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았지, 다 속아어.”
11월20일 고리 원자력발전소 인근 길천마을(부산 기장군 장안읍 소재)에서 만난 박정학(82·사진)씨는 40여 년 전 그날 일을 떠올리다 감정이 북받친 듯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4대째 살아온 옛집과 논밭을 원전 부지로 내주고 이웃 마을로 이주한 ‘원전 철거민’이다.
“큰 공장이 들어온다 캤지. 1960년대 말일 기라. 산 중턱에 고경사라고 작은 암자가 있었어. 거기 외국 사람들이 와가꼬 현지답사 같은 걸 하는 기라. 부락 사람들이 몰려가서는 손뼉을 치가믄서 환영하고 그랬어. 그기 발전소라는 건 철거 다 끝나고 매립할 때 알았지. 원자력이라카는 거는 더 한참 있다 들었고.”
그는 목수였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와 갯일을 하고, 농한기에는 망치와 대패를 잡았다. 천성이 부지런한 탓이었다. 고리 옛집에는 양친과 박씨 부부, 동생, 딸까지 여섯 식구가 살았다. 딸린 논밭이 800평(2645㎡)쯤 됐다. 마을이 수용된 뒤 박씨네가 손에 쥔 보상금이 300만원이었다. 처음엔 환영하던 주민들도 턱없이 적은 보상액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포클레인하고 도자(불도저)가 막 밀고 들어오는데 우짜겠노. 용감한 아지매들 몇이서 부락 입구에 턱 앉아서는 못 들어온다 버텼지. 한참을 실랑이했는데 도자가 시동 걸고 다시 움직이는 기라. 머 다 도망가지.”
162가구 가운데 절반은 1969년 봄에서 가을 사이 인근 동백리 온정마을(기장군 일광면)과 신암리 골메마을(울주군 서생면)로 집단이주했다. 나머지는 길천과 월내 등 고리 인접 마을로 뿔뿔이 흩어졌다. 박씨는 원전 공사장 일거리를 찾아 길천마을에 눌러앉았다. 1978년 고리 1호기가 가동을 시작할 때까지 8년을 발전소에서 일했다.
“콘크리트 타설은 전문가들이 하고 우리 같은 동네 목수들은 사방공사 정도 했지. 그냥 막노동이었어. 보수가 후한 편도 아니었고.”
원전이 가동되자 일거리가 끊겼다. 비로소 자신들의 선택이 가져온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고리와 길천의 특산품이던 돌미역이 사라졌다. 그 흔하던 우뭇가사리, 성게도 자취를 감췄다. 멸치도 안 잡혔다. 이따금 기형어가 나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요즘처럼 뭘 좀 알았으면 데모 하고 싸움도 박 터지게 했겠지. 근데 그때는 나라가 하는 일 막는 거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기라. 보상금이나 더 탔으믄 했지. 근데 후쿠시마 터지고 여기도 자꾸 고장났단 얘기 들려오니 겁이 나서 살 수가 없다. 저거 (고리) 1호기는 빨리 문 닫아야 한다. 나머지 오래된 것들도 마찬가지고.”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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