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끝나는 날까지 죽을 각오로 일할 것이며, 남들이 얘기하는 레임덕은 없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하는 말이라고 한다. 어느 대통령이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을 겪고 싶으랴만, 아예 레임덕이 없다고 단언하는 이 대통령은 좀 유난스러운 것 같다. 임기 5년 가운데 꼭 절반을 채운 지난 8월25일에도 그는 ‘반환점’이라는 표현을 두고 “대통령 임기는 (반환점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주욱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청 청와대 대변인은 “(임기의) 시간을 분절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당부”라고 설명했다. 이날 청와대는 집권 전반기를 돌아보거나 후반기를 준비하는 의미의 행사도 별달리 진행하지 않았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7월23일 CBS 라디오 에서 이런 말을 했다. “레임덕은 밤안개라고 생각해요. 어느새 스멀스멀 다가와서 다 적셔버리는…. 레임덕이 그런 겁니다.” 고 박사의 지적처럼 이 대통령의 레임덕은 이미 스멀스멀 시작된 게 아닐까. 이르게는 집권 석 달 만에 지지율이 한 자릿수대로 곤두박질하면서 조기 레임덕이 온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 적도 있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할 날이 지금까지 해온 날보다 짧은 지금은 좀더 뚜렷한 레임덕의 징후가 나타난다.
한나라당, 계파 가리지 않고 내각 인선 비판첫 번째가 김태호 전 국무총리 후보자를 향한 한나라당의 엄청난 거부 반응이었다. 후보자 지명 직후인 8월8일만 해도 한나라당은 안형환 대변인 논평을 통해 “김 후보자는 정치력과 행정력을 고루 갖춘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젊고 참신한 이미지를 지니고 지역 현장에서 성장해온 정치인으로 민심을 국정에 잘 반영할 것으로 본다”고 환영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미래권력을 향한 독주’가 못마땅했던 이명박계 의원들은 차기 주자 다변화라는 점에서 김 전 후보자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인사청문회에서 도청 직원 가사도우미 활용, 스폰서 의혹 등이 불거지고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의 친분이 드러나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됐다. 계속되는 김 전 후보자의 거짓 해명에 급기야 8월26일엔 한나라당 지도부 일부가 공개적으로 김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했고, 이튿날 의원총회에선 봇물 터지듯 자진 사퇴 요구가 터져나왔다.
사실 자질 시비나 도덕성 논란 등은 이 정부 들어 총리, 장관, 청와대 수석 등의 인사가 있을 때마다 불거진 문제였다. ‘강부자·고소영 내각’을 발표한 집권 초기만 해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여론에 비해 한나라당의 반응은 미지근한 편이었다. 그런데 임기 절반을 지나면서 당이 청와대의 결정에 ‘딴죽’을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의원총회에서 김 전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주장한 의원은 이명박계 심재철·권영진·정태근·박준선 의원, 박근혜계 이종혁 의원, 중립의 유정현·홍일표 의원 등으로 계파를 가리지 않았다. 그만큼 인선이 적절치 않았다는 인식을 두루 공유했다는 뜻이고, 그런 인식을 입 밖으로 꺼낼 만한 상황이 됐다는 뜻이다.
주목할 대목은 이종혁 의원을 제외하곤 발언자가 모두 수도권에 지역구를 뒀다는 점이다. 수도권은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핵심적인 기반이었고, 그에 힘입어 2008년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지역구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수도권 의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공개적인 발언을 잘 하지 않는 유정현 의원은 이날 의원총회에서 “맛있는 밥상이 차려져 있어도 식당 주인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레 같은 행주로 식탁을 닦으면 손님은 다시는 그 식당을 찾지 않게 된다”며 격한 표현을 썼다. 왜 그랬을까? 유 의원의 설명은 이렇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국민이 다시 찾을 만한 식당이 돼야 한다. 그런데 지역구를 다녀보니, 분위기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쁘더라. 총리·장관 후보들이 국민 눈높이에 한참 함량 미달이라는 거였다. 큰일이다 싶었다.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잘 안 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자진 사퇴하라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방어막’이 사라진 김 전 후보자와 신재민 전 문화관광체육부 장관 후보자, 이재훈 전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일제히 사퇴한 뒤 열린 8월30~31일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의원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후보 사퇴로 끝낼 일이 아니라, ‘죄송 내각’ 인선 관련자를 문책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심지어 친이 직계인 김용태 의원은 “의혹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검증팀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검증팀에서 충분히 파악했는데 강행했다면 그 인사 결정권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김 의원은 인사 결정권자가 “정무적 판단을 한 일단의 그룹”을 뜻한다고 부연했지만, 실상은 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적지 않았다. 한편 김무성 원내대표는 “당정협의를 적극 강화해 국민과 당의 의견을 정부 정책에 반영시켜 당이 국정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며 ‘결기’를 보였다.
