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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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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게, 이성형 ‘교수’

등록 2012-08-15 17:36 수정 2020-05-03 04:26
2008년 6월 이성형 교수에 대한 이화여대의 재임용 탈락 조처에 항의해 전국교수노동조합과 민주화를 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 이화여대 학생들이 교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제공

2008년 6월 이성형 교수에 대한 이화여대의 재임용 탈락 조처에 항의해 전국교수노동조합과 민주화를 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 이화여대 학생들이 교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제공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부산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금사동이다. 동네를 걷다 대학 동기인 친구 이성형을 우연히 만났다. 반가운 나머지 근처 선술집에서 지난 3년 동안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주제는 최근 읽은 경제학과 사회학 책 이야기부터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재밌다던 서울대 대학원 면접

이성형은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내가 다니던 부산대 상과대학 회계학과에 특차로 입학했던 친구다. 그런데 그는 회계학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취직 잘 된다는 경영학과 무역학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마 공인회계사를 목표로 입학했을 터인데 회계사 시험보다 경제학에 굉장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1년밖에 공부한 적이 없지만 명색이 나도 경제학도인데 그 친구가 그동안 읽은 주요 경제학 서적에 관해 듣고 있노라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미 폴 새뮤얼슨의 은 물론, 조앤 로빈슨의 과 , E. K. 헌트의 등 저명 경제학자들의 저술들을 원서로 줄줄 읽고는 자신이 느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아마 나와 경제학 토론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내가 전혀 실력이 안 되니 안타까웠을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실력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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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에서의 대화 뒤 얼마 안 있어 이성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 합격했단다. 그런데 면접이 재밌더란다. 자기는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공부해야 한다고 했더니, 면접 교수가 서울대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할 양이면 입학을 포기하라고 했단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 시름은 덜었지만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으며 그는 우수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박사를 마치고 라틴아메리카의 연구에 흥미를 느꼈는지 등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흥미롭고도 뛰어난 저술을 쏟아냈다. 등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소개하는 칼럼도 연재했다. 어느새 그는 라틴아메리카 연구의 권위자가 되어 있었다.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영민함과 실력을 갖춘 친구이니 그가 그런 권위자가 된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가 그런 훌륭한 업적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는 나의 은근한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양식과 합리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는 그가 좋은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하지만 내 기대는 번번이 무산됐다. 다른 이들은 그다지 특출해 보이지 않는 업적으로도 별 어려움 없이 교수직에 채용됐지만, 그에겐 좀체 기회가 오지 않았다. 설립 과정에서 이성형이 실무를 도맡았던 서울대 국제지역원만 해도, 채용된 교수들과 그의 연구 성과를 비교해보면 납득이 전혀 가지 않는다.

학계·제자 탄원에도 탈락은 철회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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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다. 같이 공부하던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연구자에게 그가 어떠냐고 물었다. “이성형은 교수는 절대 못 된다”는 비아냥 섞인 말을 그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과도한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취중 발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엔 분명 지방대 출신에 대한 무시와 편견이 가득했다.

2008년 어렵게 자리잡은 이화여대에서 쫓겨났을 때도 그랬다. 당시 그는 학생들로부터 가장 좋은 강의 평가를 받았고, 연구 실적도 900%를 넘겼다. 언론에 그의 일이 보도된 뒤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걱정해주고 있으니 잘될 것 같다고 했다. 지나치게 사태를 낙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이 학벌사회의 달콤한 꿀을 먹고 사는 무능한 인사들, 학벌이란 사회적 자본을 활용해 공생하는 마피아와 다를 바 없는 집단을 그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이화여대에선 그 사유로 “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학자”라거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대체 뭐가 안 어울렸단 말인가. 공부를 많이 한 게 안 어울렸을까, 지방대 출신이라 안 어울렸을까. 글로벌 스탠더드란 건 대체 또 뭔가. 나도 외국에서 공부했지만 형편없는 ‘글로벌’ 학위 논문도 많다.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이면 최고인가. 한국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 중 SCI 논문을 능가하는 것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외국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로 강의까지 한 사람이 글로벌하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글로벌하단 말인가. 학계와 제자들의 항의와 탄원에도 그의 탈락은 철회되지 않았다.

그 뒤 나의 일로 바빠 친구의 근황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주 신문에서 그가 세상을 떴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이 견고한 학벌사회에서 오직 실력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이 땅의 ‘학벌 마피아들’은 그의 실력과 노력을 폄하하고 조롱하며, 학벌이란 사회적 자본의 편익을 취하는 데 급급했다. 부정의한 학벌 카스트와 불합리한 교수 채용 시스템을 ‘능력주의’란 이름으로 옹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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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시스템 없는 곳에서 행복하길

이성형 교수. 나는 이성형에게 ‘그들’이 그렇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교수’라는 직함을 감히 붙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분노한다. 친구여, 지성을 억압할 뿐 아니라 대다수 인간들을 절망케 함으로써 자발적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학벌 시스템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기를 기원하네. 잘 가게.

추신: 나 역시 이성형과 마찬가지로 지방대 출신이다. 사람들은 서울대의 교수시장에 대해 말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래서 서울대 출신 교수의 말을 빌려 내 생각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성형 교수의 죽음. 서울대가 문제의 진원지다. …그는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현 국제지역원)를 처음 만들 때 모든 실무를 도맡아 한 사람이다. 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국제지역원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박사후 그곳에서 2년 정도 연구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노고를 매우 잘 안다. 그런데 서울대는 그를 내쳤다. 그는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 …학교와 전공을 바꿔 연구자의 길을 간 것이 그의 평생의 멍에가 되었다. 그의 학자로서의 탁월함과 실무적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수로 받아주지 않았던 전공교수들과 서울대라는 거대한 조직이 있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것 몇 마디 남기고 싶다.”(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페이스북)

한성안 영산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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