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의 여신관리본부장이던 김아무개씨는 2010년 7월 당시 이백순 행장에게서 지시를 하나 받았다. 신한은행이 과거 금강산랜드와 투모로에 대출을 해준 과정을 파악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대출 담당자들을 조사한 뒤 “무리한 대출이 아니었다”고 보고했다. 뜻밖에도 이 행장한테서 강한 질책이 돌아왔다. “너희들은 신상훈(당시 신한금융지주 사장)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 그는 곧바로 한 지역의 영업본부장으로 밀려났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신한은행은 신 사장을 횡령과 배임 혐의로 고소했다. 고소 내용엔 신 사장이 두 업체에 불법 대출을 사주했다는 혐의도 포함돼 있었다. 김씨는 그제야 이 행장이 신 사장을 고소하기 전 각종 비리를 모으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그런 지시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로 그에게는 ‘신상훈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결국 올 초 본부장을 연임하지 못해 회사를 떠났다.
언론 통해 노출된 회사 갈등
2년 전 신한금융그룹 내분 사태는 직원들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그룹의 2·3인자인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 행장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 상당수 직원들이 휘말린 탓이다. 둘이 서로 험담을 주고받는 사이 그와 관련된 업무를 하던 직원들은 저절로 편이 갈렸다. 한쪽에 유리한 진술을 한 직원은 다른 쪽에 적이 됐다. 직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네 편, 내 편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편이 갈린 이들은 지금까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직원들의 악몽은 2010년 9월2일 신한은행이 신 전 사장을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은행의 경영감사부는 신 사장의 비리 혐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부서의 직원들을 상대로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다. 한 달 새 70명이 넘는 직원이 강도 높은 내부 조사를 받았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검찰에 불려나가야 했다. 검찰 수사로 끝난 직원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에 들었다. 20명에 가까운 직원은 지난해부터 진행 중인 신 전 사장과 이 전 행장에 대한 공판에 불려나가 증언대에 앉아야 했다. 평범한 회사원인 이들의 발언은 언론을 통해 그대로 노출됐다. 극도의 부담을 느낀 일부 직원은 외부와 접촉을 끊었고, 일부는 휴대전화 번호도 바꿨다. 최고경영자들이 벌인 싸움으로 직원들의 삶이 한순간에 피폐해진 것이다.
그중에서도 직원들을 가장 괴롭힌 건 검찰이나 법원이 아니라 회사였다. 일부 직원들은 회사가 내부 조사를 벌이며 집요하게 추궁하고 압박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자신들이 신 전 사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분위기를 몰아갔다는 것이다. 당시 노동조합도 강도 높은 내부 조사를 중단하고 그 과정에 월권을 행사한 당사자를 징계할 것을 회사 쪽에 요구하기도 했다. 내부 조사를 받았던 한 직원은 당시 살벌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참고인 조사가 아니라 취조였다. 경영감사부가 은행 변호사들을 대동하고 녹취까지 하니까 굉장히 위축됐다. 내 은행 계좌를 뒤지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직원들한텐 책상을 발로 차기도 했다고 들었다. 무엇이든 찾아내려고 (관련 직원들을) 이 잡듯이 뒤졌다. 나중에 검찰 조사까지 받았던 직원들도 (내부 조사가) 가장 힘들었다고 하더라. ”
“당신 자식, 손자까지 부담 물리겠다”회사의 압박은 통했다. 부담을 느낀 직원들은 내부 조사와 검찰 조사에서의 진술을 뒤늦게 재판 과정에서 번복하기도 했다. 신 전 사장이 불법 대출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는 금강산랜드에 대한 컨설팅을 담당했던 김아무개씨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한 말이다. “나는 (고소한 뒷날인) 2010년 9월3일부터 피고인이었다. (신한은행 경영감사국 조사에서) ‘개인적으로 잘못한 게 있으면 사표를 내겠다’고 했더니 ‘금액이 많기 때문에 당신 자식, 당신 손자까지 경제적 부담을 물리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죄인이었다. 내가 낳지도 않은 내 아들, 손자까지 올바르게 살지 못하게 하겠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수많은 참고인이 (그렇게)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날 법정에서 검찰 조사에서 한 진술의 일부를 바꿨다.
이 전 행장 쪽에 불리한 진술을 한 직원들도 강압에 가까운 회유를 받았다. 신 전 사장이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15억여원 중 3억원을 이 전 행장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한 송아무개씨는 재판에서 “돈이 정치권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증언하며 “은행 관계자가 민감한 문제이므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말고 미국에 도망가 있으라고 했다”고 밝혔다.
직접 검찰 조사나 재판에 불려다니지 않은 직원들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도 회사 안에서는 그때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게 금기다. 동료들이 편을 나눠 싸우고, 이 모습이 언론에 생중계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너나 할 것 없이 멍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직원은 사내에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누구도 그때 이야기를 꺼내길 꺼려한다. 당시 상처를 워낙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다시 회자되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참담해했던 그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추슬러지긴 했다. 그래도 직원들 사이에선 일을 악화시킨 회사에 대한 원망이 있다. 사내 문화도 좀 바뀌었다. 직원들이 예전처럼 서로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 지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들 많이 위축된 것이다. ”
라 회장 영향력, 지금도 여전해직원들이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공식적으로는 내분 사태를 일으켰던 최고경영자들이 물갈이됐지만, 직원들 사이에는 이들이 여전히 회사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또다시 문제가 불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특히 신 전 사장 고소를 지휘한 배후로 알려졌음에도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라응찬 전 회장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게 회사 안팎의 평가다. 후임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도 지난해 3월 취임 때부터 ‘탕평 인사’를 강조하고 있지만, 인사 때마다 라 라응찬 전 회장의 측근들이 승승장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직원의 말이다. “이 전 행장은 재판 중이어서 힘이 없다고 해도 라 전 회장은 적어도 관련 인사를 직접 챙기는 걸로 소문이 나 있다”며 “(이 전 행장이) 재판에서 무죄를 받는다면 (라 전 회장의) 영향력은 더 확대될 수 있다. 재판 결과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분위기다.” 신한금융그룹의 권력투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직원들의 마음속에선.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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