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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력서는 얼마짜리입니까

24~31살 4년제 대학 졸업예정자 및 졸업생 대상 설문 결과, 이력서 평균가격 4212만원…
불안과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스펙 쌓기 쳇바퀴 도는 취업준비생들
등록 2012-06-01 10:40 수정 2020-05-03 04:26
서울 시내 한 대학교 교정에 내걸린 영어 특강 현수막 옆을 한 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

서울 시내 한 대학교 교정에 내걸린 영어 특강 현수막 옆을 한 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

시종일관 명랑하게 떠들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목이 멘 듯했다. 오윤지(25·가명)씨는 지난해 1월부터 8월까지 여섯 차례 응시했던 토익 시험의 기억을 털어놓고 있었다. 빠듯한 형편이라 학원엔 갈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점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서울까지‘토익 유학’을 가 점수를 훌쩍 올린 친구들을 보면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실연의 상처까지 찾아들었다. 극심한 슬럼프는 그렇게 시작됐다.

 

 못 채운 이력서 빈칸의‘공포’   

  오씨는 지난해 2월 지방 국공립대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애초 토익 점수가 취업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안정된 취업을 위해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사람을 여유롭게 해주는 숲이 좋았다. 산림청 및 산하기관, 임업 관련 회사에 들어가려면 토익 점수보다 자격증 취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3학년을 마친 이듬해인 2009년, 그는 1년간 휴학을 하고 본격적인 취업 준비에 나섰다. 꼬박 두 달간 집에 틀어박혀 산림기사·산림산업기사·사무자동화산업기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고3 때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자격증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뒤 스펙 가꾸기에 힘을 썼다.‘개나 소나 다 한다’는 청년 인턴에 지원했다. 지난해 6월부터 다섯 달 동안 주민센터 인턴으로 하루 8시간 동안 일했다. 주로 복사나 사무보조 같은 단순한 일이었다. 스펙 쌓기엔 봉사활동 경력도 필요했다. 인턴 일과를 마친 뒤 일주일에 세 번, 지역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살이 쪽쪽 빠졌다.

  오씨는 전공을 살려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전공 공부가 재밌었고 학점도 높았다. 그러나 원하는 곳의 신규 채용은 늘 한 자릿수였다. 서울 소재 대학 출신들과 경쟁하기도 버거웠다. 전공 관련 자격증만으로는 취업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토익 공부에도 뛰어든 건 이 때문이다.

  오씨의 이력서엔 이런 땀과 눈물이 밴 지난한 과정이 구구절절 담겨 있지 않다. 거두절미하고 토익 점수, 취득 자격증 등이 단 몇 줄로 나열돼 있을 뿐이다. 오씨는 지금껏 30군데에 이력서를 냈다. 서류전형 통과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대기업엔 아예 지원하지 않았다. 면접 기회를 얻은 건 그 가운데 열 번뿐이다. 취업의 기쁨은 맛보지 못했다. 오씨는 지금 영어학원에서 매달 80만원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루에 7시간 남짓 하는 파트타임이다. 사장님 말 한마디에 월급이 오락가락하는 불안한 일자리다.

  오씨의 스펙 쌓기, 그러니까 이력서 업그레이드는 지난해 슬럼프 이후 중단된 상태다. 수상 경력, 어학연수 경험 등 미처 채우지 못한 이력서의 빈칸은 공포 그 자체다. “스펙을 쌓아야 번듯한 직장을 구할 텐데….” 스펙 쌓기의 압박은 시도 때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오씨의 정신을 옥죈다. 오씨는 지금 우울하다.

  ‘스펙’(specification)이란 원래 제품 명세서를 뜻한다. 그 스펙이 한국 사회에서 구직자들의 능력을 가늠하는 단어로 쓰인 건 2000년대 초반부터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스펙은 구직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유일신이나 다름없다. 청년층은 스펙 쌓기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살고 있지만 구직난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오히려 사정이 더 나빠지고 있다. 지난 4월 한국노동연구원 금재호 선임연구위원이 발표한 보고서 ‘청년 취업난의 악화: 피해자는 누구인가?’를 보면, 18~29살 청년 취업자 규모는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특히 청년 고용률은 2004년 55.7%에서 지난해에는 51.9%까지 떨어졌는데, 이는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51.5%와 비슷한 수준이다.

