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힘들게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너무도 쉽게 대판 싸운다. 대선이 코앞이다 보니 정치 때문에 싸우고, 아직은 내 것이 아닌 아버지 땅 때문에 싸운다. 친정에 빨리 간다고, 대출은 왜 했느냐며 집값 떨어졌다고, 그 나이 되도록 결혼 못했다고, 대학 나와서 취직도 못하냐고, 사촌보다 공부 못한다고, 내 탓도 아닌데 고속도로 막힌다고 싸운다. 별별 사소한 걸로 흥분하고는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 한가위를 맞아 ‘명절 가족분쟁 응급복구 가이드’를 제공한다. 대선·재산·시댁·친정·결혼·부동산·스포츠 문제로 싸움이 붙었다면 을 펴보시라. 우리 집은 하하호호 그런 일 없다고? 나는 절대 그런 말 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마시라. 당신 안의 늑대가 보름달을 볼 수 있다.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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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신경정신과 전문가들은 명절 가족 다툼을 막으려면 ‘자기중심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족이나 배우자의 가족과는 대화 소재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말을 섞는 과정 역시 차근차근 진행되기보다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진행된다. 통제되지 않은 말과 행동이 걱정이나 충고, 위로라는 형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판다. 편한 관계라며 쉽게 비교하고 아무렇지 않게 면박을 준다. 친구나 동료에게는 “너를 안 뽑은 회사는 망할 거야” “좋은 인연을 곧 만나겠지”라고 위로하면서 정작 가족에게는 “남들 다 하는 취직도 못하냐” “그러다 평생 혼자 살지”라고 구박하는 식이다. 꾹 참아온 불만이 술의 힘을 빌려 터져나오기도 한다. 답은 하나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시라. 즐거운 한가위가 당신을 기다린다. 그래도 이미 내뱉은 말, 아차 싶지만 주워담을 수 없는 그 말, 그래서 벌어진 싸움, 수습은 해야 할 터. 상황별 응급복구 가이드를 제시하오니 따라하시압.
Q: 교통체증에 질린 아내가 ‘역귀성’ 하자네요.
손목터널증후군 걸릴 뻔했다. 하염없이 클릭질했건만, 기차표·버스표 모두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최선을 다했다. 한가위 연휴에 차를 몰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 오른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런데 원망 가득한 아내 눈빛은 ‘네 잘못’이라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교통체증을 피해야 했다. 한가위 귀성·귀경 설문조사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9월29일 오전 귀성 차량이 가장 많다고 했다. 새벽에 출발하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내가 쏘아붙였다. “뭐냐, 새벽같이 내려가서 나더라 일 더 하라는 말이냐 지금?” 그래, 미안하다. 내 손목을 원망해라.
고속도로는 이미 주차장이다. 그럴 줄 알았다. 새벽부터 뭉그적거린 아내 탓에 출발이 늦었기 때문…이라고 목구멍까지 넘어온 말을 삼켰다. 버스전용차로를 따라 버스가 빠져나가고, 아내 입에서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이 새나간다. 아내가 내뱉은 한숨을 너무 들이마셔 어지럽다. 휴게소를 찾았더니, 여기는 사람에 깔려 죽을 판이다. 통감자 하나 먹자고 반나절 기다려야 할 분위기다.
아내가 통감자를 씹으며 다시 한숨을 내뱉는다. “어휴, 그러길래 시부모님이 대신 올라오시면 좀 좋으냐고.” “나이 드신 분들한테 어떻게 올라오시라고 하냐.” “하루 종일 고속도로에 갇혀 있다가 전 부치는 나는 천하무적이냐?”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뭐? 뭐?” 아스팔트 온도가 올라간다. 갈 길은 아직 먼데, 아내가 싸우자고 덤벼든다.
A: 조용히 차를 몰며 내년을 기약하세요.
