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연장에 찬성하십니까?”
당신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정년을 코앞에 둔 50대라면 주저 없이 “예”라고 답할 것이다. 반면 당신이 대학을 졸업한 뒤 몇 년째 직장을 구하지 못해 한이 맺힌 ‘청년 백수’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답은 오히려 “아니요”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청년에게 “은퇴를 앞둔 아버지의 정년연장에는 찬성하느냐”고 묻는다면, 다시 대답은 “예”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청년운동단체인 한국청년센터의 현필화(35) 사무처장은 “자칫 아들의 취업을 위해 아버지를 일자리에서 밀어내느냐, 아니면 아버지의 일자리 유지를 위해 아들의 취업을 막느냐는 세대 간 갈등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정년연장에 대한 공식 입장을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조심스러워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정년연장’ 문제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국내 대표기업 중 하나인 포스코가 내년부터 정년을 56살에서 58살로 연장하기로 결정하면서 정년연장을 둘러싼 논란이 용광로처럼 뜨겁다. 때마침 터진 프랑스의 정년연장 및 퇴직연금 개혁안을 둘러싼 파업 사태도 그 촉매제 역할을 했다. 국내 대기업이 정년연장을 한 것은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효시로 꼽힌다. 이후 대우조선해양, 유한킴벌리, LG전자, LS전선, 국민은행, LG디스플레이 등이 순차적으로 시행했다. 노동부 통계로는 지난해 말까지 상시 인원 100명 이상 사업장 중에서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를 함께 도입한 기업은 774개로 9.2%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중견기업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자체 조사로는 대기업 중에서는 105개사가 시행 중일 정도로 아직은 많지 않다. 올 들어서는 한국전력이 지난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애초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시행 계획을 세웠으나 청년실업 논란 때문에 과장급 이하 일반 직원만 우선 실시했다가, 지난달에야 간부들도 함께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수명은 자꾸 길어지는데 직장에서는 일찍 떨어져나오고, 사회 안전망의 뒷받침은 안 되면서 오래 사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장생(長生) 리스크 시대’가 본격화하는 것이다.정년연장은 고령화·저출산 추세와 직접적으로 연결됐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적으로 고령화·저출산이 가장 빨리 진행되는 나라다. 2000년에 고령화사회(65살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에 진입한 데 이어 2018년에는 고령사회(14% 이상)에, 2026년에는 초고령사회(20% 이상)에 각각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가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다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데 걸린 기간은 각각 18년과 8년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짧다. 고령화는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낮아지기 때문이다. 유엔인구기금이 지난 10월20일 발표한 세계인구현황보고서를 보면, 올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1.24명이다. 합계출산율은 한 여성이 가임 기간에 낳게 되는 아이 수를 모두 합한 것이다. 합계출산율이 한국보다 낮은 국가는 전체 조사 대상 186개국 중 홍콩(1.01명)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1.22명)뿐이다. 올해 우리나라 총인구는 4850만 명으로 전세계 26위다. 하지만 고령화·저출산의 영향으로 남한 인구는 2050년에는 4400만 명 정도로 줄어 42위로 추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로 고숙련 노동자 감소
삼성경제연구소는 “1984년 이래 지속된 저출산 시대에 출생한 세대가 2010년 26살로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지역 및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 경제의 성장에 주요하게 기여해온 두꺼운 생산인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양적 노동투입이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생산인구 감소는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진다. 또 사회보장 비용이 급증하면서 연금재정 부실이 가속화할 우려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1차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연령에 본격 진입하면서, 기업들은 고숙련 노동력 이탈로 인한 경쟁력 저하의 위험에 빠졌다.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인 1955년생들이 2010년 기업의 일반적 정년 연령인 55살에 달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세 차례 베이비붐을 경험했다. 1차는 1955~63년, 2차는 1968~74년, 3차는 1979~82년이다. 1차 베이비붐 세대는 모두 710만여 명(총인구의 14.6%)으로, 이 중 취업자는 55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 우리나라의 소득대체율(연금 가입 기간의 평균소득 대비 수급 연금액 비율)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09년에 발표한 회원국의 평균 소득대체율은 59%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은 42.1%로,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 고령층의 고용률이 낮은 것도 위험한 대목이다. 지난해엔 55~59살 연령층의 고용률이 65.6%로, 50~54살의 73.7%보다 8.1%포인트나 낮다. 노후 대비가 안 된 상당수 은퇴자들이 갑작스러운 생활수준 하락으로 빈곤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다는 얘기다. 노동연구원의 금재호 선임연구위원은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 노후 대비가 제대로 된 사람은 30%에 불과해 ‘노후 양극화’가 우려된다”면서 “이는 경제의 성장잠재력 저하와 주택 수요 감소로 인한 부동산 가격 붕괴 등 사회·경제적인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명은 자꾸 길어지는데 직장에서는 일찍 떨어져나오고, 사회 안전망의 뒷받침은 안 되면서 오래 사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장생(長生) 리스크 시대’가 본격화하는 것이다.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청년유니온의 조금득(33) 사무국장은 세대 간 갈등으로 비치는 것은 경계하면서도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책 제시는 없이 정년연장만 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고령화·저출산 시대의 유력한 탈출구는 은퇴 속도를 늦추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가경제와 기업, 개인을 모두 위하는 1석3조의 해법이라는 것이다. 노동연구원의 김정한 연구위원은 “황혼의 양극화를 막으려면 50대의 고용 유지와 창출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년연장이 이제 한국 사회의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얘기다. 이에 따라 국회는 60살로 정년을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동안 임금피크제 보전수당제, 고령자고용촉진장려금 등 다양한 지원책을 써온 정부는 내년부터는 근로시간을 줄이는 대신 정년을 늘리는 기업에도 지원금을 주기로 했다.
