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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보수화? 글쎄

‘늙으면 보수화한다’ 가설 힘 실어준 대선… 그러나 복지·경제민주화 등 새누리당 중도화 전략 결과라는 해석 설득력 높아
등록 2013-01-29 13:37 수정 2020-05-02 19:27

‘늙으면 보수화한다’는 속설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지난해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이 오래된 통념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진보 후보’ 노무현이 당선된 2002년 대선 당시 40대의 선택은 정확히 반반이었다. 48.1%가 노무현을 찍었고, 47.9%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세월이 흘러 50대가 된 이들은 지난해 대선에서 62.5%가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10년 새 진보 지지층의 3분의 1 정도가 이탈한 것이다. 보수 세력의 정치적 코어가 된 60대 이상 노령층은 또 어떤가.  
고령 인구 비중 높은 유럽 보수적인가
60대 이상 유권자층은 지난해 12월 대선에서 72.3%가 박근혜를 찍었다(방송 3사 출구조사). 20대나 30대가 문재인을 지지한 비율보다 더 높다. 눈여겨볼 지점은 지금의 60대 역시 30~40대 시절엔 보수적인 집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60대 초반 연령층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30대 후반이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지금의 40대(386세대)와 손잡고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넥타이부대였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돌풍을 일궈낸 것도 이들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지난해 대선 결과를 두고 야권 성향의 분석가들 사이에서 ‘이제 대세는 인구학’이란 푸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아무리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진 세대라도 나이가 드는 족족 보수로 변하니, 노령 인구가 청년 인구를 압도하게 될 앞으로의 초고령 사회에선 보수의 장기 집권이 무리 없이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절망감의 표출이었다.
비관의 근거는 나름대로 충분했다. 지난 대선이 보수와 진보 모두 끌어모을 수 있는 표는 모두 결집해 치른 총력전 양상을 띤데다, 투표율도 야권이 무조건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70%대 중반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야권의 패배 요인으로 가장 손쉽게 지목될 수 있는 것은 연령대별 인구구성(2040 대 5060)이 10년 새 역전됐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전부였을까.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다른 진단을 내놓는다. 선거를 인구 변화의 결과로만 보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만약 고령 세대가 모두 보수화된다면, 가장 고령 인구 비중이 많은 유럽이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가장 젊은 인구가 많으니 가장 진보적이어야 한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고령 인구가 많은 일본은 ‘초보수사회’가 되어야 한다. 최근 유럽의 보수화, 미국 민주당의 재집권, 일본 자민당의 압승을 보면 인구학적 설명이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 유럽에서 사회민주당이 우세하고, 미국에서 조지 W. 부시의 공화당이 승리하고, 일본에서 민주당 돌풍이 일어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노령화와 정치적 참여 욕구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관찰되는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나이가 많은 집단일수록 투표율이 높다. 노인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진단한다. “노년기에는 신체활동 능력이나 개인적 성취 기회가 감소하는 반면, 사회 속에서 위상 강화에 대한 욕구가 반사적으로 증가하며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경향이 증가한다.”(박재간·이인수 ‘우리나라 노인의 정치 참여의 과제’)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등 진보 진영의 의제를 수용하며 보수와 진보 사이의 사회·경제적 정책 차이가 희미해 진 게 핵심이다.”-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

‘담론 투쟁’ 따라 끊임없이 유동

대다수 나라에서 나이가 많은 세대일수록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한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노령화가 정치적 보수화를 낳는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건 성급하다. 한 사람의 정치적 선택에는 나이듦(연령효과)뿐 아니라 동년배 집단의 공통 경험(세대효과), 계급, 지역, 성별, 종교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국 선거 연구자들도 노인층의 보수주의(공화당 지지 성향)는 노령화 자체의 효과는 아니라고 진단한다. 최근 노인층에서 꾸준히 증가해온 민주당 지지율이 그 근거다. 전문가들이 볼 때 이것은 연금·건강보험 문제와 관련된 공화당의 보수적 태도에 대해 저소득층과 블루칼라 은퇴자들의 반감이 확산된 결과다. 요컨대 노인층이 갖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어떻게 의제화하고 동원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시각은 지난 대선에서 한국의 50대가 보여준 정치적 선택을 분석하는 데도 적절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 연령집단의 ‘박근혜 몰표’는 이들이 사회·경제적 이슈와 관련해 보수화되어서가 아니라, ‘박근혜표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상징되는 새누리당의 중도화 전략이 이들 집단 내부에서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윤태 교수는 “박근혜 후보가 진보 진영의 의제를 수용하며 보수와 진보 사이의 사회·경제적 정책 차이가 희미해진 게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노년층의 정치적 선택은 동년배 집단 내부의 정치적 담론 투쟁에 의해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세대 정치’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세대가 일정한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이념적으로는 보수·중도·진보의 다양한 층위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년층도 마찬가지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중요한 건 정치 상황의 변동에 따라 특정 층위는 부각되고 또 다른 층위는 잠복하며 세대 전체의 정치적 선호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말한다. “세대의 정치 지향은 특정하게 구조화된 게 아니라 정세 변화의 영향을 받는 세대 내부의 ‘담론 투쟁’ 양상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한다.”

젊은 세대의 담론 투쟁이 벌어지는 대표적 공간이 트위터·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과 인터넷상의 다양한 동호회 게시판이라면, 노년층에선 지역 커뮤니티와 종교단체, 공원에서의 일상적 대화모임 같은 대면 커뮤니티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다. 대체로 보수가 절대적 우위를 점유하는 공간이다. 서울과 수도권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종묘공원의 경우, 여론을 주도하는 쪽은 ‘대한민국어버이연합’류의 극우 모임들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공원 노인들 보혁 경쟁’ 같은 보도기사가 간간이 이어졌지만, 노무현 정부 5년을 거친 뒤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진보의 목소리를 조직하고 전파하는 통로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민주당 안에도 노인위원회가 있지만, 사실상 호남향우회 시니어 모임 정도에 불과하다.

노년층 포괄하는 풀뿌리 네트워크 중요

야권 안팎에선 실종된 담론 투쟁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 첫 단계가 노년층 내부에 정치적 확성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정당의 노인 조직과 노년층을 포괄하는 풀뿌리 시민사회 네트워크의 구축이 중요한 이유다. 노년 세대에 호소하는 이슈와 정책도 꾸준히 공급돼야 한다. 콘텐츠가 없는 확성기는 소음만 유발해 듣는 이의 피로도만 높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시, 조직과 정책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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