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경희대 민주주의는 ‘20년생 난초’다

등록금 동결에 인상분은 기부하고 교양대학 키워가는 경희대…
교수·학생·교직원이 20여 년 공들여 키워온 ‘숙의 민주주의’ 결실 맺어
등록 2011-04-06 18:10 수정 2020-05-03 04:26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 본관 앞에 목련꽃이 피었다. 지난 3월31일 오후, 경희대생들이 본관 앞을 지나가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 본관 앞에 목련꽃이 피었다. 지난 3월31일 오후, 경희대생들이 본관 앞을 지나가고 있다.

갓 입학한 여대생이라면 꼭 챙겨야 할 일이 있다. 아침 샤워다. 경희대 의상학과 1학년 강지혜씨는 아침 7시30분에 눈을 뜬다. 늑장 부리면 기숙사 샤워실에 자리가 없다. 교정엔 봄 햇살이 내린다. 햇살 사이로 푸른 또래들이 재잘거리며 다닌다. 아침 샤워를 하지 않고 그들과 어울리는 일을 강씨는 상상할 수 없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나이란 걸 19살 때는 잘 모르는 법이다.

마침 대학 본관 앞, 40년 묵은 나무에 목련꽃이 피었다. 목련이 꽃 피우는 일은 느닷없어 황홀하다. 푸른 잎으로 애간장 태우지 않고, 하얀 꽃부터 불쑥 밀어올린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를 생각하면 기적이다. 지난겨울, 강씨도 앙상했다. 그때는 아침 7시까지 등교했다. 밤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대입을 준비했다. 그랬던 그에게 이번 봄은 느닷없어 황홀하다.

대학 새내기, 28년차 교직원이 함께 맞은 봄

지난 3월24일 오후, 강씨는 노천극장에 갔다. 6년 만에 전체 학생 총회가 열렸다. 의상학과 1학년 45명 가운데 15명 정도가 참석했다. 학부 재적생 1만2821명 가운데 1885명이 참석해 총회가 시작됐다. 중간에 드나든 학생을 더하면 2천 명이 넘었다. 교내 집회에 수천 명이 모여드는 일은 2000년대 학번에겐 낯설다. 그건 1980년대나 가능했던 일이다. 기적 같은 자리에서 학생들은 총학생회가 보고한 등록금 동결안을 수용했다. 이미 3% 인상된 등록금을 납부했는데, 인상분 가운데 2%는 돌려받고, 0.5%는 저소득층 학생 장학금에 쓰고, 0.5%는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에 쓰기로 했다. 학생들은 풍선을 날리고 깃발을 흔들었다. 기왕 인상된 등록금을 다시 동결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국 대학 가운데 경희대가 처음이다.

“기뻤나요?” “어머, 당연하죠. 등록금이 얼마나 비싼데….” 강씨의 부모님은 지방 도시에서 맞벌이를 하고 있다. 함께 벌어도 480만원에 이르는 신입생 등록금은 벅찼다. 집안 어른의 도움을 받았다. 강씨는 부모님에게서 월 35만원의 용돈을 받고 있다. 그는 학생식당에서 2500원짜리 점심을 사먹는다. 등록금 인상분 3%는 두 달 동안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이다. 강씨 부모님의 경제적 형편은 중산층에 가깝다. 그래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일은 힘겹다. 등록금 동결은 대한민국 수만 가구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계단식 노천극장에서 풍선을 흔드는 강씨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돈 생각만 한 것은 아니다. 19살은 셈이 빠른 나이가 아니다. “뭐랄까, 마음이 좋아졌어요.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등록금 동결, 인상분의 사회적 환원, 직접민주주의 등이 만개한 경희대의 봄날은 하루아침에 오지 않았다. 김종원 노조위원장은 28년째 경희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알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사학과 마찬가지로 경희대 설립자는 ‘제왕적’이었다. “모든 일이 설립자가 ‘오케이’해야 이뤄졌어요. 권위주의가 심했죠.” 김 위원장의 회고다. 학생들은 재단을 비판했다. 학생 집회는 학교 쪽이 눈감은 경찰 난입으로 종종 아수라장이 됐다. 학생운동 탄압에 들러리 서기를 거부한 교직원노조 위원장은 구속·해고됐다. 경희대는 분규 사학의 하나였다.

지난 3월24일 열린 전체 학생총회를 전후해 학생들의 의견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경희대 곳곳의 게시판에는 총학생회, 교지편집위원회 등이 내붙인 대자보가 가득하다.

지난 3월24일 열린 전체 학생총회를 전후해 학생들의 의견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경희대 곳곳의 게시판에는 총학생회, 교지편집위원회 등이 내붙인 대자보가 가득하다.

