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때리고 따돌리던 아이들이 교내봉사 7일, 특별교육 이수 7일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 학교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성찰실’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처벌받는 걸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 2월1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16층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 대회의실에는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학교폭력 피해·가해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상담교사 등 20여 명과 둘러앉아 있었다. 교과부가 학교폭력에 대한 현장 이야기를 듣겠다며 마련한 간담회 자리였다. 이날 참석한 한 고교 3학년 남학생은 자신이 겪은 학교폭력 경험을 이렇게 소개했다. 1시간30분 동안 이어진 간담회에서 학교폭력 피해학생들은 “학교폭력도 성인과 같은 기준으로 처벌해달라” “가해학생을 만날 수 없도록 격리해달라”는 등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다.
‘가해자 엄벌’에 초점 맞춘 정부
같은 날 오전 11시30분. 대구 범어동에 있는 대구지방법원 별관 5호 법정에서는 14살의 앳된 중학생 2명이 피고인 석에 섰다. 이날 재판은 지난해 말 대구에서 중학생 권아무개(14)군이 자살한 사건과 관련해 권군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괴롭힌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로 구속 기소된 서아무개(14)군과 우아무개(14)군의 첫 공판이었다. 이들은 재판에서 검사의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재판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2월20일 서군은 단기 2년6개월에서 장기 3년6개월을, 우군은 단기 2년에서 장기 3년을 선고받았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닥친 지난겨울, 연일 이어지던 충격적인 학교폭력 사건으로 전국은 꽁꽁 얼어붙었다. 대구와 광주 등 전국에서 주변 학생들의 시달림을 참다 못한 중·고등학생들이 줄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난 탓이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학교폭력 문제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며 “종합적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고, 2월6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정부 차원에서 마련한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처벌보다 예방, 규제보다 자율 책임을 앞세우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언과 달리 실제론 학교와 교사의 처벌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적극 반영했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즉시 학교장이 가해학생의 출석 정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1년에 30일이던 출석 정지 기간 제한도 풀었다. 또 학생들이 학교폭력에 경각심을 갖게 하겠다며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이하 학폭위)의 징계 결과를 가해학생의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뼈대로 삼았다.
그러나 정부가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내놓은 지 6개월이 흐른 지금, 학교폭력 정책은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최근에는 종합대책에서 언급한 학폭위 징계 결과의 학교생활기록부 반영 시행을 두고 교과부와 일부 시·도 교육청이 갈등을 빚어 학교 현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게다가 정부가 학교폭력을 엄단하겠다며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데도, 올해 상반기 학교폭력 피해로 목숨을 끊은 초·중·고교생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 때문에 과연 ‘가해자 엄벌에 초점을 맞춘 정부의 학교폭력 예방이 적절한가’라는 논란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졸업 뒤 5~10년까지 학교폭력 기록 보존
정부가 종합대책을 통해 권한을 강화한 학폭위는 법에 따라 전국 초·중·고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자치기구다. 학교폭력 가해·피해 학생 사이의 민형사상 분쟁을 조정하고, 피해학생에게는 심리치료 등 구제 활동을, 가해학생에게는 사회봉사부터 퇴학 등의 조처를 취할 수 있다. 2004년 4월 당시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교폭력예방대책법 시행령’을 입법 예고하며 만든 학폭위는 법에 따라 전국 초·중·고교에 교사·학부모·법조인·지역경찰 등 5~10명으로 구성해야 한다. 학폭위는 그동안 큰 구속력이 없던 기구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번 종합대책을 통해 지난 3월1일부터 가해학생의 학폭위 징계 결과를 학교생활기록부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 기록할 수 있게 돼 권한이 강화됐다. 교과부는 또 학폭위 결과의 구속력을 높이려고 기재 사항을 초·중학교는 졸업 뒤 5년, 고등학교는 졸업 뒤 10년까지 보존하도록 했고, 기재한 내용은 학생 이해와 지도 및 상급학교 진학시 자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14살인 중학교 2학년 학생의 경우, 올해 학폭위에서 징계를 받게 되면 20살까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이 유지되는 셈이다. 학폭위가 가해학생에게 내릴 수 있는 단계별 조처로는 사과, 접촉 금지, 학급 교체, 전학, 학교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 이수, 심리치료, 출석 정지, 퇴학(고등학교) 등이 있다.