고속도로 위에서의 ‘교전’은 ‘지옥의 한가위’로 내딛는 지름길이다. 명절 스트레스에 빠진 아내에겐 고속도로가 ‘훈련소 가는 길’처럼 짜증난다. 올해는 물 건너갔으니, 손목 힘 길러 내년 설에는 반드시 기차표·버스표를 사수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 역귀성도 밀린다. 2011년 한가위 35만여 대, 올해 설 50만여 대로 역귀성 차량도 해마다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 설·한가위에는 고속도로 역귀성 차량의 교통체증이 심했다. 그렇다고 이 ‘불편한 진실’을 들이대며 죽기 살기로 싸우려 들면 더 피 본다. 혼자만 알고 있자.
아내도 역귀성의 속살을 마주하자. 교통체증 피하려다 ‘역귀성한 시부모님의 장기 체류’ ‘역귀성으로 명절 음식 준비 뒤집어쓰기’ 등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을 수 있다. 차라리 싸울 시간에 퀴즈나 풀며 상품 재테크에 힘쓰자. 네 번째 고개까지 풀려면 시간 엄청 걸린다.
Q: 박근혜·문재인·안철수로 싸움이 났습니다.
이 사람들 얘기하면 반드시 싸움 난다고 했다. 한가위 절대 금칙어라고 했다. 음복으로 경주 교동법주를 마셔도 술맛 떨어지고, 조상님께 비싼 로마네 콩티를 받아 올려도 좋은 소리 못 듣는다고 했다. 절굿공이로 보름달을 세 조각 내버리는 ‘만랩 달토끼 소환수’라고 했다. 아무 대화 없이 15분째 텔레비전 뉴스만 멀뚱멀뚱 바라보던 아버지와 아들이, 방언 터진 듯 지난 1년 동안 나눈 대화보다 더 많은 말을 서로 쏘아댄 뒤 등 돌려앉게 만든다고 했다. “요즘 바쁘지?” “아, 예 그렇죠, 뭐.” 그러고는 10분째 막힌 고속도로만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던 장인과 사위도, 간만에 구성된 ‘시월드’에서 서로 간을 보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시누이도,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속으로 혀를 끌끌 차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누구도 그들을 불러들이지 않아야 했다.
결국 나오고야 말았다. 망할 텔레비전 뉴스가 고속도로와 선물 보따리를 든 귀성객을 보여주다 지쳤나 보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가 차례대로 얼굴을 내민다. 싸우자는 거다.
“안철수가 뭘 했다고 대선에 나와. 박근혜가 그랬잖아. 자기도 정치 생활 15년 했는데 그 분야에서 내공 쌓으려면 10년은 필요하다고.” “소림사도 아니고 무슨 내공? 하긴 그래요. 그런데 박근혜는 15년 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수첩 만들었나?” “국회의원 했잖아.” “그런데 15년 동안 내놓은 법안이나 정책 중에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만날 반대한 건 기억나네요.” “왜 기억나는 게 없어? 있잖아 그거, 그거, 에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그거 통과시켰잖아.” “그거 노무현이 시작한 건데요.” “안철수는 만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앉았고. 뭔 말을 하는 건지….” “박근혜가 15년 동안 한 말보다는 많이 한 거 같은데요?” “끙…. 문재인은 노무현이랑 같이 나라 망쳐놓고서는 어딜 또 나와?” “박근혜도 이번 정부가 나라 절단 낸 거에 절반은 책임 있잖아요.”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야당 때문에 나라가 절단 난 거지.” “반대는 박근혜가 더 많이 했을걸요.” “안철수는 자기 입으로 정치 경험 없고 조직 없고 세력도 없다고 하더만. 자랑이다, 참. 그런데 왜 나와? 빚진 거 없으니 막 해먹겠다는 거지.” “아무리 막 해먹어도 사람은 안 죽이겠죠, 박정희처럼.” “문재인이고 안철수고, 언제까지 과거 얘기만 할 거야. 어? 미래가 없어, 미래가.” “그래서 미래 좋아하는 박근혜는 박정희가 나라 망쳐놓은 얘기는 절대 말 안 하잖아요.” “오늘, 이놈의 대화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A: MB로 하나가 되세요.