총장부터 학생까지 참여하는 기획위원회

1980년대 막바지부터 경희대의 궤적은 조금씩 달라졌다. 다른 대학과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학내 민주화 세력이 견결하게 버텼다. 총학생회·대학원총학생회·교직원노동조합·의료원노동조합 등이 함께 뭉쳐 ‘경희학원 민주단체협의회’를 구성했다. 재단과 학교 당국은 민주주의의 힘을 완전히 부정하진 못했다. 그 결실이 ‘등록금 책정위원회’였다. 1989년부터 부총장 등 학교 대표 4명, 부총학생회장 등 학생 대표 4명이 마주 앉아 등록금 문제를 논의했다. 다른 대학에선 지금껏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을 경희대는 20여 년 전에 이뤘다. 비슷한 기구를 갖춘 대학이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학교-학생 간 대화가 없다.

제도와 조직이 처음부터 제구실을 했던 것은 아니다. 학내 민주세력은 제도·조직을 만들었지만, 학교 당국의 태도가 여전히 문제였다. 김 위원장은 “조인원 총장 부임 이후,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2006년 11월, 조 총장이 취임했다. 그는 정치학자 출신이다. 지난 2월23일, 교무위원 연찬회에서 조 총장이 발언한 내용이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다. “모든 정보는 구성원이 공유해야 하며,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이를 전제로 충분한 논의를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지면, 그 결과가 이해당사자 본인에게 다소 불리한 결정이 되더라도 수용해야 한다.”

경희대는 ‘위원회 대학’이다. 최근 경희대가 돌아가는 사정을 이해하려면 ‘기획위원회’부터 살펴야 한다. 기획위원회는 각종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1993년 처음 만들어졌다. 주로 보직 교수들이 참가했다. 기구 성격상 총장 이하 보직 교수들이 중대 사안을 의논하는 자리였다. 2007년 9월부터 총장·실무처장·학생대표·대학원생대표·교수대표·교직원대표·동문대표가 기획위원회에 참여했다. 회의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고 있다. 실무처장이 현안을 보고하고, 각 대표가 의견을 제시하며 토론한다. 총장이 직접 회의를 주재한다. 이 자리에서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총장·총학생회장·교직원노조위원장이 머리를 맞댄다. ‘숙의 민주주의’의 최고기구인 셈이다. 기획위원회를 필두로 제도발전위원회, 교육역량발전위원회 등 각종 소위원회도 있는데, 역시 학교·학생·교직원 대표가 참가한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교직원은 “이런 민주적 소통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수들이 있는 게 고민이라면 고민”이라고 말했다.

따뜻한 시민 만드는 ‘후마니타스칼리지’

기획위원회가 ‘입안’의 자리라면 대학평의원회는 ‘심의’의 자리다. 역시 교수·직원·학생·동문 대표가 모두 참여한다. 예산을 심의하고 학칙 제·개정을 논의한다. 두 달에 한 번씩 열린다. 기획위원회와 대학평의원회를 통해 각 구성원 대표는 대학 관련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예전에는 정보가 차단돼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는데, 요즘은 회의에 들어가기 바쁘다”고 말했다. 노조위원장이 직접 참여하는 회의만 일주일에 한 번꼴이다. 나머지 회의에는 다른 노조 간부가 참석한다. 각종 회의록은 모두 대학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총장, 총학생회장, 교직원노조위원장 등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든 구성원이 알 수 있다. 지금 경희대에선 비밀이 없다. 김종회 문화홍보처장(국문학 교수)은 “위원회가 많으니 결정이 늦어지는 불편함이 있지만, 의사결정 과정에서 각 구성원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고 그들의 중의를 모을 수 있으므로,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크다”고 말했다. 김 처장은 “옛날부터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의 지혜가 나온다고 했다”며 웃었다. ‘문수’는 지혜의 보살이다.

지혜는 민주주의를 반석 삼아 자란다. 경희대는 올해부터 거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교양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했다. ‘후마니타스칼리지’를 새로 만들었다. 교양교육을 전담하는 대학이다. 2011년 신입생부터 전공·계열 상관없이 모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교양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자연과학·예술 등을 전공하는 학생도 예외가 아니다. 필수과목이 있다. 경희대에선 ‘중핵과목’이라 부른다. 1학기엔 ‘인간의 가치탐색’, 2학기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수강한다. ‘인간의 가치탐색’은 인문학,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회과학 성격이 강하다. “탁월하고 책임 있고 따듯한 시민”을 키우려는 민주시민소양교육인 ‘시민교육’ 과목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교재는 여러 분야의 학자 수십 명이 참여해 함께 만들었다. ‘인간의 가치탐색’ 교재는 740여 쪽에 이른다. 머리글을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도정일 명예교수(영문학)가 썼다. “여러분에게 최종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내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가치의 안내를 받아 내 인생을 꾸리고 삶을 기획할 것인가?’” 이 책의 목차를 읽는 것만으로 감동받을 수 있다. 90여 편의 글을 모아 담았는데, 플라톤·버트런드 러셀·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이 있고,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애덤 스미스의 시장주의·장 자크 루소의 급진주의가 공존하고, 게오르크 지멜·막스 베버·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사회사상이 출몰하며, 김구·법정·조영래·서준식의 통찰이 오롯한데, 셰익스피어·프로스트·보들레르의 시와 고은·서정주·도종환·기형도·신경림의 시가 마음을 흔든다.

