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처음 읽었을 때 이것은 ‘이순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훈’의 이야기구나 했다. ‘이순신’은 박물관의 유물이고, ‘김훈’은 살아 있는 욕망의 현재다. 역사인물 ‘이순신’은 항상적으로 자연에 속하는 ‘김훈’의 대리인이다. 나는 를 ‘과거-유물’에 내장된 소멸되지 않은 증거들에 기대어 ‘현재-삶’의 욕망함이 품은 발랄함의 뜻없음과 지리멸렬함을 적시하는 소설로 읽는다. 약육강식 질서에 포획된 몸의,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욕망함의, 진퇴양난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다. 그 욕망함의 윤리성에 대해 묻는 기표가 바로 피로다.
약육강식에 포획된 몸의 진퇴양난
〈칼의 노래〉
“바다에서 나는 늘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했다” “다시 거꾸로 흐르는 북서 밀물 위에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 “동틀 무렵에 코피를 쏟았다. 뒷골이 당기면서 더운 피가 쏟아졌다” “군법을 집행하던 날 저녁에는 흔히 코피가 터졌다. 보고서 쪽으로 머리를 숙일 때, 뜨거운 코피가 왈칵 쏟아져 서류를 적셨다”와 같이 주르륵 쏟아지는 문장들에서 피로는 몸과 욕망함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며 그 실재를 뿜어낸다. 몸은 감당할 수 없는 것(에서는 국가라는 포획 장치)에 맞닥뜨리면서 그 피로함을 드러내는데, 이때 한계의 징후로서 출현하는 피로는 몸이 이 세계와 자아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이자 틈이라는 것, 크고 작은 욕망들이 솟구치고 가라앉는 장소라는 것, 그리고 세계에 대해 항상적으로 실패하고 좌초하는 것임을 말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피로는 정신적 체감이요, 육체 속에 살 수 있는 무한성이다. 김훈은 피로와 그것의 윤리에 대한 물음에 맞설 때 발랄해진다. 피로가 개별자에게 회수된 개별성을 되돌려주는 매질(媒質)이고,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느슨한 자아가 나아가는 대의에 대한 태만의 궤적임을 증언할 때 김훈의 상상 세계는 생동한다.
김훈은 이념을 믿지 않고, 굳센 신념을 회의한다. 믿는 것은 몸의 헐떡거림이요, 기대는 것은 자연의 어김없는 순환성이다. 둘 다 사람을 피와 살을 가진 본래적 개별자로 되돌려놓는 까닭이다. 김훈은 제 소설의 공간으로 이념과 신념에 의해 날조되는 인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인 개별자를 초대하고, 무른 살과 느슨한 신념들이 어떻게 단단한 세계와 이념들에 부딪혀 깨지고 땀과 피를 흘리며 무너져내리는지를 차갑게 따라간다. 그때 김훈은 유물론자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 이념의 목적론은 의식을 도식으로 재단하고, 회의하지 않는 신념은 이성을 물화(物化)로 몰아간다. 김훈은 강고한 이념의 옥죔을 생래적으로 싫어하고, 굳은 신념으로 분출하는 당파성을 혐오한다. 둘 다 사람을 피와 살이 없는 ‘이념-기계’나 ‘신념-기계’로 환원하는 까닭이다.
그가 이념보다는 밥에, 신념보다는 똥과 오줌에 더 이끌리는 것은 이념과 신념은 헛것이고, 밥과 똥과 오줌은 실상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은 밥이 개별자의 입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긴 도정을 따라가고, 그 어려움에 밥이 몸에서 소화돼 똥과 오줌으로 나오기까지의 어려움을 겹쳐낸다. 소설가는 그 겹침 위에서 ‘삶은 살 만한 것인가’라고 우리에게 끈질기게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함과 끈질김 속에서 김훈의 웰메이드 서사가 탄생한다.
피로 때문에 대의를 살아내지 못하고 무너지는 몸의 허무와 지리멸렬함을 명석하게 그린 가 지난 10년간 나온 소설 중에서 상품(上品)으로 지목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건이다. 이 소설은 언어와 삶 사이의 고투에서 거둔 전리품이다. 소설의 근골은 균형 잡혀 있고, 근골을 감싼 문장은 명석하다. 아울러 그 명석함이 운반하는 사유가 품은 핍진성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런 덕목들 때문에 종종 를 내가 쓴 것이면 좋겠다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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