분위기가 싸해졌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어쩌자고 정치 얘기를 했단 말인가. 누가 한가위 차례상 민심이 대선 흐름을 결정한다고 했던가. 한가위 합본호 표지이야기 기사를 읽지 말아야 했다. 그냥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고속도로에 외국인 노래자랑이나 말없이 보고 있을 것을. 그러나 지난 4년6개월 동안 쓸모없던 이가, 그리고 나머지 반년도 쓸모없을 것으로 예상됐던 이가, 돌연 한 번쯤 짧은 희망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기도 한다. MB 얼굴이 뉴스 끄트머리에 살짝 지나갔다. 명절을 맞아 어디 위문을 갔다나. 입맛을 다시며 상에 놓인 동태전이나 뒤적이고 있었다면 4대강 터진 보에서 물 빠져나가듯 탈출구를 찾아나서자.
“또 뭐 먹는 사진 올라오나?” “송편이겠지. 한입에 2개.” “5년이 언제 가나 했네.” “그때 누구 뽑았어?” “삽질만 5년 하다 끝나잖아.” “응징하라 2007.” 사람들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돈다. 누굴 욕하며 하나 되는 것이 바로 조선의 마음이다. 그렇게 간만에 하나 된 가족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 설에는 절대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자.
Q: 프로야구 때문에 싸움이 났습니다.
‘3김 시대’ 21세기 버전일까. 박·문·안 대회전으로 박 터지게 싸웠던 이들은 MB로 하나 되며 가족애를 확인했다. 이 정도도 못해주면 그게 나라님이겠는가. “어, 오늘은 야구 중계 안 하나?” 그러나 누군가 아무렇게나 던진 이 말이, 장준하 선생을 때린 그 무언가처럼 사람들의 두개골을 빈볼로 강타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한가위 연휴 첫날인 9월29일. 프로야구 두산-LG, SK-KIA, 넥센-한화의 경기가 열렸다. 가을 야구에 나갈 4강은 대략 정해졌다. 삼성·SK·롯데·두산. 나머지 팀들은 KIA·넥센·LG·한화. 지난해 프로야구 최종 순위는 삼성·롯데·SK·KIA·두산·LG·한화·넥센 순이었다. ‘예상대로’ 1위 삼성과 3위 SK가 한국시리즈 최종에서 맞붙었다. 4승1패로 삼성이 이겼다.
“아, 정말 재미없었지.” 롯데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해도 삼성과 SK가 붙으면 한국야구위원회(KBO) 불쌍해서 어떡하지~?” 두산이 ‘납뜩이’로 빙의했다. “어떡하지 너? 일단 아구창을 날릴까?” 삼성이 살짝 빈정 상해했다. “미련곰단지 같은 소리 하네.” SK는 이미 방망이를 들었다. “야구가 스타워즈냐? 레이저는 왜 쏘냐?” “용한테서는 비린내 안 나냐?” “어린이들을 위해 털뭉텅이들은 동물원으로.” “거인? 최홍만은 일본으로.” “문재인·안철수는 부산 아니냐?” “그러면서 문재인은 왜 고양 원더스 갔냐?” “대구 박근혜도 갔다.” “야구 룰은 알고 간 거냐?” 그 누구도 힐링시켜줄 수 없는 프로야구의 세계는 또다시 정치판으로 번져갔다.
KIA·넥센·LG·한화는 이미 마음을 비웠다. 서로 자기 팀 욕하는 데 바쁘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이 꼴은 못 보네.” “우린 감독이 잘렸다.” “우린 감독이 사고 친다.” “빵에 계신 회장님이 야구경기 못 보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A: 최동원·장효조로 화해하세요.
