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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재·보궐 선거 패배로 한나라당이 또다시 ‘쇄신앓이’를 하고 있다. 2008년 총선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졌다. 그때마다 계파 화합, 당청 관계 개선, 소통, 지도부 교체 등의 쇄신책이 쏟아졌다. 이 정부 들어 선거에서 한두 번 진 것도 아니고 쇄신론이 처음 제기되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한나라당의 위기감은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유승민 최고위원은 “바깥에서 한나라당을 바라보는 민심이 갈라파고스섬”이라고 자책한다. 홍준표 대표 입에서 한나라당이라는 이름까지도 “(의원들이) 바꾸자고 하면 바꾸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왜? 당, 더 정확히는 의원들의 명운이 걸린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이름 아래 최대의 쇄신앓이
쇄신론은 지도부 교체론부터 대권주자 조기 등판론, 박근혜 역할론, 공천 물갈이론, 정책기조 수정론까지 백가쟁명 양상을 보인다. 지도부 교체론은 유승민·원희룡 최고위원 등이 나서서 주장한다. 대선 후보군인 정몽준 전 대표는 대선에 나설 사람들이 당을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민본21을 비롯한 소장파들은 물갈이와 정책기조 수정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저마다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정답’ 버튼을 누르고 있지만 아직은 중지가 모아지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변화와 개혁의 원칙은 진정성, 열린 자세, 현장성이다. ‘마누라 빼고 다 바꾸자’던 어느 기업 이상의 절박한 마음으로 변화와 개혁에 나서겠다”(김정권 사무총장)며 11월1일 ‘10·26 재·보선 평가와 과제’ 간담회도 열었다. 하지만 간담회는 비공개로 진행됐고, 브리핑조차 일방적으로 취소돼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알 수 없다.
곧 혁신안을 내놓겠다는 홍준표 대표의 구상도 대략적인 윤곽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오히려 20~30대와 소통하겠다며 벌인 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10월31일 서울 홍익대 앞에서 대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선 평소처럼 거침없이 말했다가 설화를 겪었다.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당내 인사를 겨냥해 “꼴같잖은 게 대들고 ×도 아닌 게 대들고. 이(여기)까지 차올라 패버리고 싶다”고 말하는가 하면, 자신이 대학 시절 이화여대 학생과 한 미팅에서 거절당한 일을 얘기하며 “나는 이대 계집애들 싫어한다”고 하는 등 부적절한 표현을 마구 쏟아냈다. 술자리에서 화기애애한 대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엔 표현이 지나쳤다. 이 때문에 유승민 최고위원은 11월2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발언이 보도된) 기사를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며 “서울시장 선거 참패한 지 며칠 되었다고 당 대표께서 젊은이들하고 대화하고 경청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막말을 막 하실 수 있는지, 당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 거기에 대해서 정말 반성하고 국민들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원희룡 최고위원도 “변화를 얘기하며 변화의 대상이 되는 구태정치를 우리 스스로 계속 생산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구태정치의 입을 바꾸지 않고, 화장하고 국민들에게 선물 꾸러미를 주겠다고 해서 민심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한나라당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내 공감대는 분명하다. 아직 그 방향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으니 맞다 그르다를 논할 상황은 아니다. 중요한 건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한나라당은 ‘진화’했고, 그 결과 계속해서 기득권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다. 정부 수립 이후 자유당부터 신민주공화당(공화당), 민주정의당(민정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거쳐 신한국당에 이르는 보수 정당은 모두 한나라당의 다른 이름들이다. 적어도 민주화 이후의 ‘한나라당들’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자기 지지 기반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데 충실한 ‘계급정당’이었다. 보수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해 ‘정당정치’를 가장 잘 구현한 것도 ‘한나라당들’이다. 설혹 여러 야당이 이합집산하고 명멸한 지난 14년 동안 지켜온 당명의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판단하는 이가 많다고 해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건 이름일 뿐이다.
계엄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막고, 대통령이 직접 당을 만들고 운영하던 독재정권 때야 그렇다 쳐도, 1987년 이후 보수 정당의 역사는 ‘보수의 보수’를 통한 기득권 유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민정당은 1987년 대선에서 이겼지만, 이듬해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상황을 맞게 된다. 과반에서 24석이나 모자란 125석에 그쳐, 여당이 평화민주당(평민당), 통일민주당(민주당), 공화당에 포위된 형국이었다. 민정당은 사사건건 야당과 ‘협의’라는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했고, 과거처럼 독단적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민주화의 기운을 타고 곳곳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4당 구도 때문에 정치가 화합하지 못하고, 경제발전과 사회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며 사회 혼란의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던 민정당은 결국 1990년 1월 민주당, 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한다. 이렇게 탄생한 민자당은 국회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공룡’의 힘은 셌다. 1991년 6월 지방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은 득표율 41%로 전체 의석의 65%를 손안에 넣었다.