“대통령 인기보다 총선에서 살아남는 게 관심사”‘거수기 공룡 여당’으로 불릴 만큼 청와대와의 관계에서 ‘을’이던 한나라당이 이렇게 ‘갑’이 되겠다며 나서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밥그릇’이다. 이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을 돌아섰다는 말은 18대 국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4년 계약직’인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생존하느냐 마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더구나 2012년 총선은 대선보다 여덟 달 먼저 치러야 하기 때문에 18대 총선처럼 의원들이 ‘묻어갈’ 권력의 인기는 견고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대통령 임기 말의 선거는 ‘정권 평가’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여당 의원들로선 여론이 나쁜 사안을 놓고 청와대를 함부로 두둔했다간 더욱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이제 의원들은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아니라 다음 총선에서 자기가 살아남느냐가 문제다. 지금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아닌데, 누가 대통령이 시킨다고 무조건 말을 듣겠느냐”고 말했다.
불법 사찰을 도화선으로, ‘피해자 3인방’ 남경필·정두언·정태근 의원이 이상득 의원을 겨냥해 ‘배후론’을 거세게 주장하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한 징후다. 정태근 의원은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이상득 의원이 청와대와 국정원에 의해 사찰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미 구속된 이인규(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지원관)·진경락(전 기획총괄과장)만 제대로 수사해도 사찰 배후와 전모를 밝힐 수 있는데, 검찰은 당사자 고발이 없기 때문에 수사를 안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검찰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며 직접 이상득 의원을 지목했다. 남경필 의원도 조지 오웰의 소설 에 빗대 “(불법 사찰의 배후에) ‘빅브러더’가 있다”며 이 의원을 조준했다. ‘이상득 배후론’에 더해 정두언 의원은 “국무총리실에서 민간인 사찰 문제가 발생해도 아무도 문책하지 않았다”며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실질적으로 관리했다는 의혹을 받는 박영준 전 국무차장(지식경제부 2차관)도 함께 겨눴다.
이상득 의원 자신은 이런 공세에 직접 대응하지 않는 가운데, 이 의원과 가까운 원희룡 사무총장은 9월2일 CBS 라디오 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당사자들이,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 관련 수사가 부실하다는 이들의 주장을 놓고는 “수사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문제를 삼는다면 사법제도에 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여기서 잠시 18대 총선을 앞둔 2008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나라당 공천이 ‘형님 공천’으로 귀결되자 그렇잖아도 ‘강부자·고소영 내각’에 들끓었던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자 남경필 의원이 경북 포항으로 이상득 의원을 찾아가 공천 반납을 요구했다. 이어 정두언·정태근 의원 등 수도권 출마자 55인이 이에 동조하며 “인사 파동을 초래한 청와대 관계자 사퇴”, 즉 인사 핵심 실무를 맡았던 박영준 당시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사퇴까지 요구하기에 이른다. 반면 소장파로 분류됐던 원희룡 의원은 “밑에 깔려 있는 게 사실은 권력투쟁”이라며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 남·정·정 의원 등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정두언 의원은 석 달 뒤 언론 인터뷰를 통해 ‘권력 사유화’ 문제를 제기해 박영준 당시 비서관이 청와대를 떠나도록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도 이명박계 주류에서 소외당하고 말았다. 반면 원 의원은 당 쇄신특위위원장,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 등에 이어 최근엔 당 사무총장을 맡게 됐다. 그리고 2년6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 기시감이 들 만큼 ‘전선’은 다시 살아나 반복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창업 공신’인 두 정 의원의 문제제기를 놓고 “왜 이러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득계로 분류되는 장제원 의원은 9월1일 자신의 트위터에 “정확한 근거와 증거 없이, 개인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관계인데도 공개 석상에서 새까만 후배가 20여 년간 한나라당을 지켜온 선배를 정면 공격하는 잔인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일반적 인생살이에서도 이런 것들을 패륜적이라고 얘기한다”며 원색적으로 이들을 비난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2008년 초와 달리 지금은 이들의 문제제기가 이명박계의 본격적인 ‘분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를 정점으로 한 ‘단일대오’로 간주된 박근혜계와 달리 이명박계는 애초부터 ‘대선 승리’라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여러 갈래의 집합이긴 했다. 대통령에게 힘이 집중되는 정권 초기엔 ‘우리가 만든 정권, 대통령 덕분에 당선된 의원’이라는 인식도 일정 부분 공유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고 나면 각자의 길은 달라지는 법. 