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 정치권은 2008년 촛불 민심을 담아내지 못했다. 몇몇 시민운동가들은 ‘시민정치운동’을 통해 야권 통합에 합류했고, 오는 4월 총선 후보로 나서는 등 직접적인 정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한 후배가 저한테 ‘깔때기’(자기 자랑) 늘었다고 하대요, 하하. 어찌됐든 저는 자신 있습니다. 제가 야권 단일후보가 돼야 새누리당 후보를 이깁니다.”
최승국 예비후보는 자신이 국회에 진출해야 하는 이유를 자신 있게 말했다. 환경운동가 1세대로, 녹색연합 창립 때부터 지난해까지 20년 동안 일한 그는 “명분, 참신성, 전투력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경쟁력은 ‘환경운동가의 녹색시민정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4대강 사업, 핵발전소 갈등, 뉴타운 재개발 등 환경 분쟁의 현장에서 토건 정부에 물러서지 않고 온몸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그는 4대강사업저지 범국민대책위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이명박 정부의 반환경 국책사업 반대운동을 하며 느낀 분노와 한계 때문에 정치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시민운동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절감했어요. 환경 가치의 실현을 위해 국회 안에서 이를 제도화하고, 확고한 소명의식과 전문성을 갖고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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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과는 다른, 현실의 벽
지난해 12월16일 서울 은평을 지역 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한 뒤 지금까지 명함 6만 장을 돌렸다. “환경운동을 할 때는 언론에도 많이 나왔는데, 지역에서 정치인 최승국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인지도를 높이는 게 급한 숙제죠.”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20여 년 살고 있는 동네인데다, ‘4대강 전도사’를 자임한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의 지역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은 만만치 않다. 은평을 지역은 ‘죽음의 조’라 불린다. 그를 포함해 민주당에서 고연호 서울시당 대변인, 송미화 전 서울시의원, 최창환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민병오 민주당 정책위 정책실장, 김성호 전 노무현 후보 은평구 선대본부장 등 6명이 공천 신청을 했다. 당 공천장을 받는다 해도 ‘야권 연대’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통합진보당에서도 국민참여당 출신 천호선 대변인과 민주노동당 출신 이상규 예비후보의 치열한 경선이 예상된다.
4·11 총선에 도전장을 낸 시민운동가들이 적지 않다. ‘촛불 변호사’로 알려진 송호창 변호사는 2월6일 민주당에 입당하며 경기도 의왕·과천 지역에 공천을 신청했다. 이 지역의 현역 의원이 ‘보온병’ 별명을 얻은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여서 ‘인권변호사 대 새누리당 중진’이라는 흥미로운 대결이 성사될지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조국 서울대 교수가 송 예비후보의 후원회장이다. 민주당에서는 그를 포함해 7명이 공천을 신청했다.
야권 통합의 한 축이던 시민통합당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용선 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는 서울 양천을을 지역구로 선택했다. 같은 길을 걸어온 이학영 전 한국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 남윤인순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김기식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은 전략공천 또는 비례대표 후보에 도전한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박원석 전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로 총선에 나설 계획이다. 하승수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은 환경을 기치로 내세운 녹색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다. 수도권 밖에서는 유정배 춘천소비자생협 이사장(강원 춘천), 안호영 전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공동대표(전북 진안·무주·장수·임실) 등이 민주당 후보로 뛰고 있다.
