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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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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 뺨치는 신한은행 복마전 시나리오

등록 2012-08-22 18:01 수정 2020-05-03 04:26

신한은행은 2010년 9월2일 신상훈(64) 당시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은행이 최고경영자를 고소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융계는 “충격적인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은행감사위원회 보고나 금융감독원에 대한 조사 의뢰 등 사전 절차도 밟지 않았다. 검찰은 3개월 뒤 신 전 사장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을 기소했고, 1심 재판은 2년 가까이 진행 중이다. 신한은행이 신 사장을 전격 고소한 배경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그 실마리가 드디어 풀렸다. 당시 이백순 신한은행장 비서실에서 작성한 ‘시나리오’의 일부가 8월17일 법정에서 공개된 덕이다. 20여 개의 시나리오 전문을 입수한 은 2년 전 신한은행 상황을 재구성했다.

신한은행이 2010년 9월10일 신상훈 당시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고 나흘이 지난 9월14일 서울 중구 태평로2가 신한은행 본점에서 임시이사회가 열렸다. 신상훈 사장의 해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물을 마시는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뒷모습이 보이는 가운데 신 사장(왼쪽에서 첫번째)과 이백순 신한은행장(오른쪽에서 첫번째)이 나란히 앉아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신한은행이 2010년 9월10일 신상훈 당시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고 나흘이 지난 9월14일 서울 중구 태평로2가 신한은행 본점에서 임시이사회가 열렸다. 신상훈 사장의 해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물을 마시는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뒷모습이 보이는 가운데 신 사장(왼쪽에서 첫번째)과 이백순 신한은행장(오른쪽에서 첫번째)이 나란히 앉아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순조롭지 않았던 배임·횡령 혐의 입증

2009년 4월 라응찬 신한지주 회장은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소환됐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차명계좌로 관리해온 50억원을 건넸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차명 거래를 확인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사건을 덮었다. 2010년 3월 라 회장은 4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라 회장의 실명제 위반 혐의를 다시 제기했다. 사실로 드러나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로서 라 회장은 적격성에 타격을 입게 된다. 현행법에 금융회사 임원은 “신용질서를 해칠 우려가 없는 사람”이라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라 회장 쪽은 다급해졌다. “라 회장의 실명제 조사 역시, 라 회장에 대한 흠집내기 일환이며, 신 사장이 외부 세력과 협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한그룹의 ‘큰 어른’인 이희건 신한지주 명예회장과의 면담 설명 자료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신상훈 사장 내몰기 시나리오가 시작됐다. 이백순 행장은 2010년 7월 중순부터 비서실과 여신관리부, 경영감사부의 일부 직원을 동원해 신 사장 관련 자료를 긁어모았다. 신 사장의 2007∼2008년 기부금 거래 내용을 뒤지고 2006∼2008년 관련 대출 10건을 분석했다. 이 중 금강산랜드와 투모로라는 업체가 눈에 띄었다. 첫 번째 카드, 배임이었다.

하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여신사후관리를 맡은 김아무개 부장이 두 업체에 대한 대출은 영업 논리로 진행됐고 신 사장의 부당한 지시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백순 행장은 “제대로 보고를 안 한다”며 질책했지만 김 부장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여신관리부장이 바뀌었고 이아무개 신임 부장은 신 사장이 행장으로 재임할 때 친·인척 관련 업체에 950여억원을 부당 대출해 회사에 800억원의 손실을 끼쳤다는 배임 혐의를 만들어냈다.

검찰은 2010년 12월 기소하며 부당 대출 규모를 265억원이나 줄였다. 실제로는 438억원인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엔화 대출의 평가액이 급증한 것이었다. 고소인은 금융위기를 신 사장의 책임으로 돌렸던 셈이다. 또 검찰 조사 결과, 대출을 받은 업체는 신 사장의 친·인척도 아니었다. 다만 검찰은 ‘내부 컨설팅을 해 자료를 조작하고 대출 심사 자료로 사용하게 했다’며 배임죄로 인정했다.

