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한 권력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후계 체제와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후계자로 내정된 셋째아들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권력 승계의 과정에 ‘올인’하고 있다는 뜻이다. 외부에서는 3대 세습의 ‘봉건성’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지만, ‘유일 지배’를 특성으로 하는 북한의 권력이 승계 문제에 온 힘을 쏟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 위원장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회복하기는 했지만 왼쪽 다리와 손의 사용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로서는 권력 공백을 최소화하는 데 역점을 둘 수밖에 없다.
권력 승계를 위한 노동당 재정비이런 맥락에서 박의춘 외무상이 7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무한하게 안정적인 정세가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 것도 현재 상황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보여준다.
북한이 이르면 9월 둘쨋주에 개최할 것으로 보이는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가 주목되는 것 역시 후계 구도 때문이다. ‘44년 만의 개막’을 앞둔 가운데 이번 회의는 다음 세대 북한 체제의 ‘밑그림’을 보여줄 것이라는 관측이다.
무엇보다 ‘후계자 김정은’의 대내외 공식화와 관련해 이를 뒷받침할 북한 노동당이 어떤 위상으로 재정립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당의 핵심 요직으로 ‘권력 서열 2위’로도 지칭되는 중앙위 조직담당 비서에 선출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정은이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이나 정치국 위원, 또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을 겸직할 것이라는 예상도 제기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회의에서는 노동당의 재정비에 우선 초점을 맞추고, 후계 문제는 재정비된 당 체제에서 논의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노동당은 1998년 김정일 체제가 문을 열면서 국방위원회가 급부상하는 가운데 지난 30여 년 동안 정례행사를 제대로 열지 못할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사실 북한이 당을 다시 정비하려는 징후는 진작부터 나타났다. 예컨대 지난 6월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에서는 당 중앙위 정치국의 제의에 따라 최영림 신임 총리가 선출됐다.
이번 당 대표자회에서 주목할 대목은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을 위한 대대적인 정지작업이다. 김정은이 어떤 공식 직책을 맡게 될지 아직 불투명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김정은 후계 체제가 탈 없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당 조직을 정비하고 측근들을 전진 배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북한이 이번 당 대표자회를 중시하는 저변에는 허술한 노동당 조직을 그대로 두고는 후계 구도를 만들어가기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실제로 북한은 1980년 6차 당대회를 끝으로 이후에는 단 한 차례도 당대회를 열지 않았고, 1993년 12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 이후로는 당 전체가 참여하는 규모의 공식 행사가 전혀 열리지 않았다. 이런 흐름을 보면 북한 노동당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최고 지도자로 나선 이후 본연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실례로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140명에 달했던 당 중앙위원 가운데 상당수가 그 뒤 사망하거나 해임됐지만 지금까지 다시 채워지지 않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위원, 비서국 비서 자리도 여러 개 비어 있는 상태다.
“조-중 친선의 바통을 후대에”당 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포인트 중 하나는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 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후계 구도의 후원인 역할을 해온 장성택이 당내 입지를 한층 더 강화해 후계 구도 구축 전 과정을 총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김경희 당 경공업부장의 남편)인 장성택은 지난 6월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에서 국방위 부위원장에 발탁된 이후 북한의 ‘2인자‘로 통할 만큼 힘이 쏠려 있다. 이번에 장성택이 감투를 하나 더 쓴다면, 현재 김정일 위원장 혼자 맡고 있는 당 정치국의 상무위원으로 가거나 군부 내 입지를 고려해 당 중앙군사위 위원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조만간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당 대표자회는 북한의 미래 구상을 점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대목은 김정일 위원장이 회의를 앞두고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방중 기간 김 위원장은 무엇보다 김정은 후계에 대한 중국 쪽의 지지를 강력하게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에서 “조-중 친선은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질 수 없다”고 말했고, 곧이은 환영만찬에서도 “조-중 친선의 바통을 후대에 잘 넘겨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후계 체제를 세워나가다 천안함 사건으로 한국과 미국의 엄중한 제재를 맞고 보니 결국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중-조 친선을 대를 이어 전해가는 것은 쌍방 공동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답해 우회적인 공감 표시가 아니냐는 분석을 낳았다. 그동안 미국과 체제 보장 협상을 벌여온 북한이 오바마 행정부가 압박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중국에 현재와 미래의 체제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김 위원장은 또 후계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핵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중국 쪽의 도움을 약속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사례에서 보듯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후계 문제라는 내정에만 국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 문제에서 대폭 양보하고, 중국은 북한에 경제협력과 체제 안정 지원을 약속했다는 이른바 ‘빅딜설’까지 나오고 있다.
북-중 관계가 밀착하는 가운데 이번 당 대표자회에서 당장 새로운 정책 노선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조만간 정책 변화를 추진할 개연성이 높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일단 경제 쪽에서는 ‘시장’ 중심의 점진적 개혁 가능성이 신중하게 거론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지난해 11월 말 화폐 개혁을 단행한 뒤 올해 1월 시장 폐쇄 등 ‘반시장적’ 조처를 강행했다가 걷잡을 수 없는 물가 폭등과 민심 이반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한 만큼 기업의 자율성 확대나 시장거래의 추가적 허용 같은 개혁성 조처를 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이번 방중에서는 후진타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빠른 발전을 이룩해 어느 곳이든 생기가 넘친다”며 중국의 개혁·개방을 높이 평가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낸 것도 시장 도입의 기대감을 높인다. 또 시장주의자로 몰려 2007년 4월 지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던 박봉주 전 내각 총리가 3년4개월 만에 노동당의 제1부부장으로 복귀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특히 박봉주를 배치한 자리가 김정일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가 부장을 맡고 있는 당 경공업부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여기에다 핵협상에서도 적극성을 띠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제기된다. 후계 체제의 안착을 위해 정세의 안정적 관리가 필요한 만큼 북한이 6자회담 등에서 전격적인 카드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9월이 북한 변화의 결정적 시기미국 국무부의 필립 크롤리 공보담당 차관보가 지난 9월1일 “북한이 앞으로 수주간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가 중요하다. 우리의 대응은 북한의 행동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며 대화 재개 가능성을 시사한 대목도 주목된다. 김 위원장이 방중 과정에서 중국에 전달한 제안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 때문이다.
당 대표자회를 앞두고 아직은 전망과 추측이 난무할 뿐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번 회의를 통해 북한은 자신의 미래를 끌고 갈 구도를 갖출 것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이 구도가 북한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회의에 안팎의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장용훈 북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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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