분위기가 또 싸해졌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어쩌자고 야구 얘기를 했단 말인가. 그때다. 묵직한 돌직구를 푸닥거리는 짐승들 한가운데로 집어던지자. “최동원이 죽은 지 벌써 1년이네.” 아, 불세출의 무쇠팔 투수 최동원. 지난해 9월14일 그가 떠났다. 불멸의 기록들만 남겨놓았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린 그였다. “장효조도 1주기구만.” 맞다. 방망이를 거꾸로 들어도 3할을 때린다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도 지난해 9월7일 세상을 등졌다. 싸우고 욕하던 짐승들이 조용해진다. 공 하나로 싸우지 말자. 게임 한 번 졌다고 욕하지 말자. 야구의 전설들은 하루하루 야구를 즐기라 하지 않는가. 올해 울었다면 내년을 기약하자. 내년도 그저 그렇다면 내후년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2012 프로야구 정규 경기는 10월2일(화)에 모두 끝난다. 삼성-LG(서울 잠실), 두산-넥센(서울 목동), SK-한화(대전), 롯데-KIA(전북 군산). 그 뒤로는 상위 팀들의 포스트시즌 일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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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결혼 안 한다고 구박이 심합니다. 돌싱 고모, 위자료 왕창 떼인 외삼촌을 걸고넘어질까요?
청룽(성룡)이 사라진 한가위는 쓸쓸했다. 나를 구박하는 이들을 응징할 발차기는 누가 할 것인가. 끊임없는 비교의 연속이었다. 초·중·고등학교 때는 사촌보다 공부 못한다고 비교당했다. 애써 대학 갔더니 사촌보다 ‘후진’ 대학 갔다고 비교당했다. 대학 졸업했더니 취직 못한다고 비교당했다. 취직했더니 대기업 아니라고 비교당했다. 이 또한 다 지나갔다. 웃으며 추억하련다.
그런데, 사촌이 결혼했다. 돈 많은 집과 결혼했다. “너는 어떻게 걔보다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니.” 내가 사촌보다 키 크다. 내가 사촌보다 예쁘다. 내가 사촌보다 잘생겼다. 내가 사촌보다 옷 잘 입는다. 내가 사촌보다 연애 많이 했다. 이 모든 잘난 것이 한 방에 정리됐다. 저러다 내년 한가위 때 애라도 하나 낳아오면, 충고대로 집에 안 가고 템플스테이나 갈 테다.
잔소리가 점점 심해진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리고,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뱉어버렸다. “결혼하면 뭐하냐고요. 2년 만에 이혼한 고모를 보라고요. 외삼촌은 어떻고. 돈 벌어서 위자료로 다 줬잖아.” 분위기가 싸해졌다. 거실 구석에서 소주를 홀짝이던 고모가, 주방에서 며느리들을 다잡던 엄마가 싸우자는 거냐며 다가온다.
A: 그냥 3일만 버티세요.
결혼정보업체 닥스클럽이 올해 한가위를 앞두고 미혼 남녀들을 대상으로 결혼 잔소리 대처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한다’는 맞불 공세가 대처법 1위(29%)로 꼽혔다. 그러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 소개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 있다고 둘러댄다’(13%)도 위험하다. 연기력이 되는가. 가족들이 당신 말을 믿을 만큼 평소 신뢰를 줬는가. 아닐 것이다. ‘아직 결혼 생각 없다고 말한다’(17%),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17%)는 응답도 많았다. 정신 못 차렸다, 생각이 없다, 잔소리만 늘어날 뿐 전혀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 ‘결혼하고 싶은데 인연이 없다고 하소연한다’(8%). 이게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대처법이 아닐까. 그 처절한 몸부림에 보는 엄마도, 아빠도, 이모도, 고모도 할 말을 잊고 술 한 상을 내줄지 모른다. 사흘밖에 안 되는 짧은 한가위 연휴를 축복하자. 어떻게든 버티고 보자.
Q: 막내아들이 대출금을 갚는다며 시골 땅 떼어달래요.
