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 300조원 유지’.
이명박 정부가 2008년 집권하며 잡은 목표다. 이는 노무현 정부 말기의 국가부채 규모와 같다. 자신의 임기 내 빚을 한 푼도 늘리지 않고 다음 정부에 건전한 재정을 물려주겠다는 게 이명박 정부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 약속은 취임 첫해부터 깨졌다. 국가채무는 한 해도 쉬지 않고 늘어나 지난해 420조원을 넘어섰다. 공기업 등 다른 공공부문의 빚은 이보다 많다. 급증하는 민간부문의 빚을 어느 정도 흡수해온 공공부문마저 위험수위에 다다르면서, 막대한 빚의 무게는 온 나라를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다.
지자체 빚, 2007년 18조원에서 2010년 28조원
일단 나라 살림을 총괄하는 중앙정부부터 빚이 많다. 중앙정부의 빚은 지난해 말 기준 402조8천억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32.6% 수준이다. 집권 첫해인 2008년에만 해도 중앙정부 빚은 297조9천억원(GDP 대비 29.1%)에 그쳤지만 3년 만에 35%나 급증했다. 그나마 이는 보수적으로 잡은 수치다. 올해 국가회계에 새로 적용된 회계기준에 따르면 앞으로 공무원이나 군인연금 수급자에게 지급해야 할 ‘연금충당부채’까지 사실상 국가부채로 잡으면 빚은 774조원으로 뛰어오른다.
현 정부 들어 빚이 급증한 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이 컸다. 작은 정부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는 취임 이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지자 곧바로 재정지출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급격히 냉각되는 부동산 등 실물경기를 띄우려고 2009년에만 17조9천억원의 예산을 추가 편성하는 등 돈을 대거 풀어 대형 국책사업을 벌였다. 4대강 살리기 사업에만 22조원이 들어갔고, 보금자리주택사업은 정확한 사업비를 추정할 수 없을 정도다. 경기 활성화를 명목으로 대규모 감세도 있었다. 정부는 기업 투자 등 경기 활성화를 이유로 2008년 법인세·소득세·종합부동산세·양도소득세 등 주요 세율을 대폭 낮췄다. 재정지출이 늘어난 상황에서 세수까지 줄어들자 재정 적자가 쌓였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누적된 재정 적자만 81조4천억원에 이른다. 황성현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재정 수요가 가만히 있어도 늘어나는 상황이었는데 거꾸로 조세부담률을 낮췄다”며 “우파 정부니까 무작정 세금을 깎았다가 복지 등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빚만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지방정부의 빚이 늘어난 것도 중앙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동안 중앙정부의 통제로 대규모 사업을 참아왔던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에 편승해 철도·대교·도로 등 대규모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에 나섰다. 여기에 더해 지방정부들은 토지를 개발한 뒤 민간에 매각해 차익을 남기는 부동산 투자에도 열을 올렸다. 기준금리가 연 2.0%로 내려간 덕에 지자체들은 마음 놓고 지방채를 발행하고, 도시개발공사 등 지방공기업에 빚도 얻게 했다. 그러다 얼마 못 가 지방 부동산 경기가 고꾸라져 지자체는 빚더미에 앉게 됐다. 그 결과 지자체의 빚은 2007년 18조2천억원에서 2010년 28조5천억원으로, 지방공기업의 빚은 같은 기간 41조3천억원에서 62조9천억원으로 증가했다. 특히 인천시는 2009년부터 지방채를 발행해 아시안게임 경기장, 도시철도 건설 등 대형 사업에 무리하게 착수했다. 결국 10조원에 가까운 빚을 지고 파산 직전에까지 몰렸다. 서정섭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동산 경기가 악화되자 빚을 내 개발한 토지는 팔리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취득세 등 주요 재원은 줄었다”며 “여기에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복지사업 예산은 급증해 지방 재정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기획재정부 장관
그나마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공공기관 부채가 이미 정부부채 규모를 뛰어넘었다. 286개 중앙 공공기관의 빚은 2007년 249조3천억원에서 지난해 463조5천억원까지 급증했다. 이명박 정부가 주요 국책사업을 벌일 때마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듯 공공기관에서 돈을 끌어다 쓴 탓이다. 공공기관들은 ‘낙하산 사장’을 통해 정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수자원공사는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비를 대려고 8조원의 채권을 발행했다. 이 과정에서 2007년 1조5800억원이던 수자원공사의 빚(부채비율 17%)은 지난해 12조5800억원(116%)로 8배 늘었다. 이 밖에도 정부의 돈이 들어가야 하는 사업에는 어김없이 공기업이 동원됐다. 이명박 정부가 무리하게 보금자리주택 건설사업을 밀어붙인 탓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지난해에만 빚이 9조원 늘었고, 부실 저축은행 뒤처리를 맡은 예금보험공사도 부채에 13조원이 추가됐다. 한국전력공사·한국가스공사 등은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가격이 묶여 지난해에만 수조원씩 빚을 냈다. 하지만 공공기관의 이런 부채는 국가 재무제표에 잡히지 않는다. 연강흠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정부는 공기업의 부채를 편법으로 동원해 주요 사업을 벌이고, 위기 관리를 맡겼다. 이 과정에서 공기업의 수익성은 악화되고 부채는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공공부문 곳곳에 빚이 쌓이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 여유롭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월2일 취임 1돌을 맞아 언론과 인터뷰하며 “재정건전성 향상 노력이 신용등급 전망의 상향이라는 국제적인 평가로 이어졌다”고 자평했다. 정부는 한국의 재정건전성이 양호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다른 나라의 처지를 가리킨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이 계산한 지난해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보면 한국은 34.1%로 일본(229.8%), 미국(102.9%), 그리스(160.8%)에 비해 월등하게 낮다. 그러나 IMF가 집계한 국가채무에는 사실상 정부 영역인 공공기관의 빚이 모두 빠져 있다. 공공기관은 다른 국가에도 있지만 한국처럼 많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는 700개를 넘을 정도로 공공기관이 많을뿐더러, 이들이 직접적으로 정부의 정책 기능을 대리하고 있어 사실상 정부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700여 개 중앙·지방 공공기관과 중앙·지방 정부가 진 부채를 모두 더하면 938조1천억원으로 불어난다. 그러면 국가채무 비율이 75%까지 뛰어오른다. 유럽 재정위기의 한복판에 있는 스페인(68.5%)보다 수치가 높다. 통계의 마술이 가린 실상이다.
부동산 거품, 고령화와 결합하면?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에서는 ‘부채경제의 저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민간과 공공 부문이 빚을 번갈아가며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과 공공 부문의 빚이 이미 급증한 상태에서 부동산 거품까지 완전히 꺼진다면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다. 선대인경제전략연구소의 선대인 소장은 “일본은 1990년대 부동산 거품이 꺼져 엄청난 토건정책을 썼다. 여기에 급격한 고령화까지 맞이해 지자체는 파산하고 국가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됐다”며 “한국은 아직 부동산 거품이 남아 있는데다 고령화도 제대로 준비가 안 돼 있는 등 재정 수요가 많아 위태롭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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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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