이후의 생각이나 이전의 친소 관계에 따라 같은 이명박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재오 특임장관 같은 당내 구심점이 없었다는 점도 원심력으로 작용해왔다. ‘55인 성명’ 때만 해도 비록 동참자는 많았어도 주동자를 강력히 통제하는 한편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어둘 힘이 대통령에게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불법 사찰의 심각성에 주목하는 중립 성향과 일부 박근혜계 의원들도 세 의원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이명박계 한 인사는 “불법 사찰과 그 문제제기는 이명박계가 ‘핵분열’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결국 차기 권력 창출 방식과 국가 운영 방법, 추구하는 가치 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우려 탓인지 이재오 특임장관은 지난 9월1일 정두언·정태근 의원을 잇따라 만났다. 두 의원은 사찰을 당한 내용과 ‘이상득 배후론’을 제기하는 이유 등을 설명하고, 사찰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이 의원은 별다른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내부 분열을 막아보려는 조처는 조만간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불법 사찰 문제를 제기한 의원들도 이 국면이 권력다툼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은 부담스러워 한다.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한 남경필·정두언 의원의 단일화를 통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 세 사람이 불법 사찰 국면을 이용해 차기 대선 등 ‘훗날’을 도모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얻을 게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의 초점은 더욱 불법 사찰 배후 규명에 맞춰진다. 정태근 의원은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며 “청와대에서 확실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찰 근거를 공개하는 등 계속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카트리나 모멘트’는 언제 올 것인가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앞으로 정기국회가 끝나고 종합편성채널(종편) 사업자 선정이 끝나는 연말까지가 ‘카트리나 모멘트’(Kathrina Moment·2005년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해 벌어진 재난에 부시 정부가 정실 인사 등으로 인해 허술하게 대처함으로써 미국 국민이 이들에게 기대를 접게 된 결정적인 시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각종 의혹과 현안의 문제점이 정기국회에서 제기되면 권력에 상처가 나는 건 당연하다. 종편의 경우 아직 사업자 수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사업성 보장 등의 이유로 종편을 원하는 모든 언론사가 사업권을 따낼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종편 사업 때문에라도 정권을 감싸고 돌던 보수 언론이 종편에서 탈락하면 태도를 바꿔 정권에 각을 세우기 시작할 수 있다. 이 부소장은 “정부가 새로 내놓은 ‘공정한 사회’라는 담론도 그에 걸맞은 내용을 내놓지 못하면 레임덕을 늦추지는 못할 것”이라며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여당이 이완될 빌미를 주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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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지지율이 안정적인 40%대인데 레임덕이라니, 앞뒤가 안 맞는 애기가 아닐까?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은 대체로 수수께끼다. 주변에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는데, 2008년 촛불 국면과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를 제외하면 늘 ‘체감 이상’이었다. 지금은 40~50%의 지지율을 자랑하는데도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말이 나온다.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지난 6월 여권 핵심부가 심리분석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작성한 ‘대통령 이미지 분석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보고서는 시민 50여 명을 심층 인터뷰했는데, 응답자의 41%가 이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의 지지율과 비슷한 수치다. 그런데 이 대통령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를 조사한 선호도 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선호도 점수는 5점 만점에 평균 3.5점에 그쳤다. 보고서는 이를 ‘방관형 지지’라고 분석했다. 정말 좋아서 지지하는 게 아니며, 지지의 강도가 높지 않다는 뜻이다. 여권 관계자는 “오갈 데 없는 보수 세력이, 대통령이니까 혹은 직접 잘못한 것처럼 보이는 일은 없으니까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응답자의 44%는 이 대통령을 무조건 싫어하며, 이들의 대통령 선호도는 1.9점에 불과했다.
“민주주의는 결과뿐만 아니라 절차와 과정도 중요하다. 경제성장 실적만으로 평가받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윤리적·도덕적으로도 명실공히 선진국가가 되어야 한다.” 지난 7월30일 이 대통령이 청와대 확대비서관회의에서 한 말이다. 그 무렵 여당 의원 불법 사찰 문제가 불거졌고,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내용 없이 포장만 화려한 말이 모래성 같은 지지율로 정권을 지탱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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