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저널리즘에 종사하기를 꿈꾸는 ‘언론고시생’에게 한국방송만큼 매력 있는 언론사도 드물다. 두려움 없이 권력을 비판하고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전하고픈 욕망을 가진 그들에게 한국방송은 포기할 수 없는 ‘기회의 땅’이다. 매일 밤 9시 자신의 육성을 통해 사회적 진실과 마주할 것이란 상상은, 한국방송 기자를 꿈꾸는 이들이 공유하는 짜릿한 로망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땅의 수많은 인재가 다른 기회를 마다하고서 한국방송의 문을 두드릴 리 없다.
혹독한 단련 뒤 마주한 당혹스런 현실
4년 전 겨울 한국방송 공채 합격을 확인했던 나 역시 마찬가지. 자신의 모습을 겨우내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신입사원을 맞이한 한국방송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밤새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선배들로부터 쉴 새 없이 학대를 받는 혹독한 훈련을 무려 두 달이나 견뎌야 했다. 지금은 ‘눈사람 기자’로 스타가 된 동기 박대기 기자는 그 시절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적막한 새벽 경찰서 기자실 벽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예상 밖의 푸대접이 당혹스러운 병아리 기자들에게, 선배들은 이것이 온전한 기자가 되는 과정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진실을 추구하고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엄중한 의무를 수행하려면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라 해명했다. ‘KBS 뉴스 ○○○입니다’라는 리포트 맺음말, 이른바 ‘바이라인’(byline)을 읽는 것이 어떤 사회적 책임을 담보해야 하는지, 왕년의 언론고시생들은 그렇게 아프게 체득했다.
하지만 혹독한 시간을 견뎌낸 뒤 마주한 현실은 훨씬 더 당혹스러웠다. 특히 현장에서 부딪힌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나를 비롯한 병아리 기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고인의 분향소를 취재하다 욕설을 들으며 쫓겨나는가 하면,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기도 했다. 집회나 시위를 취재하기에 앞서 ENG카메라에 붙은 한국방송 로고를 떼내야 하는 참담한 상황도 겪어야만 했다. 의욕과 패기는 오히려 버거운 짐. 기회의 땅 한국방송이 누군가에겐 저주의 대상이 돼버렸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이 극단을 그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하늘 같은 선배들조차 두려워하던 부장과 데스크는 침묵을 지켰고, 그들의 침묵은 내가 주제넘은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검열로 이어졌다. 철옹성처럼 굳건한 시청률을 상기시키며 한국방송을 비난하는 시민들을 오히려 비난하는 선배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의구심을 애써 누르며 현실에 적응해가던 무렵, 김인규 사장이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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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아닌 ‘충직한 회사원’ 된 선배들
‘이명박 언론특보’란 주홍글씨가 붙은 인물이 공영방송의 사장이 돼버린 부조리에 아연했지만 선배들의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분노와 울분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길 기대했으나 침묵은 짐작보다 견고했다. 5·18에 침묵하고 전두환을 찬양했던 사람을 ‘뛰어난 정치부 기자’였다고 소개하는 믿기 어려운 발언이 어느 선배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지경이었다. 공채 1기 기자의 화려한 귀환을 반기고 자랑스러워하는 언급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이쯤 되니 비겁하다 여겼던 기자들의 침묵이 실상 자발적인 협력이었단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장에 재빨리 적응하는 기민함, 새로운 체제 안에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히 복무하는 애사심에 근거해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배들의 비분강개가 불경하다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방송기자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방송사’가 아니라 ‘텔레비전을 켜는 사람들’이라는, 방송저널리즘의 기본을 망각한 장본인들이 보도국의 침묵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추상같이 기자의 본분을 가르친 ‘선배 중의 선배들’이었다.
한국방송 기자로 살아온 지 올해로 4년째. 나는 아직 그야말로 풋내기 기자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수습 시절 그토록 힘겹게 받은 직업 교육을 잊었을 리 없다. 기자는 진실을 추구하고, 어느 누구보다 시민에게 충실해야 하며, 권력의 독립된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의식이 그것이다. 이 최소한의 상식을 잊지 않았다면, 작금의 상황에 침묵을 지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김인규 사장이 직접 뽑은,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막내 저널리스트들이, 이제 막 직업 교육을 수료한 이들이, 단 한 명의 열외 없이 사장 퇴진을 외치고 있는 지금의 파업보다 한국방송의 현실을 아프게 고발하는 사례가 또 어디 있을까.
한국방송이 부끄러워 파업에 동참했다는 한 막내에게 ‘나는 20년 넘도록 한 번도 KBS가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고 일갈한 어떤 선배의 모습에서,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그 역시 초년병 시절 이 악물고 혹독한 수습 교육을 견뎠을 것이고, 자신의 영향력과 책임을 되새기며 온전한 기자가 돼가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또 그보다 더 이전에는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다른 직업들을 마다한 채 오로지 기자가 되기만을 갈망했던 초롱초롱한 기자 지망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에게서는 ‘충직한 회사원’ 이상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게 됐다. 그의 모습은 이제 기자보다는 어떤 언론사의 국장이나 본부장, 사장, 혹은 국회의원이고픈, 이 땅의 모든 사이비 기자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진실 추구·권력 비판 위한 자격
한국방송 뉴스는 오늘도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방송되고 있다. 보도국에는 생각보다 많은 ‘회사원’들이 파업과 상관없이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바깥에서는 ‘해사 행위’를 하지 않고는 자괴감을 견딜 수 없는 또 다른 회사원들이 사옥 주변을 맴돌고 있다. 혹은 보도국 안에서 침묵시위를 하며 동료들에게 ‘회사원’이 아닌 ‘기자’로 존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건 자신이 왜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 잊지 않은 사람들이다. 혹독한 수습 교육을 받은 이유가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고 권력을 비판할 자격을 얻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하는 이들이다. 4년차 기자인 내가 파업을 접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연욱 한국방송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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