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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적합한지 모르겠으나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90여 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산을 옮기긴 옮겨야 하는데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다. 90일간의 파업. 그리고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 할지 모르는 문화방송 파업.
방송인 예능 PD로서의 고민
나는 예능 PD다. 1995년에 입사했으니까 그때부터 예능 PD였고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파업이 끝나도 예능 PD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예능 PD가 되기 전 나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방의 의무를 다한 온전한 시민이기도 했다. 그 형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예능 PD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은 ‘재미’다. 사람을 웃게 하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시키건, 그리고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불러도 혼이 나며 TV 리모컨만은 사수할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시청자가 프로그램을 보며 일상의 고통을 잊게 해주거나 꿈을 꾸게 해줄 수 있는 마약 같은 재미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챙긴다. 사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청률이라는 성적표가 나오는 현실에서 예능 PD에게 재미를 찾는 일은 스트레스이기도 하고 실망과 실패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는 것은 그 재미를 만드는 일이 무지 ‘재미’있다는 거다. 예능 PD에게 파업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재미있는 일을 못하고 금전적 손해까지 감수하며 방송 프로그램에서 손을 떼고 동료들과 어깨를 걸고 나가는 게 바로 파업이다. 재미를 같이 만들어내던 연예인들과 만나서 어떻게 방송을 만들어나갈지 이야기하지 못하고,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웃겨야 하지라는 건전하고 일상적인 질문 대신 많은 시민과 네티즌이 볼 수 있도록 파업 홍보 영상을 만들고 거리에 나가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인터넷을 도배하는 예능 프로그램 결방 기사 속에 상대사 프로그램에 경쟁력이 뒤처지는 것을 뻔히 보곤 마음 아파하며 외면하고 외면하며 파업 현장에 나와 ‘공정방송’과 ‘사장 물러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게 바로 예능 PD의 파업이다.
당연히 고민을 가진다. 시청자가 그렇게 원하는 ‘하하·노홍철의 사소한 대결’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나도 보고 싶고, 군대 가기 전의 이특이 출연해 재미를 더해가는 도 보고 싶고, 지난해 온 국민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온전한 ‘나는 가수다’ 시즌2도 보고 싶다. 보고 싶기만 할 뿐 아니라 같이 만들고 그 재미를 고민하고 싶다. 혹자들이 말하는 언론인으로서의 PD와 방송인으로서의 PD가 있다면 여기까지는 방송인 PD로서의 고민이다.
‘재미’도 최소한의 상식은 있어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송인으로서의 PD만 되는 건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시청자와의 재미를 고민하는 PD가 사람들이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슬퍼하는지, 그리고 사회가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정서적 교감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그저 방송 기계로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90일이 넘는 긴긴 파업을 해오고 있지만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된다. 경영진은 노조가 싸움에 이기는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각종 해고와 징계로 대응하지만, 우리는 정의가 이기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견뎌왔다. 또 혹자는 경영진이 문화방송에 아무런 애정이 없으니 애정이 더 많은 우리가 참고 복귀해야 한다고 한다. 경쟁력 떨어지는 프로그램이 눈앞에 펼쳐지지 않느냐며. 그러나 5명이 해고되고 30여 명이 정직 등 중징계를 받는 상황에서 그들을 외면하고 현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아무리 나에게 을 다시 하고 ‘나는 가수다’를 다시 하라고 해도 그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냉정하게 이야기해도 그게 사람다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파업을 접을 수 없다.
90여 일의 파업. 피곤하진 않다. 일을 하지 않고 육체적 안정을 취하니까. 그러나 건강하진 않다. 재미있는 일을 못하니까. 그리고 점점 더 억울해진다. 너무나 억울하다.
문화방송은 지난 3년간 치욕의 세월을 지냈다. 공정성과 도전성으로 무장되어야 할 시사 프로그램들이 김재철 사장이 임명한 각 국장과 본부장들에 의해 아이템부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식까지 간섭되고 좌절돼왔다. 4대강이 그랬고 소망교회가 그랬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취재가 그랬다. 김미화씨가 쫓겨나고, 출연진들에게 대한 사상 검증이 가해졌으며, 시사 PD가 한직으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의가 더욱 강하고 세세하게 들어왔으며, 사장의 즉자적인 지시에 의한 프로그램 제작이 많아지게 되었다. ‘삼성 X파일’을 들춰내고 ‘황우석’을 파헤친 시사보도 프로그램은 하나둘 사라지게 됐으며,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예능 프로그램들은 새로운 포맷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각종 특집 쇼에 매몰돼 해외에서 긴긴 날들을 보내게 됐다. 그래서 나는 저항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아무런 저항도 안 하고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새 경영진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너는 도대체 그런 암울한 시기에 뭘 했냐?’라는 질문에 조금이라도 자유로우려고 저항을 시작했다. 우리 예능 PD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재미도 최소한의 공정성과 기본 상식은 있어야 찾을 수 있으니까.
지난 4·11 총선이 끝나고 요즈음 주위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예능 PD는 공정방송과 별 관련이 없잖아? 그러니 공정방송을 요구하는 이번 파업에서 슬슬 빠져도 되지 않나?’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의무
우리가 재미만을 추구해도 되는 케이블 전문매체나 다른 매체였으면 예능 PD들이 파업할 이유는 웬만해선 없을 거라 생각된다. 그러나 공중의 재산인 전파를 쓰는 지상파 방송사에 적을 두고 있다면,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듯 우리도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저항권은 헌법이 옹호하는 국민의 기본 권리이며 공영방송의 공정성은 시청자가 지상파에 준 의무라고 생각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모든 자식에게는 부모가 있듯이 우리 예능 PD에게는 언론인·방송인으로서의 의무가 기울임 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파업을 접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저항한다.
문화방송 파업 89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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