재판에서 신한은행 관계자들이 검찰 진술을 바꿨다. 신상훈 사장의 압력이나 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증언한 것이다. 법정 증인으로 출석한 신한은행 컨설팅팀장 김아무개씨는 말했다. “이백순 행장이 부풀려진 컨설팅 자료를 통해 부당 대출이 이뤄졌다고 발표한 뒤 은행경영감사부는 200억원대의 부당 대출에 가담한 죄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우리를 조사했다. 신 사장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라는 압력을 받아 문답서를 작성했다. 일주일 뒤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같은 내용을 뒤집을 수 없었다. 실제로는 정상적인 컨설팅이었다.”

두 번째 혐의인 횡령도 시나리오 그대로다. ‘2005∼2009년 이희건 신한지주 명예회장에게 자문료 명목으로 15억6600만원을 지급한 것으로 꾸며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검찰이 고소장에 적은 신 사장의 혐의다. 이백순 행장이 고소한 내용과 일치한다. 하지만 신 사장 쪽은 이 명예회장과의 경영 자문 계약은 라 회장의 지시로 2001년부터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문료는 명예회장 의전 업무를 맡은 행장의 비서실장이 관리했고 신 사장이 행장으로 일하던 2005년부터 2009년까지는 실제로 명예회장이 자문료 8억4600만원을 썼다는 근거 자료를 법정에 냈다. 나머지 7억1600만원 중 2억1600만원으로는 행장 법인카드로 선지급한 명예회장의 경조사비 등을 메웠고 5억원은 라응찬 회장의 지시로 다른 데 사용됐다.


검찰은 2010년 12월 기소하며 배임 혐의에 적용한 부실 대출 규모를 265억원이나 줄였다. 실제로는 438억원인데 고소인이 엔화 대출의 환차손까지 끼워넣었기 때문이다. 또 검찰 조사 결과, 대출받은 업체의 대표는 신 사장의 친·인척도 아니었다.

갑자기 떠오른 3억원, 이상득에게?

반면 시나리오에는 2005년부터 자문료가 소액 분할 인출됐고 이 명예회장의 입금 계좌도 변경돼 조직적이고 치밀한 자문계약서 조작과 비자금 횡령이 이뤄졌다고 적혀 있다. 자금세탁 등 범죄적 방법으로 비자금을 빼돌렸다는 얘기다. 신 사장을 고소하기 하루 전날인 9월1일 이희건 명예회장을 직접 찾아가 확인서를 받아오는 각본도 만들었다. 확인서 내용은 이렇다. ‘본인(이희건 회장)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신한은행과 자문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없으며 자문료를 수취한 사실도 없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보이스 펜으로 녹취할 계획이었다. 신 사장의 횡령과 관련 없다는 점을 입증해야 이 명예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압박 논리도 준비했다. 또 신 사장의 개인 비리로 사건을 몰고 가야만 은행이 산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고 이 명예회장은 2011년 3월 사망했다.

라응찬 전 회장의 지시로 이상득 전 의원에게 불법 정치자금 3억원이 건네졌다는 증언이 나왔다. 3억원의 자금을 조성해 전달하는 데 참여한 행장 비서실 직원의 입을 통해서다. 2008년 1월 하순 이백순 당시 신한지주 부사장이 경영자문료를 관리하던 박아무개 신한은행장 비서실장에게 전화했다. “라 회장의 지시니까 외부 인사에게 건넬 현금 3억원을 마련하라.”

