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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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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칠수록 가까워지는 디스토피아

지난 10년과 다가올 10년을 모두 대표하는 열쇳말, 양극화…
자본주의의 비극적 승리는 계속되는가
등록 2010-12-29 17:40 수정 2020-05-03 04:26

응답자 100명은 떨고 있다. 100명의 직업은 교수·법률가·시민운동가·정치인 등이다.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이성적 판단을 내려 대중을 이끌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절망과 불안에 떨고 있다. 지난 10년을 참담하게 돌아보며 다가올 10년을 비관한다. 이들 100명의 속내는 놀라운 바가 있다. 그들이 미래를 비관하는데 하물며 장삼이사는 장차를 어찌 견뎌낼 것인가.

» 2009년 1월 서울 중구 명동 들머리에서 한 폐지수집상이 손수레를 밀며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 2009년 1월 서울 중구 명동 들머리에서 한 폐지수집상이 손수레를 밀며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끝나지 않는 롤러스코터와 같은 삶”

불안과 비관의 진앙지는 양극화다. 부자는 더 많은 돈을 벌고 빈자는 더 적은 돈을 번다. 중산층은 줄어들고 대부분 빈자로 전락한다. 응답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현실인 동시에 미래다. 설문에서 100명 가운데 24명이 지난 10년을 대표하는 열쇳말로 ‘양극화’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세계화’(22명)가 근소한 차이로 뒤를 이었다. 두 답을 더하면 얼추 절반이다. ‘소셜네트워크’(11명), ‘중국’(10명)을 열쇳말로 꼽은 경우에 비해 월등히 많다. 세계화로 인한 양극화가 지난 10년을 대표한다는 뜻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2011년 예산안 마련을 위해 최근 국회예산정책처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3년 67.7%였던 중산층이 2009년 62.6%로 줄었다.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소득 기준 상위 20%의 벌이는 하위 20%에 비해 2003년 5배에서 2009년 7.7배로 늘었다.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시장소득) 지니계수’도 1997년 0.295에서 2009년 0.345로 악화됐다. 1970년대 이래 최악의 수준이다.

전체 노동자의 임금 평균을 100으로 볼 때, 5~90인 규모의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은 1999년 80.2에서 2009년 74.7로 줄었다. 반면 500인 이상 대기업 노동자 임금은 같은 기간 130.3에서 140.3으로 늘었다. 많은 월급을 주는 대기업은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다. 5~9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는 1993년 124만 명에서 2005년 189만 명으로 늘었다. 반면 500인 이상 대기업 노동자 수는 같은 기간 210만 명에서 132만 명으로 줄었다. 대기업은 더 이상 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임금은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할 때,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고통은 기업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시민경제사회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1990년대 기업의 가처분소득은 10년 동안 197.6% 증가했고, 개인 가처분소득은 232.2% 증가했다. 기업의 이윤이 국민에게 고루 전달됐다는 이야기다. 반면 2000년대 들어 기업 가처분소득이 202.6% 늘어나는 동안 개인 가처분소득은 73.2% 증가에 그쳤다. 기업이 돈을 벌어도 국민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자들이 곳간을 걸어잠근 동안 빈자들은 자꾸만 늘어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자료를 보면, 한 달 소득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절대빈곤 가구의 비율은 1996년 3.51%에서 2006년 12.76%로 4배나 증가했다.

» 21세기 첫 10년과 앞으로 10년의 열쇳말, 통계로 본 지난 10년(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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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수치가 드러내는 2000년대 한국은 가히 아수라다.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자꾸만 수렁에 빠져든다. 지난 10년에 대한 ‘20자평’은 수렁에 빠진 한국을 단말마적으로 묘사한다. “끝나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탄 인간 삶의 막장”(엄기호 연세대 강사), “살아남은 것이 대견한 10년의 세월”(백준 제이엔케이 사장), “미친 자본주의와 통제 불능의 시장경제, 그리고 무능한 대안세력”(문석 편집장),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불안해한 시기”(금태섭 변호사), “대혼돈의 시대”(신광영 중앙대 교수).

‘양극화’와 함께 ‘세계화’를 열쇳말로 꼽은 응답자가 많은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양극화의 원인이 세계화다. 의 저자 조지 몬비오의 정의에 따르면, “부유한 나라에 사는 한 줌의 인간들이 자기들이 가로챈 지구적 권력을 이용해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훈수”하는 것이 세계화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세계화를 지탱하는 “사악한 삼총사”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세계무역기구(WTO)를 꼽는다. 이들이 강제하는 것은 정부 조직 축소, 공기업 민영화, 금융시장 개방, 무역규제 철폐, 노동조합 무력화 등이다. 사악한 삼총사가 한 나라를 아수라로 만드는 동안 “대상국의 국민은 그 논의에 접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듣지 못한다”고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통탄했다. 세계화는 다국적 금융자본의 세계적 독재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승리했지만 민주주의는 퇴보했다.”(로버트 라이시 미국 버클리대 교수)

한 줄기 희망, 소셜네트워크

다가올 10년은 다를 것인가. 응답자들은 비관적이다. 100명 가운데 17명이 앞으로 10년을 대표하는 열쇳말로 다시 한번 ‘양극화’를 꼽았다. 양극화의 아수라가 앞으로 더 깊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기타 의견 가운데도 ‘전쟁’ ‘신냉전’ ‘불안’ ‘불확실’ ‘불공평’ ‘위험사회’ ‘죽음’ ‘막장’ 등을 꼽은 이가 많았다. 그들의 관측 속에서 앞으로 10년은 디스토피아다.

다가올 10년의 열쇳말로 양극화에 뒤이어 ‘소셜네트워크’를 꼽은 이(12명)가 많은 것은 낙관을 향한 가냘픈 실마리다. 소셜네트워크는 인터넷상에서 형성되는 사람들의 관계망이다. 트위터·페이스북 등이 대표적이다. 무정형·탈중심의 자유로운 소통·연결망은 신자유주의·세계화·자본독재에 저항하는 장삼이사의 보루가 될 수 있다. 조지 몬비오는 세계화가 “새로운 정치의 자양분인 환멸을 만들어냈다”고 통찰했다. 세계화로 인한 양극화는 절망을 낳지만, 바로 그 절망이 자유시장주의 독재를 뒤엎을 새로운 정치의 출발이다. 한 줌의 부자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대다수 필부가 지닌 것은 오직 인터넷이다. 그러나 인터넷조차 부자들이 장악한다면?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절망조차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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