지난 3월31일 오전, 경희대 청운관 강의실에서 후마니타스칼리지 필수과목인 ‘시민교육’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수업 시간의 대부분은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된다.

지난 3월31일 오전, 경희대 청운관 강의실에서 후마니타스칼리지 필수과목인 ‘시민교육’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수업 시간의 대부분은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된다.

민주주의는 ‘예수님 보리떡’ ‘난초꽃’

‘시민교육’의 교재 제목은 ‘제2의 탄생’이다. 장 자크 루소의 글에서 따왔다.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생존하기 위해, 또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해.” 교재에는 대학생의 글이 많다. 고려대 자퇴생 김예슬, 이주노동자 미누 등의 글이 실려 있고, 붕가붕가레코드·성미산 공동체·노숙인·청년유니온 등을 소개한다. 350여 쪽의 교재 끝에는 학내 봉사 동아리와 학교가 주관하는 각종 봉사 프로그램이 실려 있다. 후마니타스칼리지 서울캠퍼스 정연교 학장(철학과 교수)은 “(실용적) 기술만으로는 세상 살기가 어렵다. 사회적·도덕적 판단을 못하면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도 없다. 대학은 차원 높은 숙고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각 과목을 맡은 교수·명예교수·객원교수·외래강사 등은 격주 또는 월 1회씩 워크숍을 연다. 각자 수업 경험을 발표하고, 다가올 수업 방안을 토론해 교안을 만든다. 각 교안은 다시 대학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다른 대학의 학자들도 참조하라는 뜻이다. “그 과정을 통해 학자들이 여러 학제를 소통하는 학문·인식 공동체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고 정 학장은 말했다. 정 학장도 직접 ‘인간의 가치탐색’ 수업을 진행한다. 그에게도 불만이 있다. “자연과학 수업을 더 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 학장의 목표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색없는 대학 교양교육의 모범을 세우는 것”이다.

교양 수업은 토론식으로 진행된다. 지난 3월31일 오전, 박영선 객원교수가 진행하는 ‘시민교육’ 시간에 학생 30여 명이 앉았다. “나에게 민주주의는 □ 다.” 빈칸에 넣을 말을 각자 써내고 발표했다. ‘예수님 보리떡’이 나왔다.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 모두 잘 먹고 잘 살자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나눠준 보리떡처럼.” ‘난초꽃’도 나왔다. “다른 화초는 물만 잘 주면 되지만, 난초에 꽃을 피우려면 공들여 열심히 가꿔야 하죠. 민주주의도 그런 거 같아요.” 학생들이 박수를 친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간호학·경영학·사학·법학·화학·수학 등을 전공한다. 그들이 표현하는 민주주의는 기성세대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이런 수업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 교수는 “전공과 출신이 다르지만 ‘시민교육’ 강사 사이에 공감대가 있다”고 말했다. “규범·정답·지식을 주입하지 말고, 학생들이 수업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이 주체가 된 수업은 때로 도발적이다. 어느 학생은 에세이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더러 ‘제2의 탄생’을 하라고 한다. 뭐 이런 폭력이 다 있나 싶다. 고교 시절,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니 타인과 공명하는 삶을 위해 새로 태어나라고 한다. 우리는 (대입 준비 때문에) 제1의 탄생도 못했다. 이제 또 다른 입시를 강요하는 것 같다.” 신입생의 ‘이유 있는 도발’은 수업의 토론 주제가 될 것이다.

반성한 ‘운동권 학생회’의 솔선수범

‘시민교육’ 과목을 이수하려면 실습 과제도 반드시 마쳐야 한다. 각자 ‘실천 프로젝트’를 발표해 이행하고 그 결과를 평가받는다. 3월31일 수업에서 몇몇 학생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어느 학생은 학과 선후배 간 위계·폭력 문제의 실태를 조사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런 강좌 200여 개가 후마니타스칼리지에 개설돼 있다. 신입생 2500명을 포함해 4천여 명이 경희대 강의실에서 토론이 넘쳐나는 수업을 이끌고 있다.