금융정보분석원(FIU) 추적을 피하려고 2천만원 미만으로 일주일간 여러 차례 인출해 현금 3억원을 준비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을 일주일 앞둔 2008년 2월19일 오후 업무 시간에, 이백순 부사장이 내일 새벽 6시까지 서울 중구 장충동2가 남산자유센터 웨딩홀 주차장으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도착해보니 이 부사장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회색의 중형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 부사장이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손짓했다. 돈가방을 그 차로 옮겨싣자 40대 초반의 남성이 신라호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3년쯤 지나 신한은행이 신 사장을 고소하며 3억원이 다시 물 위로 떠올랐다. 신한은행이 고소한 횡령 사건에 3억원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배달한 박 전 실장은 일본 도쿄에서 일하고 있었다. 2010년 10월13일 신한은행 관계자가 찾아왔다. “3억원은 모르는 것으로 해라. 그 돈은 SD(이상득 전 의원)에게 갔다. 변호사랑 얘기가 됐다.” ‘3억원에 대해 모르고 남산자유센터에 간 적도 없다’는 진술서를 내밀며 도장을 찍으라고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이백순 행장은 부인한다. 그런 지시를 하지 않았고, 돈가방이 건네진 장소에도 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3억원의 전달에 이 행장이 관여했다고 보고 신 전 사장과 함께 그를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2010년 11월2일 서울중앙지검은 서울 중구 태평로2가 신한은행 본점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날 압수된 신한은행장 비서실장의 이동디스크(USB)에는 신상훈 사장 밀어내기 '시나리오'가 담겨 있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10년 11월2일 서울중앙지검은 서울 중구 태평로2가 신한은행 본점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날 압수된 신한은행장 비서실장의 이동디스크(USB)에는 신상훈 사장 밀어내기 '시나리오'가 담겨 있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깨알 같은 대사까지 적혀 있는 시나리오

고소 사건의 그림을 완성한 뒤 ‘라응찬-신상훈-이백순’ 면담 시나리오를 꾸몄다. 목표는 신 사장의 자진 사퇴 끌어내기였다. D-Day는 9월2일로 잡았다. 신 사장은 하루 전까지도 이런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면담 시나리오를 보면, “자진 사퇴가 최선의 방법이므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설득·회유해 (신 사장이) 결심할 수 있도록 해야 함”이라고 돼 있다. 사퇴 권고는 라 회장이 맡았다. “지난해부터 신 사장과의 문제로 말은 못했지만 수많은 시간을 고민과 슬픔 속에서 보냈다. 친형제보다 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우리가 이렇게까지 온 데는 서로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 이제 고민을 정리할 때라고 판단했다.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신 사장의 궤적을 나름대로 알아봤다. 더 이상 우리 조직에 둘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늘 사임해주길 바란다.”

신 사장이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이동하도록 돼 있다. 압박 강도는 ①친·인척 부실 대출에 따른 사직 권고 ②검찰 조사 임박 ③고소장 및 이사 해임 절차 착수 ④자문료 관련 공금 순으로 높인다. 라응찬 회장과 이백순 행장의 대사는 번갈아 나온다.

‘(라 회장-부실 대출 책임 설명) 최근 행장으로부터 당신의 부당 대출 관련 보고를 들었다. 취급 단계에서부터 개입하고 주도한 증거나 나타났다. 당신 개인 사업 대출이라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

(이 행장-사퇴 근거 제시)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노릇이고 앞으로 조직을 이끌어가야 하는 입장에서 오늘 감히 사장님께 사퇴를 요청드린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 단계에서 다시 한번 사퇴 의사 확인 후, 다음 단계로 이행)

(이 행장-검찰 조사 정보 전달) 검찰에서도 비리 혐의를 포착해 조사를 곧 시작한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병을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고 해외로 출국하는 게 현명한 처사가 될 듯하다.

(라 회장-사퇴 재차 권고) 인사 전횡과 파벌 조성 등 신한스럽지 못한 부분이 다수 있으나 그동안 말을 아껴왔다. 우리 사회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마지막 단계는 자문료 횡령으로 정했다. 신한은행장 비서실에서 관리한 돈이라서 라응찬 회장이나 이백순 행장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사퇴를 거부하면 고소장을 즉시 접수하고 언론사에 신 사장의 비위 사실을 통보해 해임 절차를 밟는 이사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한다’는 문구로 시나리오는 끝났다. 이백순 행장은 임원회의 발표 자료도 신 사장이 자진 사퇴할 때와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할 때의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했다. 2010년 9월2일 신 사장이 자진 사퇴를 끝내 거부했고 두 번째 시나리오가 현실화됐다.