교과부가 ‘강력한 카드’를 꺼낸 배경에는 그동안 학폭위가 ‘종이 호랑이’처럼 제 구실을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폭위 심의 횟수가 초·중·고교 교육정보 공시 사이트인 ‘학교알리미’에 공개되자 ‘학폭위가 자주 열리는 학교는 학교폭력이 많은 학교’라는 인식이 생겨 일선 학교에선 구속력도 없고 사건 해결에 큰 효과를 보기 힘든 학폭위 개최를 꺼려왔다. 학교알리미 공시 자료를 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전국의 학폭위 평균 심의 건수는 학교당 고등학교 1.32건, 중학교 2.26건, 초등학교 0.06건으로 학교폭력이 만연한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 탓인지 학교폭력 피해자 학부모단체에서는 교과부의 조처를 환영했다. 대다수 학부모단체들은 학교폭력을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실제 정부의 종합대책 발표 뒤 학폭위 개최 횟수가 크게 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합대책이 처음 적용된 지난 1학기 동안 각 지역(세종시 제외)에서 학폭위가 열린 평균 횟수는 초등학교가 1.5회, 중학교 2.6회, 고등학교 2.1회로 최근 2년 가운데 가장 높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폭위 결과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된 규모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관내의 경우, 3월1일부터 5월 말까지 초·중·고교생 742명의 학폭위 결과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됐으며, 대전·충남교육청 관내에서 지난 3월1일부터 6월 말까지 넉 달 동안 660명의 초·중·고교생이 기재 대상이 됐다. 대구 지역은 더 많다. 대구시교육청 관내에선 3월1일부터 7월 말까지 1700여 명의 초·중·고교생이 학폭위에서 학교폭력 행위로 처분을 받고 기재 대상이 됐다. 대구시교육청 관계자는 “다른 지역보다 인원이 많아서 개인적인 피해를 받는 학생이 많다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관내 초·중·고교생이 38만 명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 학부모들 “인권위 온정주의”
그러나 학폭위 결과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아직 미성숙한 10대 학생들을 처벌해 진학 등에서 현실적인 불이익을 받게 하는 것 자체가 ‘생활 교육’의 취지와 어긋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10살 이상 14살 미만인 소년이 적용받는 소년법에도 장래 신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소년원 경력의 공표를 금지하고 있으며, 형사범죄로 소년원 교육을 받은 경우라도 학생부에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3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교과부 장관에게 권고한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인권위는 “기록이 장기간 유지되는 점 때문에 입시 및 졸업 뒤 취직 활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한두 번의 일시적인 문제행동으로 사회적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점 등을 볼 때 과도한 조처라고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교과부는 지난 6월 훈령을 통해 고등학교의 기재 기간을 5년으로 낮춘 점 등을 들어 인권위 권고를 사실상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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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권위의 권고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진 않다. 학교폭력 피해자 학부모단체에서는 인권위의 권고가 지나친 ‘온정주의’라고 반박한다. 조정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회장은 “가해학생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권이 대립했을 때는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가 우선돼야 한다”며 “성범죄자의 인권을 제한하거나, 가정폭력의 경우 남성에게 ‘접근 제한’ 명령 등을 내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경남 지역의 고교 1학년 강아무개(16)양도 “가해학생에게 좀더 책임을 부여해 경각심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필요한 조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학폭위 결과의 학교생활기록부 기록에 따른 부작용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중학교 학생부장을 맡고 있는 교사 김아무개씨의 경우가 그렇다. 학폭위 간사를 맡고 있는 그는 교과부 지침이 적용되는 지난 3월부터 모두 세 차례 학폭위를 열어, 위원들과 함께 학생 3명에게 전학 조처를 내렸다. 그러나 그는 “3명이 모두 초등학교에서 학교폭력에 대한 교육을 상세히 받지 못하고 진학한 중학교 1학년이었다”며 “학교폭력에 대한 개념이나 심각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학교생활기록부에 가해자로 남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아이들조차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교육으로 바로잡을 기회를 잃어버린 셈이 됐다”고 덧붙였다.
1995년 이미 시도했다 폐기한 정책
사실상 ‘재판부’ 구실을 하는 학폭위를 통해 잦은 징계를 내리자 그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는 학부모와 학교 사이의 분쟁도 잦아지고 있다. 자녀 진학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자 행정심판 등 소송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다. 지난 7월 서울 강남구의 한 중학교에서 내린 학폭위 결정을 둘러싼 논란을 보자. 당시 한 교실에서 말다툼을 벌이며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학생 4명이 학폭위를 통해 ‘서면사과’와 ‘사회봉사 3일’ 등의 조처를 받았다. 그러나 가해학생들은 “실수로 안경을 밟은 학생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했던 것”이라며 학교의 조처가 과도하다고 항의했고, 결국 가해 학부모는 관할 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심판에 나섰다.
학교 현장에서는 교과부의 정책이 애초 기대했던 학생들의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으로 승화하지 못하는 건 ‘피해학생 대 가해학생’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경기도 용인 지역의 한 중학교 2학년인 박아무개(14)군은 “학폭위 결과를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한다고 해서 교실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며 “오히려 학폭위에 회부될 만한 아이들이라면 그런 징계 자체를 무서워하지 않아 큰 효과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2년 전까지 학생부를 맡았던 전북 지역의 중학교 교사 양아무개씨는 “학폭위를 운영하다 보면, 피해학생과 학부모가 실제로 원하는 건 가해학생·학부모가 반성하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며 “모든 단계에서 피해 대 가해의 구도로 처벌 조처를 앞세우다 보면 정작 가해학생을 교육할 기회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현장에서는 성인 범죄를 넘어서는 수준의 심각한 학교폭력 가해 학생도 간혹 있다”며 “이런 아이들에게는 학교생활기록부 징계 기재로 그치기보다는 전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기관을 연결해주는 게 학교와 교과부의 역할일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부 기록이라는 징계 조처만으로 학교폭력에 대처하려 하기보다는, 사안의 경중을 가려 그에 맞는 교육적 처방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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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은 2000년대 들어 3번째 나온 대규모 학교폭력 대책이기도 하다. 역대 정부는 졸업식 폭력 난동, 폭력서클 등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불거질 때마다 학교폭력 관련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이전 정부들은 학교폭력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며 다양한 정책적 시도를 해왔고, 학교폭력예방대책법 등을 통해 ‘학교폭력=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려 했다. 사실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학폭위 결과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지침은 1990년대 중반에 이미 시도했던 정책이다. 김영삼 정부는 학교폭력이 심해지는 것을 막겠다며 1995년 12월 폭력학생의 징계 내용을 당시 ‘종합생활기록부’에 기재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비교육적이라는 비판이 높자 한 달 만에 폐기한 바 있다.
17년이 지난 지금 세상도 학생들도 많이 달라졌다. 그 17년 사이 한국 사회의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학교폭력도 은밀해지고 다양해졌다. 그런데 정부는 17년 전에 시도했다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포기한 정책을 다시 꺼냈다. 시대착오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태만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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