한가위 전날 알아봤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막내 녀석의 수상한 낌새 말이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가 줄지어 얼굴을 내미는 뉴스를 보며 온 가족이 핏대를 세우는 동안, 막내는 텔레비전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러던 막내가 갑자기 ‘발연기’를 펼친 건, “‘하우스푸어’가 주택담보대출자의 16.2%”라는 뉴스가 나오면서부터였다. “히야~, 어쩜 딱 내 얘기네. 하우스푸어, 집 가진 빚쟁이.” 어색한 손짓을 하는 너, 못 봐주겠다. 그런데 왜 날 보며 얘기하니? “맞벌이하는데도 월급 절반이 은행 대출금 이자로 푹푹 빠진다니까요. 쪼들려서 먹고살 돈도 없어요. 어휴~.” 막내의 한숨 소리에, 부엌에 있던 막내며느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매일 이어지는 회식에도 택시값 아낀다며 막차만 타던 막내는, 얼마 전 또 다른 막차를 탔다. 그런데 잘못 탔다. 은행에서 왕창 대출을 받아 집값 곤두박질치는 서울 아파트를 덜컥 샀으니 말이다. 그래도 지 팔자려니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이제는 내 팔자까지 옭아매려 하나 보다. “그래서 말인데요….” 올 것이 왔다. “아버지 가지고 계신 밭, 어차피 물려주실 거면 이번 기회에 팔아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송편 씹던 다른 두 아들이 잽싸게 끼어든다. “아니, 여기 빚 없는 사람도 있나?” “이왕 나눌 거면 정확하게 삼등분하자고.” “니들이 뭔데 나누니 마니냐, 내가 장손인데.” 나는 한마디도 안 했건만, 아주 땅 팔아먹을 기세로 싸운다. 부엌에서는 며느리들의 언성이 높아만 간다.
A: 한가위는 길다. 정색할 얘기는 나중에.
소비자 문제 연구소인 ‘컨슈머리서치’는 2010년 한가위를 앞두고 미혼·기혼 남녀에게 한가위에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많은 대답으로 ‘친지의 취업·퇴직·입학·결혼·이혼·작고 등 근황’(63.7%)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직장·가족·돈 문제 등 개인 신상이나 고민’(17.7%)이라는 응답도 많았다. 대부분 가족의 성공담 아니면 실패담이었다. 그러니 재산 분할처럼 답 없는 민감한 얘기 안 나오기 힘들다. 그럴 바에는 올해엔 가수 싸이의 미국 진출 성공담을 이야기하며 말춤이라도 춰보자. 한가위 아니더라도 땅 주인이 준비됐을 때 얘기 들어도 늦지 않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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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뒤늦는 처가행에 아내가 뿔났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성당 신부님 말씀 아니시다. 민족 고유의 명절은 평화가 집중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시댁이라는 1차 관문을 어렵게 뚫고 2차로 이어지는 처가 방문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평화로운 ‘멘탈’을 유지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얼마나 명료한 구호인가. 하지만 ‘설날은 시댁에서, 추석은 처가에서’ 따위의 명절 국민 행동 강령은 없다. 그래서 더 문제다. 결혼 전 이 헛된 공약을 남발하고 후회하고 있는 남편들에게는 두 배로 평화를 기원한다. 진심으로.
쥐꼬리만큼 오른 월급만큼이나, 올해 한가위 연휴도 참 박하다. 연휴가 시작하자마자 시댁발 전화가 울린다. “(우리 아들 보고픈데) 어디쯤 왔니?” “어머님, 방금 출발했어요. 길이 좀 막히네요.” 출발도 안 했다. “(우리 아들 보고픈데) 부지런히 와라. 와서 점심 먹어야지.” 아내의 상냥한 목소리, 그리고 굳은 얼굴. 운전대에 식은땀이 찼다.
시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며느리들은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아내는 퀭한 눈빛을 한 채, 미소를 띠고 있다. 어색한 입가는 ‘연휴에 해외여행 가는 가족도 많다던데 도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냐’며 말하는 듯하다. 텔레비전 보다 나도 모르게 웃다가 아내의 싸늘한 시선과 눈이 맞았다. 리모컨에 식은땀이 찼다.
이라는 영화가 있다면, 아내에게는 라는 한가위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 아들 더 보고픈데) 점심은 먹고 가라”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지 못하면서, 이틀 동안 애써 지켜온 평화가 깨졌다. 뒤늦게 처가로 향하는 길에서 아내가 뒷목을 잡고 사자후를 뱉어냈다. “너네 집만 한가위고, 우리 집은 뭐 반가위냐?” 시댁에 머문 시간은 25시간. 처가에도 24시간은 있을 텐데, 이 반응은 뭐지? “그럼 내년 설에는 처갓집부터 먼저 가지 뭐, 됐지?” 또다시 아내가 사자후를 내뱉었다. 영문도 모른 채 운전대에는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A: 남편이 ‘을’의 자세로 임하세요.