신 사장이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이동하도록 돼 있다. 압박 강도는 ①친·인척 부실 대출에 따른 사직 권고 ②검찰 조사 임박 ③고소장 및 이사 해임 절차 착수 ④자문료 관련 공금 순으로 높인다. 라응찬 회장과 이백순 행장의 대사는 번갈아 나온다.

라 회장 ‘절만의 승리’ 거뒀지만

‘거사 후 시나리오’도 치밀하다. 여론에 따라 2일차 시나리오는 달라진다. 악화되면 주주, 이사, 정·관계에 적극 설명하고 신 사장을 고문으로 선임한다. 또 경제적 보상 등 유화책을 제시한다. 여론이 우호적이면 신 사장의 행태를 언론에 흘리고 신 사장 측근을 인사 발령하는 방안도 고려한다.

외부와의 접촉도 준비했다. 대상자로는 임태희 대통령실 실장,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 이사철 한나라당 의원 등을 꼽았다. 고소 내용을 설명하고 후임 신한지주 사장은 이백순 행장이 겸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반면 노조위원장과의 면담 시나리오에서는 “사장 자리 탐 안 난다”고 반대로 발언하기로 했다. 이 행장이 “개인적으로 30년 지기 형님을 고소했다. 속이 상해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고 말문을 열고 ‘권력 다툼 아닌가? 호남 차별 아닌가?’라는 예상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사실을 깊이 모르는 언론에서 쓰는 논리다. 이번 문제만 없었다면 (신 사장은) 차기 회장이 확실시된다. 내가 사장 자리 탐이 나서 사장님을 헐뜯었다면 권력 암투를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도 만족하고 소명의식을 갖고 신나게 일한다. 현행법을 어기는 비위 사실이 발견돼 검찰에 고발하지 않을 수 없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9월14∼15일에는 신한지주 이사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짰다. 목표는 신 사장의 ‘직무정지’로 정했다. 신 사장이 지위를 유지하면 고소인인 이백순 행장과 라응찬 회장이 불신임을 받는 것으로 해석돼 그룹 리더가 무너진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반면 해임안은 재일동포 이사들이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봤다. 직무정지가 최선책이었다. 신한지주의 재일동포 사외이사인 정행남 재일한인상공회의소 고문이 적극 중재안을 제안하도록 유도한다고 시나리오는 적고 있다. 실제로 신한지주는 9월14일 이사회를 열어 신 사장에 대한 직무정지안을 상정해 찬성 10표, 반대 1표로 통과시켰다. 반대표는 신 사장만 던졌다. 당시 라 회장 쪽의 ‘절반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왔지만 모든 게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권력 독점욕이 부른 공멸