  

 4212만원, 26개월치 임금 꼬박 모아야  

  바닥을 알 수 없는 취업난은 경쟁과 스펙 쌓기를 부추긴다. 악마의 맷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스펙을 쌓는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효과를 가늠할 길 없는 스펙을 진열하는 ‘이력서’ 한 장을 마련하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부와 땀, 눈물만 필요한 건 아니다. 때론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 얼마의 돈과 시간을 쏟아부으면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내팽개치지 않을 스펙이 담긴 이력서를 마련할 수 있나?

  ‘청년유니온’은 지난 4월 말부터 5월20일까지 4년제 대학 졸업예정자 및 졸업자 24~31살 남녀를 대상으로 ‘가격을 매긴’ 이력서를 받았다. 좋은 일자리를 얻으려고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을 반영했다. 방법은 간단하다(이력서 참조).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물어보는 학력, 외국어 점수 기재란 옆에 이런 이력을 만드는 데 들어간 돈을 쓸 수 있는 빈칸을 만들었다. 청년유니온의 요청에 따라 이력서를 제출한 37명의 이력서 평균가격은 4212만원이었다. 구직자 9명은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4212만원은, 취업에 성공한 26명이 25.8개월 동안 임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는커녕 커피 한 잔 마시지 않고 모아야 한다. 취업한 26명의 처지도 고용 형태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정규직 10명의 평균 월급은 200만7천원, 비정규직 16명의 평균 월급은 140만원이다. 비정규직 청춘들은 평균 38.1개월 이상을 공기만 마시며 소처럼 일해야 자신들의 이력서 비용 회수가 가능하다. 공정한 경쟁은 교과서 속에만 존재한다.

  이력서 값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대학 등록금이다. 평균 2789만원이다. 응답자 가운데 16명은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데 평균 1103만원을 썼다. 외국어나 자격증 관련 시험에 응시해본 이들은 이력서 제출자의 92%인 34명이다. 이들이 시험 응시료로 지출한 금액은 평균 58만원, 학원 수강, 교재비 지출 등 사교육에 쓴 비용은 평균 111만원 정도다. 토익 응시자들은 아홉 차례 정도 시험을 치렀다.

  지난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 김태영(29)씨는 2009년부터 지난 2월까지 23번이나 토익 시험에 응시했다. 토익학원 수강료와 기타 교재비 따위를 더하면, 토익에 투자한 비용은 300만원이 넘는다. 시험 준비를 위해 친구들과 스터디 모임을 하는 데 쓴 돈은 물론 계산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는 2009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200여 장의 이력서를 썼다. 어느 기업에 이력서를 넣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김씨는 서류전형에서 떨어질 때마다 혹시나 토익 점수가 발목을 잡은 게 아닐까 걱정한다. 올해도 세 차례 토익 시험을 봤다.“채점 기준을 공개하지 않으니, 한 번 더 보면 좀더 나은 점수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자꾸 시험을 보게 돼요.”올 하반기에도 취업에 실패하면 또다시 토익 시험을 볼 것이다. 혹시 모르니 1점이라도 점수를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중국어나 일본어 등 제2외국어를 배워볼까도 고민 중이다. 출신 대학이나 학점을 되돌리기엔 늦었으니 다른 쪽에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원하는 곳의 신규채용은 늘 한 자릿수였다. 서울 소재 대학 출신들과 경쟁하기도 버거웠다. 전공 관련 자격증만으로는 취업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토익 공부에 뛰어든 건 이 때문이다. 오윤지씨의 이력서엔 이런 땀과 눈물이 밴 지난한 과정이 구구절절 담겨 있지 않다. 거두절미하고 토익점수, 취득 자격증 등이 단 몇 줄로 나열돼 있을 뿐이다.

 

 인사담당자“토익·학점으로 거른 뒤 면접”  

  지난해 대학원 석사과정을 끝낸 김은영(27·가명)씨는 올해 초 입사 지원을 앞두고 이력서 사진 촬영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사진을 바꾸고 나니 서류전형에 붙었다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탓이다. 1만7천원을 들여 머리를 하고, 상담을 거쳐 사진을 말끔하게‘리터치’해준다는 사진관에 들러 3만4천원짜리 사진을 찍었다. 형편이 좋은 친구들은 돈을 더 많이 들여 프로필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의 이력서엔 ‘단기 교환학생으로 일본 방문’이란 경력이 적혀 있다. 일본에 머문 기간은 고작 10여 일.‘교환학생’이라고 하기엔 민망하다. 이력서를 쓸 때 이를 유학 및 연수란에 쓸지 말지 고민했다. 찜찜하긴 한데 어쨌든 경험한 프로그램에 ‘교환학생’이란 단어가 붙어 있으니 칸을 비워두기보단 적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스펙을 조금이라도 좋게 보이게 하려는 눈물겨운 ‘꼼수’다.

