 문화도 술과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한정돼 있다. 돈이 없으면 놀지도 못하는 거다. 소비자 중심의 상상력이 부족하다. 이런 문화가 버릴 것들을 양산해내는 것 같다.”
이고 지고 사는 삶은 물리적 불편함을 유발할 때가 많다. 우리가 생활하고 숨 쉬는 공간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이 반복되는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안연정 대표는 소유물을 버리기 전에 경제적 가치는 조금 뒤로하고, 나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가치를 지니는지 따져보라고 조언한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얼마짜리 물건이 아닌, 내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한다면 애초 구매 단계부터 함부로 사기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화로놀이짱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담아 최근 ‘나를 닮은 진짜 공간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직장인 이아무개(31)씨는 지난 1월, 2주에 걸쳐 집 청소를 단행했다. 전 남자친구가 보낸 편지와 지난 7년간 한 번도 듣지 않은 중국어 교재에 딸린 테이프(이미 카세트플레이어가 사라져, 재활용이 불가능했다)를 버렸다. 매년 해오던 정리 작업이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버리는 작업에만 집중했던 과거와 달리, 무엇이 내 집을 채우고 있었는지 관찰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을 쓸데없이 탐했는지도 알게 됐다. 책들이었다. 보지 않은 책과 잡지가 한가득이었다. 쓸데없는 것을 탐한 만큼, 자원 낭비에도 일조했다. 이씨는 자신의 집에 애정을 주기보단, 그저 잠만 자는 곳으로 여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물건을 채우는 동안 ‘나’를 담아내려는 노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광준 바람부는연구소 소장은 소유물을 △생존에 필요한 것 △필요한 기능을 가졌지만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대체 가능한 것) △생존에 필요하지 않지만 문화적으로 필요한 것 △물리적·문화적으로 전혀 필요 없는 것 등으로 구분해볼 것을 조언한다. “우쿨렐레를 충동적으로 사놓고 한 달에 한두 번 연주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쿨렐레를 최대한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알아보고, 몇 번 연주 과정을 거친 다음에 집 안에 들여놓는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공간에서 빼낼 때도 고민이 필요하다.
집 밖도 나와 이어진 공간이다
이광준 소장은 ‘잘 버리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내가 사는 공간을 깨끗하게 정돈하며 밖으로 쓰레기를 배출하는 데 익숙하다. 사실, 내가 사는 공간과 동네라는 공공 공간이 분리된 게 아니다. 잘 버리는 방법은, 소유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게 아니라 있어야 할 곳을 찾아주는 것이다. 아름다운가게 등에 기증할 수도 있고, 벼룩시장에 내놓을 수도 있다. 선물받은 스웨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올을 풀어 다른 모양새로 뜰 수 있다. 마음 맞는 이들끼리 물건을 보관할 공동 공간을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서울 홍익대 주변에 예술작가가 많은데 집에 작품을 쌓아놓지 않고 한곳에 모아놓으면 전시장이자 생활 공간이 된다.” 물론 우리 주위에서 공유·재활용 플랫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캠페인도 일고 있다. 지난해 10월 개설된 웹사이트 ‘바이왓유빌리브’(www.bwyb.net)에서는 ‘우리 동네 착한 가게 지도’ 만들기가 진행 중인데, 각 지역의 벼룩시장·중고물품숍·대여커뮤니티 등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참고 문헌 (랜드 O. 프로스트 & 게일 스테키티·윌북)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