외부자가 보기에 그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반듯하고 예쁜 것만 품고 있지 않다. 등록금 문제만 해도 진통과 잡음이 적지 않았다. 박병권 경희대 총학생회 학자국장은 지난 1월부터 시작된 지난한 협의·협상 과정을 설명했다. 대학 당국이 등록금 인상을 발표하자 분위기가 험해졌다. “등록금 책정위원회 자리에서 학생들을 무시하는 발언도 들었다.” 지난 2월 내내 학교와 학생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때마침 교양과목 수강 문제가 불거졌다. 교육체계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담당 교원이 정해지지 않은 과목이 있었다. 강의 계획도 미처 공개되지 않았다. “무얼 보고 수강 신청하라는 것이냐”는 학생들의 불만이 터졌다. 소통은 흔들렸고, 인문주의 교육의 첫걸음도 삐걱거렸다. 박 국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긴박하게 갑론을박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경희대의 변화에 대해 “우리 학교만큼 (민주적) 제도와 조직을 갖춰 운용하는 곳이 없고, 인문학적 교양교육 개편 방향도 올바르고 좋다”고 말했다. “다만 학교 행정조직이 여전히 보수적이라 급변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고 있다. 최종 책임은 총장의 몫이지만 실무자들의 잘못도 적지 않다.”

등록금 인상분 1%를 저소득층 학생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돌려주는 방안은 총학생회가 먼저 내놓았다.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구성원과 연대하는 정신을 솔선수범한 셈이다. 이 역시 과거 학생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박 국장은 “최근 몇 년 동안 ‘운동권’이 반성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2006년부터 3년 내리, 이른바 ‘비운동권’이 경희대 총학생회를 장악했다. “과거 운동권은 내 생각이 옳다고만 주장했지만, 그 시절을 거치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대중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우리도 고민과 성찰을 많이 했다”고 박 국장은 말했다. 2009년부터 다시 학생 대표의 책무를 맡은 이들은 ‘직접 참여 민주주의’를 구현할 방안을 고심했다. 6년 만에 열린 전체 학생총회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제왕적 설립자의 아들 ‘민주적 총장’

경희대 학생운동은 사라지지 않고 진화했다. 경희대 당국도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그 결실이 올해 3월 피어나고 있다. 외부자가 보기에 그 꽃은 느닷없지만, 알고 보면 겨우내 메마른 가지에 꽃눈을 달려고 부단히 몸부림쳤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조인원 총장은 인터뷰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학교 관계자는 “교무위원회, 법인이사회의 결정을 거쳐야 등록금 문제가 최종 마무리되는데, 의사결정 과정이 아직 남은 상태에서 총장이 직접 인터뷰하기 곤란하다”고 해명했다. 교수·교직원·학생 등 경희대 구성원 대다수는 조 총장에 대해 “인문적 소양이 깊고 모든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이대로라면 흠결 없는 총장이라고 기사에 써야겠네요?” “그렇진 않죠. 참여 민주주의 제도는 잘 만드는데, 구성원과 면대면 소통은 과거 총장보다 적어졌어요. 의사결정 과정이 길어져서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할 때 문제가 되지요.” “여전히 칭찬처럼 들리는군요.” “아니에요.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지요. 비판적 소수 의견이 아직은 집단화되지 않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학교 관계자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희대에 불어닥친 민주주의에는 흠결이 있다. 대학 총장은 재단 이사회가 선임한다. 교직원 노조는 지난해 단협에 “대학은 구성원 의견과 참여를 바탕으로 총장을 선임하도록 노력한다”는 문항을 넣었다. 김종원 교직원 노조위원장은 “지금으로선 구성원들이 총장 선출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조 총장은 설립자의 둘째아들이다. 제왕적 설립자와 민주적 총장 사이의 혈연 관계는 흥미롭다. 모든 대학이 권위주의·시장주의로 달려가는 시절, 경희대는 민주주의·인문주의로 방향을 잡았다. 그 질주가 지속적이려면 리더십 창출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한 시점이 올 것이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민주주의

경희대 신입생 강지혜씨는 그런 복잡한 구조까진 모른다. 그는 대학에 와서 독도 탐사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었다. 장차 패션잡지 기자가 될 꿈도 꾸고 있다. 후마니타스칼리지의 교양과목을 듣느라 매주 3종류의 보고서를 써야 하는 게 힘들지만, “신기하고 재밌다”고 강씨는 말했다. “이런 문제를 이렇게 깊이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매번 느끼고 있다.” 인문학 수업과 시민교육 수업을 오가며 그가 알게 된 것이 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춘 시민들이 일군다는 사실이다. 졸업 무렵이 되면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편하고 솔직하게 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강씨의 꿈이다. 그런 사람을 ‘후마니타스’라 부른다. 철학자 키케로는 “후마니타스가 문명을 만든다”고 말했다. 강씨는 자신의 꿈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 몰라도 괜찮은 신입생이다. 어쨌건 강씨가 맞이한 경희대의 봄은 이미 아름다우니.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