  보통의 구직자 99%는 이처럼 탈출구가 쉽사리 보이지 않는 스펙 쌓기의 쳇바퀴를 불안과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춘을 바쳐 만들어낸 스펙의 숫자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구직자나 취업자는 드물다. 기업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터.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두루 거친 한 인사담당자는 스펙만으로 구직자의 능력을 평가하기보다는 ‘태도’를 본다고 했다. 이를테면 스펙을 통해 그걸 만드느라 구직자가 흘린 땀과 성실성 등을 가늠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구직자 처지에서 보면, 결국 스펙을 따진다는 말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이 인사담당자는 “대기업의 경우 지원자가 너무 몰려, 비용 문제 등을 고려해 토익 점수나 학점으로 걸러낸 뒤 면접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국가가 구직자들 부담 경감 방안 찾아야  

  지난해 봄 이후 등록금 인하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스펙 쌓기 비용이 줄어들 기미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서울시립대 외엔 등록금 부담이 대폭 준 사례가 없다. 한지혜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사교육을 받아야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돼버렸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 전이라도 우선은 국가가 구직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취업준비생들의 무상토익운동
“기업이 토익 응시료 부담하라!”
지난해 말, 취업준비생들이 크게 술렁였다. 올해 1월부터 토익 응시료가 3만9천원에서 4만2천원으로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이다. ‘우리가 봉이냐’는 한탄의 와중에 2월부터는 영어능력평가시험 텝스 응시료가 3만3천원에서 3만6천원으로 오른다는 비보가 이어졌다.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박상미(28)·김지혜(27)씨가 직접 ‘무상토익대책위’를 꾸렸다. 2008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80장의 이력서를 썼다는 박씨는 계약직 아르바이트를 거쳐 지난 1월부터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 김씨는 2010년 2월 졸업 뒤 전문지 기자 등을 거쳐 다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도 100장의 이력서를 이력이 날 만큼 썼다. 이들은 지난 2월 ‘지원자 영어 성적을 알고 싶다면, 기업이 응시료를 부담하라!’는 주장을 담은 성명서 200장을 복사해 대형 서점에 진열된 토익 문제집에 끼워넣는 것으로 1차 행동을 시작했다.

김명진 기자

김명진 기자

무상토익 운동은 어떻게 시작했나.
박상미(이하 박) 원래 라디오 PD 시험을 준비했다. 시사교양 PD나 기자를 지망하는 지혜씨와는 올 초에 알게 됐다. 둘이 만나 수다를 떨다 왜 토익 응시료를 지원자가 다 부담해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뭔가 변화를 만들어내자는 데 뜻을 모았다.
김지혜(이하 김) 구직자들이 겪는 불합리한 점이 많다. 2009년 대기업에 입사 지원을 하려니 영어 말하기 시험 점수를 요구하더라. 예전엔 기업에서 따로 구술면접을 마련했던 것 같은데…. 추가 비용 부담이 불가피하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토익을 보지 말자는 거다. 기업에서도 토익 점수와 업무능력 간에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데, 왜 토익 점수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나? 만약 어쩔 수 없이 이런 평가가 필요하다면, 기업 쪽에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거다.
국내 토익 주관사인 YBM시사 쪽에 대한 7대 요구안을 설명해달라.
우리의 요구안은 이렇다. 1. 응시료를 인하하라. 2. 시험 문제를 공개하라. 3. 정오표도 공개하라. 4. 배점 기준을 공개해 성적표에 첨부하라. 5. 토익 유효기간을 시험 실시일이 아닌 성적 발표일 기준 2년으로 시정하라. 6. 성적표 재발급 비용을 낮춰라. 7. 토익 일반 접수 기간을 전달 시험 성적 발표일까지 연장하라.
운동을 어떻게 펼쳐나갈 예정인가. 개인적 목표는.
6월1일 우리 요구안을 알리는 1인시위를 서울 모처에서 진행할 것이다. 서울 토익시험장 투어도 계획하고 있다. 어른들이 귀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세대끼리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우리 세대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언론사에 들어가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도 찾아보고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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