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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 넘어 ‘통합’으로

분양·임대 가구 한 단지에 함께 섞은 ‘소셜믹스’… 위화감 낮추려면 자치조직· 커뮤니티 활동 등 일상 접촉 기회 늘려야
등록 2012-09-21 14:17 수정 2020-05-03 04:26
철조망은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가로지른다.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그 철조망을 바라보며 학교에 간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의 날카로운 울타리 모습. 한겨레 류우종

철조망은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가로지른다.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그 철조망을 바라보며 학교에 간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의 날카로운 울타리 모습. 한겨레 류우종

박승권(43·가명)씨는 서울 종로구의 국민임대아파트에 산다. 거실에 방과 욕실 하나가 딸린 13평(42.9㎡)형이다. 4년간 세들어 살던 마포구의 다세대주택이 2003년 재개발로 헐려 입주 자격을 얻었다. 입주 당시 보증금 1120만원을 SH공사에 납부한 뒤 지금은 매달 월세 14만원과 관리비 5만원 정도를 낸다. 그가 사는 곳은 영구임대아파트와 달리 일반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가 함께 있는 혼합단지다. 전체 1500여 가구 가운데 임대는 600가구가 조금 안 된다. 다만 동이 다르고, 단지 출입구도 따로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논의된 공동주거의 역사

좁고 설비도 열악했지만 도심과 인접하고 지하철역이 가까워 부부가 생활하기엔 딱히 불편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걱정거리가 생겼다. 요즘 들어 부쩍 “이사 가자”는 말이 잦아진 초등학생 딸(10) 때문이다. 임대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을 다닐 때만 해도 누구보다 활달했던 딸이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뒤 웃음과 말수가 부쩍 줄었다. “학교 가기 싫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도 했다. 최근엔 방과 후 수업을 마친 뒤 혼자 운동장에 남아 20~30분씩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경우도 잦아졌다. 딸은 “친구들한테 임대 단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싫다”며 눈물을 떨궜다. 박씨 부부는 올해 말 재계약을 앞두고 있다. 관리사무소에선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니 계속 사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딸을 떠올릴 때마다 심란하다. “전세금 폭등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과연 최선일까 싶다.”

박씨가 사는 곳처럼 분양과 임대 가구를 하나의 주거단지에 함께 배치해놓은 경우를 ‘소셜믹스’(Social Mix)라고 부른다. 소셜믹스 개념이 도입된 혼합단지 아파트는 영구임대아파트처럼 저소득 임대 가구만을 대규모로 밀집시켜놓을 때 발생하는 입주자의 소외감과 단지의 슬럼화 등을 완화하려는 정책적 고려에서 탄생했다. 다양한 계층이 한 단지 안에 적절히 섞여 살게 함으로써 저소득층의 자활 의욕을 높이고 사회적 통합 효과를 거두겠다는 취지다. 한 단지 안에 임대동과 분양동을 구분해 혼합 배치하는 방식(동별 구분형)이 가장 일반적인데, 최근에는 같은 동 안에 임대와 분양 가구를 함께 배치하되 층과 라인을 분리하거나(계통 혼합형), 같은 동 안에 무작위로 혼합 배치하는 경우(무작위 혼합형)도 늘고 있다.

소셜믹스 개념은 새삼스런 게 아니다. 공동주거의 역사가 오래된 영국에선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논의가 시작됐다. 1849년에 나온 제임스 실크 버킹엄의 ‘빅토리아 모델 타운’이 대표적이다. 그는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가로세로가 각각 1마일(1.6km)인 정사각형 부지에 직업과 소득수준이 다양한 주민 1만 명이 모여사는 주거단지 구상을 선보였다. 여기엔 각자 직업에 종사하며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적 악덕(하류층의 나태와 빈곤, 부유층의 탐욕과 이기심, 빈부 격차에 따른 갈등과 위화감 등)을 해소하겠다는 이상이 담겨 있었다. 한 아파트 동에 다양한 계층의 가구가 모여사는 것도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 이란 책에 묘사된 1853년 한 4층짜리 아파트의 단면도를 보면 층에 따라 입주 가구의 신분과 생활수준이 제각각이었다. 치장한 가구와 실내장식의 화려함으로 미뤄 2층→3층→4층→1층→다락층 순으로 거주자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력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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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638F03">한 단지 안에 임대동과 분양동을 구분해 혼합 배치하는 방식(동별 구분형)이 가장 일반적인데, 최근에는 같은 동 안에 임대와 분양 가구를 함께 배치하되 층과 라인을 분리하거나(계통 혼합형), 같은 동 안에 무작위로 혼합 배치하는 경우(무작위 혼합형)도 늘고 있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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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단지 모범된 서울 은평뉴타운 1지구