예상치 못한 역풍이 불어왔다. 재일동포 주주 4명이 이백순 행장 해임청구 소송을 법원에 냈다. 신한지주 이사회 등 사전 절차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검찰에 고소하고 외부에 공개해 주주들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에서다. 라 회장의 금융실명제법 위반 논란과 관련해서도 국회에서 새로운 의혹이 터져나왔다. 금융감독원이 정기검사 때 확인하고도 라 회장의 4회 연임 도전에 하자가 될 수 있어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한지주와 신한은행의 최고경영자들 간 갈등이 고소·고발·소송으로 얽힌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자 동반사퇴론이 고개를 들었다. 10월30일 라응찬 회장이, 12월6일 신 사장이, 12월29일 이백순 행장이 잇따라 옷을 벗었다. 20년 경영을 이어온 라 회장의 장기 집권 체제가 권력 다툼 끝에 불명예 퇴진한 꼴이다. 권력 독점이 부른 화였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라응찬 전 회장 면죄부 의혹
상주 촌놈의 힘?
“수사 결과만 놓고 보면 신한금융지주는 시스템이 아니라 라응찬 회장 개인의 위세에 따라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2월29일 ‘신한 사태’를 마무리하는 수사 결과 브리핑에서 윤갑근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가 한 말이다. ‘신한 사태’의 중심에 라 전 회장이 있다는 검찰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검찰은 라 전 회장에게 면죄부를 줬다. 나머지 ‘빅3’인 신상훈 전 신한지주 사장과 이백순 신한은행장만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기소 처분을 내렸다. 특히 이백순 행장이 가져간 현금 3억원은 “라 회장의 지시였다”는 진술이 나온 상태였다. 3억원을 배달한 당시 신한은행장 비서실장 박아무개씨는 2010년 9월13일 검찰에서 전달 경위를 상세히 진술했다. 다음날인 9월14일 신한은행 이사회에서도 그는 3억원 관련 진술을 했다. 하지만 이백순 행장이 “3억원을 가져다 쓴 사실이 없다”고 부인해 라 전 회장까지 겨냥하지 못했다고 검찰은 주장한다. 이희건 신한지주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로 책정된 금액 중 2억원도 라 전 회장의 변호사 비용으로 썼지만 입증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며 검찰이 무혐의 처분했다. 결국 자금 전달을 지시한 라 전 회장은 기소하지 않고 보고받은 자(신상훈)와 배달자(이백순)만 처벌한 셈이다. 최근 3억원이 이상득 전 의원에게 건네졌다는 진술도 나왔지만 검찰은 “재수사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그뿐만 아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건넨 50억원도 재일동포 4명의 이름으로 차명 운영했지만 비자금으로 결론 내지 않았다. 이자와 함께 박 회장에 반환했기에 라 전 회장의 개인 투자금이라는 거다. 그래서 이 돈의 출구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검찰은 “금융실명제법 위반은 과태료 사안으로 형사처벌 법규가 없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에서 직무정지 3개월 상당의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그것도 신한지주 회장직에서 사퇴한 뒤였다.
당시 민주당은 국정감사에서 라 전 회장이 경북 상주 출신 모임인 ‘상촌회’(상주촌놈회)의 비호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은 “라 회장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상촌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그 멤버가 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 등 권력과 동일시되는 현 정권 실세”라고 말했다.

시나리오 어떻게 공개됐나
비밀은 비서실장 USB
2010년 11월2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는 신한은행장 비서실을 압수수색했다.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의 배임·횡령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희건 명예회장의 자문료를 인출해 사용한 내역 관련 자료 등이 주요 압수물이었다. 이날 뜻밖의 물건이 따라왔다. 신 전 사장을 검찰에 고소한 이백순 신한은행장의 비서실장인 변아무개씨의 이동디스크(USB)였다. 검찰은 1년6개월간 이 압수물을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신 전 사장 쪽은 검찰의 압수 목록을 훑다가 USB를 발견했다. 중요한 압수물임을 직감했다. 신한은행의 한 관계자의 말이다. “변씨는 이백순 전 행장의 최측근이다. 고소 직전인 2010년 7월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3억원을 이 전 행장에게 건넸다는 전 비서실장의 진술을 번복시키려고 회유책도 썼다.”
재판부에 요청해 신 전 사장 쪽은 지난 7월 USB를 검찰에서 넘겨받았다. 50여 개 파일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시나리오’라는 이름이 붙은 게 유독 많았다. 배임·횡령 사건을 설명한 스크랩, 라응찬·이백순·신상훈 면담 시나리오, 이희건 명예회장 면담, 고소 당일 시간대별 일정, 2일차 시나리오 등 20여 건이었다. 작성 일자는 신 전 사장을 검찰에 고소한 9월2일 직전에 몰려 있었다. 특히 변씨의 전임 비서실장이던 이아무개씨의 휴대전화를 무단으로 촬영한 캡쳐 화면도 나왔다. 9월14일 신한지주 이사회가 열리던 날, 이씨는 이백순 행장과 면담했다. 당시 한 부하직원이 휴대전화 서비스 변경이 필요하다며 잠깐 달라고 해서 건넸는데 도둑 촬영한 것이라고 했다. 신 전 사장 쪽은 “USB에서 나온 시나리오는 고소 사건을 기획하고 조작한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USB를 보관하다 검찰에 압수당한 변씨는 8월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당시 신한은행의 여러 직원들이 작성한 문서를 모아서 보관했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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