하지만 이듬해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여당 견제 심리, 당 내부 계파 싸움, 그로 인한 공천 실패 등으로 또다시 과반에 못 미치는 149석을 얻었다. 또다시 여소야대 상황에 몰려 국정 주도권을 잃게 생긴 것이다. 더구나 그해 말엔 대선을 치러야 했다. 민자당은 일찌감치 김영삼 후보를 확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당을 운영했다. 대선을 앞두고선 ‘이선실 간첩단 사건’ 같은 매카시즘과 ‘초원복집 사건’으로 대표되는 각종 관권 개입을 통해 권력기관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특히 초원복집 사건은 권력기관이 노골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사실보다 도청과 지역주의라는 부차적인 문제가 더 부각되며 민자당에 유리한 판세를 만들었다. 그 결과 14대 대선은 41.4%를 득표한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승리로 끝난다.
정권 중간평가 성격을 띤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은 광역단체장 15곳 가운데 5곳만 겨우 건지는 등 참패를 겪게 된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원식 민자당 후보는 득표율 20.7%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경쟁했던 조순 민주당 후보는 42.4%, 무소속 박찬종 후보는 33.6%였다. 게다가 그해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 구속됐다. 총선을 1년 앞둔 상황에서 비상이 걸린 것이다.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꾸고,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총선 공천을 직접 챙겼다. 기준은 ‘개혁성’과 ‘참신함’이었다. 허삼수 전 의원 등 현역 의원 40명이 물갈이됐다. 그 대신 영입된 이들이 이재오 의원, 김문수 경기지사 등 민중당 출신들,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대표 등이었다. 결과는 총선 승리였다. 139석을 얻은 것도 중요했지만 서울 47석, 인천 11석, 경기 38석 등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했던 수도권에서 약진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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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의 횃불’ 박근혜와 ‘이명박 바람’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이기택·조순 등의 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외환위기라는 정세와 ‘DJP 연합’이라는 선거공학에 밀려 대선에서 패배한다. 의원들은 속속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으로 빠져나갔고, 1998년 지방선거에선 영남과 강원을 뺀 다른 지역에서 참패해 ‘영남당’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책임을 지고 조순 총재가 사퇴하고 이회창 총재가 선출됐다. 2000년 총선에서도 현역 의원 43명이 물갈이됐다. 김윤환·이기택·신상우·오세응 전 의원 등이 공천에서 탈락하자 ‘중진 학살’이란 말까지 나돌았다. 대신 남경필·원희룡 의원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 같은 ‘젊은 피’를 수혈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133석을 얻어 제1당 자리를 유지했다.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최병렬 대표 체제가 자리를 잡아 한동안 별다른 위기를 겪지 않았던 한나라당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함으로써 자폭에 가까운 상황을 연출한다. ‘탄핵 무효, 민주 수호’ 팻말을 든 촛불이 도심을 뒤덮었고, 당 지지율은 15% 안팎까지 곤두박질쳤다. ‘차떼기당’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도 이 무렵 밝혀졌다. 가히 창당 이래 최악의 위기라고 부를 만한 상황이었다. 이때 등장한 ‘구당의 횃불’이 박근혜 대표다. 그는 천막당사에서 업무를 보며 서민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공천 물갈이도 36.4%나 이뤄졌다. 여기엔 김용환·현승일 의원 등 자발적인 불출마 선언자들의 ‘희생’도 있었다. 어쨌든 한나라당은 “개헌 저지선만은 만들어달라”고 읍소한 대가로 121석을 얻어냈다. 이후 2006년 지방선거는 물론 노무현 정부 때 치러진 모든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완승을 거둔다. 2007년엔 ‘이명박 바람’으로 10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하고, 2008년 총선에선 ‘뉴타운몰이’로 압승하게 된다.
이 정부 들어서도 쇠고기 촛불, 재보선과 지방선거 패배 등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한나라당은 지도부 교체나 당·정·청 관계 쇄신, 소통 강화 등 여러 쇄신안을 내놨다. 아예 당의 공식 기구로 쇄신특위를 만들어 대책을 마련한 적도 있다. 하지만 쇄신안이 실질적으로 집행되거나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과거의 쇄신안이나 이를 추진한 사람들이 더 훌륭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정적 차이는 총선과 대선이 얼마나 남았느냐에서 비롯된다.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임기 초반과 달리, 공천과 당선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임기 후반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변화하기 쉽다는 뜻이다.
한나라당의 ‘진화’는 계속될 것인가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EAI 펴냄)라는 책에서 영국 보수당이 △강한 권력의지 △유연함 △외연 확장을 통해 20세기 대부분을 집권당으로 지낼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특징이지만, 영국 보수당은 급격한 변화를 막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 집권이기에 권력의지가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급격한 변화를 막기 위한 권력의지 때문에 시대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켰고, 지지 기반도 점점 넓혀왔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보여준 합당, 물갈이, 새 인물 발굴 등의 ‘몸부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만 ‘잃어버린 10년’ 동안 세상이 변한 속도를 따라잡진 못했지만, 한나라당엔 ‘개혁파’로 불리는 정두언·정태근·김성식 의원 등이 존재하고, 홍정욱 의원처럼 젊은 층과 자주 소통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번에도 한나라당은 ‘한나라당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진화할 뿐이다’라는 가설을 증명해 보일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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