‘영향의 정치’가 가로막혀서 나왔다
최승국 전 녹색연합 사무처장. <한겨레> 김명진
시민운동가들의 정치권 진출은 과거엔 ‘배신’으로까지 간주됐다. 시민운동이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들은 말한다. 시민운동의 ‘영향의 정치’가 이명박 정부의 ‘불통의 정치’에 가로막혔고, 이에 ‘시민정치’라는 새로운 흐름과 영역이 생겼다는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대변인을 한 송호창 예비후보는 “서울시장 선거 때 길거리와 시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그야말로 절규를 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이번 선거에서 새누리당에 패하면, 우리 사회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후퇴할 것이라는 절박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송호창 변호사. <한겨레> 이정우
기존 정치세력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시민의 열망을 받아줄 ‘정치적 그릇’이 되지 못했다. 이에 시민운동 진영 일각에서 ‘시민정치운동’의 흐름이 생겨났다.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내가 꿈꾸는 나라’ ‘진보의 합창’ 등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조직화하는 단체들이 등장했고, 이런 흐름을 주도한 시민운동가를 중심으로 직접적인 정치 진출을 고민하게 됐다. 2008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으로 활동한 박원석 전 처장은 “촛불집회에서 정치의 부재, 정치의 무기력함을 느껴 고민하게 됐다”며 “시민운동과 정치는 모두 세상을 좀더 공정하고 정의롭게 바꾸자는 목적에서 같은데, 제도권 밖에서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이 제도권
박원석 전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한겨레> 김정효
안에서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보다는 직접 정치를 하는 게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기식 전 처장은 “과거처럼 개별 영입으로 정당에 들어가면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운동하다 정치권에 들어가더니 물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기 십상이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강조한다. 영입의 경우 영입을 하는 쪽이 당하는 쪽에 영향력을 갖게 되지만, 이번에는 기존 정당과 시민정치 세력의 통합을 제기하고 참여한데다, 정책 노선 영역에서 잘 훈련된 시민운동 출신들이 수와 상관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운동가들 대부분이 제1야당 민주당을 선택한 이유가 비슷했다. “학생운동 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이 대부분 통합진보당에 있다.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과는 인천에서
이용선 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공동대표. <한겨레> 이정우
노동운동을 같이 했다. 정서적·정치적으로 가까운 사람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권 교체와 정치 개혁을 하는 데 제1야당인 민주당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송호창 예비후보) 최승국 예비후보도 “현실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가진 정당이라고 생각했다”며 “가치만 중시한다면 녹색당에 참여했겠지만, 좋은 가치뿐 아니라 총선에서 이기고 정권 교체를 하려면 민주당 후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운동의 ‘일상적 파트너’는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정당이다. 그래서일까. 통합진보당으로 발길을 향한 박원석 전 처장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시민운동가 출신이 대체로 민주당에 가는 게 좀 안타깝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박 전 처장은 “정치는 현실이므로 좀더 현실성이 높은 쪽으로 가는 걸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정치는 가치와 신념이기도 하다”며 “시민운동이 추구했던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선거를 만들고 기존 보수 양당, 지역주의 양당 구도에 균열을 가져오려면 시민정치 세력은 조금 외롭고 힘들더라도 진보정당을 강화하는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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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정치인과 다른 점으로 승부
정치판에 뛰어든 시민운동가들은 현실 정치의 쓴맛도 보고, 벽도 느끼고 있다. 민주당 대표 경선에 나섰던 김기식 전 처장은 ‘컷오프’(예비경선)조차 넘지 못했고, 이학영 전 총장은 본선에서 7위로 탈락했다. 시민통합당 출신으로는 유명 배우로 인지도가 높은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만 최고위원회 멤버가 됐다. 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 구성 과정에서 시민통합당 몫이 무시되는 등 ‘신진 세력’의 비애를 겪었다.
각 지역구에서 정치 신인으로 혹독한 경험도 치르고 있다. 송호창 예비후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박원순 후보 대변인으로 선거를 치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예비후보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빨리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후보와 대변인은 완전 다르더라”며 “후보가 되어 직접 자기 문제로 접해야 정치인으로 훈련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 신인들은 명함 돌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고, 인지도가 떨어져 경선을 할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문성근 최고위원이 배심원 투표나 전략공천을 통해 시민사회 출신 등 참신한 인사들을 공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민운동가 출신 민주당 예비후보들은 민주당이 경선 지역 여론조사 때 ‘박원순 선대위’ 경력을 쓰지 못하게 한 것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 쪽은 ‘김대중 선대위’ ‘노무현 선대위’ 등 한시적이거나 설립 1년 미만인 기구나 단체의 경력은 허가하지 않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하지만, 이들은 “당이 임의적 잣대를 내세워 시민사회 출신 정치인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한다”(2월15일 새로운 시민정치를 열어가고자 하는 후보 일동 성명)고 비판했다. 김기식 전 처장은 “국민참여경선은 당 지도부의 전횡이나 나눠먹기를 막고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주겠다는 말을 실현하는 방식인데, 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결과가 난감해질 수 있다는 걱정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점으로 승부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송호창·최승국 예비후보는 박원순 후보 선거운동 방식이었던 ‘경청투어’를 하는 중이다. 유권자를 만나 지역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고 대안을 함께 검토해 유권자 이름으로 공약을 하는 ‘공약실명제’도 내걸었다. 시민운동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며 쌓은 의제 설정 능력과 현장 경험, 네트워크 등 정책 수행 능력도 시민운동 출신 후보들이 가진 장점으로 꼽힌다.
정치권 진출 대하는 비판적 시선
그러나 시민운동가들의 정치 진출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도 적지 않다. 시민단체 내부의 세대 교체 흐름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지만, ‘간판급’ 운동가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면서 시민단체가 정치 진입의 발판으로 활용된다는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 감시 기능이 무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기식 전 처장은 “시민운동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인물군이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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