평화는 깨졌다. 그런데 아내가 뿔난 건, 뒤늦은 처가행 때문이 아니다. ‘시댁→처가’냐, ‘처가→시댁’이냐의 순서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한가위 오전 노동 스트레스의 최고점으로 치달은 아내의 상황을 무시한 채, 점심 식사에 “무조건 고”를 외쳤기 때문이다. 물론 명절의 고통은 관습에 얽매인 모두가 느낀다. 대상FNF가 최근 주부·블로거에게 ‘한가위 스트레스’에 대해 물은 설문조사를 보면, 가장 많은 응답자가 ‘과도한 가사노동’(38%)을 꼽았다. 그러나 야후미디어가 2009년 기혼 남성들에게 한 설문조사에서는 ‘어색한 대화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점’(61.4%)을 ‘명절, 처가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점’으로 꼽았다. 고민의 강도가 너무 다르다. 이쯤 되면 남편들은 사흘 남짓 짧은 연휴 동안 뒷감당 못할 도발 행위는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명절을 시작하며 이렇게 되뇌자. 저는 아들이 아니무니다. 저는 입이 없스무니다. 그것이 평화의 지름길.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명절 동반짜증, 동반분노 경보
누군가 ‘타임아웃’ 선언해라
“명절에는 명절에만 충실해라.”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의 충고는 간단하다.
1년에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은 설과 추석, 두 번에 불과하다. 김 소장은 “가족 모두가 모이는 만큼 모두의 감정도 모이게 된다”며 “문제는 그 사람들의 감정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고 했다. 그동안 쌓인 감정, 불만, 차별 의식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위험하다.
며느리들에게는 친정보다 시댁에 먼저 가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시댁에 가서도 남자들은 술 마시고 일은 여자들만 하는 역할 갈등이 커진다. 며느리들 사이에서도 동서 갈등이 벌어진다. 어느 동서는 일은 안 하고 선물만 사와도 칭찬을 받는다. 열심히 일한 맏며느리에게는 수고했다는 인사도 없다. 형제 사이에 서열 갈등도 벌어진다. 맏이로 태어났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다른 아들이 맏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에는 며느리들의 서열도 달라진다. 맏며느리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시댁이나 처갓집에서 끙끙 앓거나 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또다시 부부싸움으로 번진다.
재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모가 단호해야 한다. 부모는 나중에 재산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다 세워놨는데, 자식들이 “미리 달라” “빌려달라”며 머리를 쓰기 시작하면 ‘자기 몫’을 두고 자식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난다. 김 소장은 “이럴 때는 ‘나는 쓸 만큼 쓰고 사회에 환원하겠다’ ‘누구에게는 얼마를 주겠다’는 식으로 부모가 아예 싹을 잘라버리라”고 충고했다.
김 소장은 명절 때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 누군가 ‘타임아웃’을 선언해줘야 한다고 했다. 예민한 문제가 불거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반드시 해결을 보려 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누가 옳은지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식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가족들이 자기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기대가 틀어지면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가족은 움직이는 모빌과 같다. 약간만 움직여도 전체가 다 움직인다. 한 사람의 짜증과 분노가 동반짜증, 동반분노 상황을 가져온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타임아웃이다. 가족 중 제3자가 음식을 내오거나 대화 주제를 바꾸는 식으로 말싸움을 끊어내야 한다. 김 소장은 “명절에 불만을 오픈하지 말라. 그 전에 풀어내거나 명절이 지나고 시간을 가진 뒤 풀어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가위를 앞두고는 고부 갈등 상담이 많이 들어온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고 여행을 가겠다는 상담이 많다. 정말로 갈등을 풀기 힘들다면 시부모에게 ‘이런 점은 너무 힘들다’고 ‘호소’를 하는 것이 좋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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