혼합단지 아파트가 국내에 도입된 것은 1990년대 초다. 문제는 계층 간 통합 효과가 애초 기대만큼 두드러지지 않다는 점이다. 2010년 토지주택연구원이 LH공사 혼합단지 2곳과 SH공사 혼합단지 4곳 입주자를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SH 단지 분양 입주자의 57.4%와 임대 입주자의 52.3%, LH 단지 분양 입주자의 72.6%와 임대 입주자의 35.8%가 혼합단지 운영에 부정적인 것으로 나온다. 반대 이유로는 ‘빈부 간 서로 불편’(분양 16.4%, 임대 46.7%), ‘부정적 선입관’(분양 34.5%, 임대 21.7%), ‘집값 하락’(분양 25.5%, 임대 6.7%), ‘자녀에 악영향’(분양 15.5%, 임대 20.0%) 등을 꼽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임대 입주자들 가운데 ‘빈부 간 불편’을 혼합단지에 부정적인 이유로 꼽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계층이 집단 대 집단으로 접촉하자 상대적 수혜자인 하위 계층마저 새로운 갈등 환경에 노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모든 혼합단지 아파트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서울 은평뉴타운 1지구의 사례를 분석한 이혜진씨의 연세대 석사학위 논문(261 표본)을 보면, 이사 전에 비해 혼합단지에 대한 입주민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임대 가구를 상대로 한 5점 척도 조사에서 긍정적 인식 변화가 두드러진다(혼합동 임대 가구 3.68→3.96, 임대동 임대 가구 3.36→3.73). 분양 가구의 경우 이사 뒤 혼합단지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했는데, 통계적 유의미성을 가질 정도는 아닌 것으로 조사됐다.

은평뉴타운 사례가 주목받는 것은 단지 설계에서부터 주민 통합을 위한 공간적 장치를 적극 도입했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1지구는 임대 가구 비율이 높고(임대 1699가구, 분양 2816가구) 다양한 평형(10~60평형대)이 혼합돼 있는데다, 임대와 분양을 하나의 동 안에 무작위로 배치한 비율이 전체 임대 가구의 절반에 육박한다. 아울러 임대 거주자와 분양 거주자의 일상적 접촉 기회를 늘리려고 커뮤니티링, 생활가로, 중정형 구조, 가로형 상가 등이 혼합단지로는 처음 적용됐다. 서대문구의 임대아파트에 살다 3년전 이곳으로 옮겨와 20평형대 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최상율(39·가명)씨는 “자녀 둘을 키우고 있지만, 거주동이나 라인으로는 분양·임대 여부를 알 수 없어 분양 가구와 심리적 거리나 위화감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혼합동의 30평형대 장기전세 거주자인 조영기(41·가명)씨는 “놀이터나 중정에서 아이들끼리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자치조직과 커뮤니티 활동 활성화돼야

하지만 분양 가구 입주자들의 혼합동(단지)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다. 혼합동 분양 가구의 경우 ‘이사할 수 있다면 혼합동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68.4%에 이른다(혼합동 임대 가구는 10.0%). 입주가 시작된 지 4년이 채 되지 않아 분양 가구 거주자들의 인식이 개선되려면 더 많은 시간과 접촉이 필요하다는 진단도 있다. 전문가들은 생활공간에서 이뤄지는 피상적 대면을 넘어 소득·주거 형태가 다른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며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자치조직과 커뮤니티 활동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부와 지자체, 주민조직과 시민단체의 긴밀한 협조가 요청되는 대목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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