“정년을 56살에서 58살로 연장한다고 해서 일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 건강이 얼마나 좋습니까? 공장 작업도 대부분 자동화돼 있어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요. 평균수명도 80살로 높아졌는데 일찍 회사를 그만두면 뭐합니까?” 포항제철소에서 근무하는 김아무개(54) 대리의 말이다. 포스코는 임금피크제를 곁들인 정년연장안에 대한 직원투표에서 71.5%의 높은 찬성률을 기록했다. 포스코의 김동희 노무그룹팀장은 “직원들의 평균연령이 40살이 넘기 때문에 철강산업에서 중요한 숙련노동자들이 일시에 퇴직하는 데 대비할 필요가 있고, 최근 들어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건설 등 해외 사업장까지 늘어나면서 고숙련 전문인력 수요가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한전은 정년연장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포스코와 달리 원하는 사람에 한해 실시하는 희망제인데, 정년이 임박한 일반 직원 800명 중에서 790명(98.8%)이 손을 들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한전 인사제도팀의 최준원 차장은 “직원의 32%가 1차 베이비붐 시기인 1955~63년 출생자여서, 이들이 한꺼번에 회사를 그만두면 업무에 차질이 빚어진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기업의 고령자 기피가 걸림돌하지만 정년연장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청년유니온의 조금득(33) 사무국장은 세대 간 갈등으로 비치는 것은 경계하면서도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책 제시는 없이 정년연장만 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실제 실업자와 비자발적 단기취업자, 취업준비자 등을 모두 포함한 청년 취업애로층이 올해 상반기 중 116만2천 명으로, 청년 체감실업률은 무려 23%에 달한다고 분석한다. 쉽게 말해 넷 중 한 명꼴이다. 민주당의 최문순 의원도 언론사인 노사가 정년을 58살에서 60살로 2년 연장하려는 것을 두고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라고 비판했다. 청년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서 정부구독료 등 국고성 재원으로 운영하는 국가 기간 통신사가 방만한 경영을 한다는 것이다. 경영계도 추가 임금 부담이 늘어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정년연장에 찬성한다.
정년연장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과 대립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프랑스는 정부가 재정건정성을 위해 법적 퇴직연령을 60살에서 62살로 늦추고 퇴직연금 수급연령도 62살 이후로 단계적으로 늦추는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노조와 정면으로 대립했다(‘노학 연대의 이름으로!’ 기사 참조).
우리나라보다 20~30년 일찍 고령화 추세가 본격화한 이웃 일본은 종전 이후 1차 베이비붐 기간에 태어난 이른바 ‘단카이 세대’(1947~49년)의 본격 정년 도달을 앞두고 진작부터 고령자 재고용 유도정책을 폈다. 특히 2004년 고용안정법 개정을 통해 기업들이 △정년 65살로 연장 △계속고용제도 도입 △정년제도 폐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의무화했다. 한 쌍의 부부(2)가 양쪽 노부모(4)와 자식 하나(1)를 부양하는 ‘4·2·1 현상’으로 골머리를 앓는 중국도 정년연장을 통해 사회보장제도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실적으로 정년연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고령자 고용을 기피하는 기업들의 인식이 꼽힌다. 임금을 많이 받는 고령자는 가급적 빨리 내보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 결과 기업의 43.1%는 임금 부담 때문에, 39.7%는 보임 및 배치가 어려워 고령자 고용을 기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정년연장 계획이 없다는 응답이 92.6%에 달했을 정도다. 무한경쟁 시대에 임금이 근무기간에 따라 늘어나는 연공급이 일반화된 우리 현실에서 사용자만 무조건 비난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실증연구 결과 직원들의 연령별 임금 곡선과 생산성 곡선이 만나는 균형점은 대략 45살 부근이다. 즉 45살 이전에는 생산성이 임금보다 많고, 그 이후에는 반대로 임금이 생산성보다 많다. 한국노동연구원의 김정한 연구위원은 “정년연장을 위해서는 45살 이후에는 임금수준을 지금보다 낮추고 생산성은 지금보다 높여서, 두 곡선 간의 차이를 좁히는 노력을 회사와 직원이 함께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년연장이 기업의 임금 부담 증가와 조직의 효율성 저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임금피크제·지식근로자 양성 병행돼야
정년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를 병행 실시하는 것은 고령자에 대한 임금 부담을 낮추기 위한 방안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이상철 사회정책팀장은 “고령화 추세를 맞아 숙련 인력의 일시적 퇴진을 막기 위해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병행 실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정년연장을 위해서는 고령자 고용에 적합한 급여제도와 함께 직무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정년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의 상당수는 정년연장 대상자에게 부서장 직책을 맡기지 않고 있다. 기존 직원들의 승진 적체에 대한 반발을 감안한 것이다. 한 국책은행의 간부는 “정년을 앞둔 고령자는 거의 하는 일 없이 1억5천만원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는데, 본인들도 일은 안 하면서 돈만 받아가는 것 같아 괴로워한다”고 말했다. 직장 내 평생학습 체제 구축을 통해 직원을 지식근로자로 양성함으로써 고령화에 따라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혁신을 이뤄낼 수 있도록 하는 유한킴벌리식 뉴패러다임 같은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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