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근대 이후 무슬림 세계는 서구인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휘두른 ‘민주주의’가 이슬람과 합치하는지에 대해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무슬림의 일상 어휘에 ‘민주’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민주주의적 생활양식이나 사유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근대 무슬림들에게 서구 민주주의는 낯선 사상이었기에 그 해석을 두고 견해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무엇보다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가 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이슬람과 합치하는지 여부였다.
“알라 외에 모두가 평등하다”
민주주의가 이슬람과 조화될 수 없다고 본 대표적 인물은 파드 빈 압둘아지즈(1923∼2005) 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다. 그는 “이슬람 정부는 조언과 협의의 정부로 목자가 그의 양떼에 관대할 것을 요구하고, 통치자가 백성 앞에서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한다”며, 민주주의의 근간인 투표제도를 부정하고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파드 국왕처럼 이슬람과 민주주의의 불합치를 주장하는 무슬림은 민주주의를 신의 주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부정하고, 국민주권이 신의 주권 개념과 상치하기에 종종 왕정을 대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신이 내린 법, 즉 이슬람법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통치자는 민의에 따라 선출돼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이슬람과 민주주의의 완전한 합치를 주장하는 무슬림은 전통적인 이슬람 사상·기구·제도를 재해석해 이슬람식 민주주의 의회와 대의 정부를 세우려 한다. 즉, 이슬람이 민주적 종교라는 뜻이다. 이들이 그 근거로 이슬람 전통에서 추출해 내세우는 개념으로 ‘유일신성’(Tawhid), ‘칼리파’(Khalifah), ‘협의’(Shura), ‘공공이익’(Maslaha) 등이 있다. 용어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 전통에서 민주적 가치를 찾는 무슬림에게 이런 용어들은 민주주의가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한다.
유일신성이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이슬람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무슬림들은 이를 교리 차원을 넘어 일상의 삶에 적용해, 알라 외에 그 누구도 권위를 지닐 수 없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동등한 존재로, 특정한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없기에 신의 유일성이 곧 민주주의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칼리파는 전통 무슬림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를 의미했지만, 코란 계시에서 칼리파는 ‘신의 대리자’를 뜻한다. 이에 따르면 알라는 최초의 인간 아담 역시 지상의 칼리파, 즉 대리자로 창조(2장 30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지상의 칼리파로 만들었다(6장 165절). 따라서 칼리파라는 말은 근대 이전과는 달리 한 사람의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지상에서 알라를 대신해 모든 창조물을 이끄는 인간 하나하나가 모두 동등한 존재로 고귀하다는 뜻이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코란 계시대로 개개인이 신의 대리자가 되는 데에서 비로소 이슬람의 민주주의가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코란은 다시금 42장 38절에서 ‘슈라’, 즉 서로 협의하는 것을 올바른 인간의 조건으로 가르친다. 알라의 피조물로 창조돼, 그의 명령으로 지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는 인간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며 서로 상의해야 올바른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슬람 역사 초기(632∼661)에 정치적 현안에 대해, 특히 지도자 선출 때 대표들이 모여 의견을 조율하며 협의하는 것은 무슬림의 전통이었다. 따라서 현대 무슬림들은 슈라라는 의견 조율의 전통에서 이슬람의 민주주의 정신을 확인한다. 즉, 슈라를 현대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서구식 민주주의처럼 시민이 투표를 통해 행정부와 입법부를 구성하는 대표를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동등한 존재로, 특정한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없기에 신의 유일성이 곧 민주주의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끝으로 ‘공공이익’은 공공의 편의를 위해서는 엄격한 법률 적용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이슬람법 원리 중 하나로, 주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던 말리키 학파의 이론에 속한다. 현대 이슬람 민주주의 담론에서 시민들은 협의를 통해 공공이익의 범위나 정도를 규정하고, 정치 지도자는 이를 따라야 한다. 시민들이 길을 제시하고 지도자가 따르는 사회다. 이처럼 협의를 통해 공공이익을 위한 정책이 나오고 이를 따르는 정의로운 지도자가 있는 사회가 곧 공공이익을 보장하는 이슬람의 민주사회가 되는 것이다.
앞의 용어들이 증명하듯,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합치한다고 해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모하마드 하타미 전 이란 대통령처럼 민주주의가 여러 형태를 지닐 수 있다고 보는 무슬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성을 융화해낸 이란의 이슬람 민주주의가 영성의 공백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세계 각국의 세속적 민주주의에 새로운 틀을 제공하고 귀감이 된다고 주장한다. 또 마우두디는 인간 주권을 강조하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신의 주권을 따르는 이슬람 신앙에 어긋나는 불경죄를 짓고 있다고 보고, 사회 구성원들이 신의 뜻인 이슬람법을 따르는 사회체제를 이슬람 민주주의, 곧 ‘신(神)민주주의’(Theo-democracy)라고 명명했다.
하타미나 마우두디는 모두 서구식 민주주의가 정치와 종교를 억지로 분리해 세속적 민주주의를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판은 이슬람을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규정한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1838∼97) 이래 근대 무슬림들이 서구식 민주사회 체제를 인식하는 중요한 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속’이라는 말이 무슬림 사회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온 세속이라는 말을 번역할 때 무슬림들은 아랍어로 ‘라 디니’(la dini)라고 했다.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교회의 권위와 치열하게 싸운 역사 속에서 형성된 서구의 세속주의 전통에 대한 이해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말이 된 것이다. 이렇게 세속주의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슬림이 ‘세속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불신자의 민주주의’로 곡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마우두디를 비롯해 여러 무슬림이 꿈꾸는,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무슬림은 무슬림과 결코 동등한 지위를 누릴 수 없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무슬림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이등 시민에 불과하다. 이런 사회를 현대 비무슬림들이 용인할 수 있을까?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이에 대해 프랑스의 모하메드 아르쿤(1928∼2010)을 위시한 현대 무슬림 지성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을 통해 무슬림 사회가 다양성을 포용하고 소화해낼 것을 주창하고 있다. 이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종교적 다양성과 포용의 원리 또한 코란 2장 256절에 담겨 있다. “라 이크라하 핏딘.”(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코란 계시의 원래 콘텍스트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규명해내기 어렵지만, 텍스트의 울림은 참으로 강렬하고 현대적이다.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무슬림들의 민주주의 해석은 이처럼 다양하다. 한국인이 지레짐작하는 단일한 해석은 각자의 편견 속에만 존재한다. 코란 계시에 대한 통일된 해석을 강요하는 교리청 같은 무시무시한 기구가 무슬림 세계에는 없기에, 앞으로도 무슬림의 민주주의 해석이 코란을 통해 더 풍요로워질지 모른다.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