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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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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파르티잔의 선언이자 실패담

최고의 시집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문학이라는 언더그라운드, 시라는 외딴 방에서 탄생한 변종
등록 2010-09-02 16:49 수정 2020-05-03 04:26

2000년대 한국은 가히 ‘괴물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기괴하고, 변태적이며, 낯선 것들이 모든 분야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다. 영화감독 홍상수가 “우리가,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2002)고 울먹이며 말했건만 결국 승리자는 ‘괴물’로 판명됐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발생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독점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통해 맘껏 자신의 욕망을 먹고 마시고 토하고 배설하고 있다. 봉준호의 은 2006년에 등장해 텍스트 밖으로는 전국의 스크린을 독점하며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텍스트 안으로는 가난한 자들, 쓸쓸하지만 다정한 사람들, 경쟁에서 도망치는 자들을 먹어치웠다. 의 영어 제목 ‘The Host’가 알려주는 것처럼 그들은 전체주의적 쾌락의 파티에 우리를 초대하는 이 시대의 ‘주인’이다.
 
정상 궤도를 벗어난 인물·공간·이미지

〈여장남자  시코쿠〉

〈여장남자 시코쿠〉

그리고 여기 또 다른 ‘괴물’이 있다. 이것은 문학이라는 언더그라운드, 그중에서도 시라는 외딴 방에서 탄생한 변종이며, 더 크게 패배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 위에서 울부짖는 ‘황야의 트랜스젠더’다. 영웅적 음란함과 우주적 관능으로 치장한,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것의 이름은 리타이며, 키티이며, 소년이자 소녀이고, 때론 쥐, 도마뱀, 검은 염소와 같은 동물이기도 한 “하나이면서 모든 것”인,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이면서 모든 순간인 세계로부터 추방”된 인간 ‘시코쿠’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의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시코쿠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위반의 쾌락을 탐색하는 여정을 펼친다. 하지만 ‘비 내리는 조지아’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 ‘판타스틱 로맨틱 언덕’ ‘앨리스 맵’ 등 무국적적이며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을 관통하는 여정을 통해 시코쿠가 얻는 것은 열락이 들끓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수줍고 쓸쓸한 내면을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상처다.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라고 외치며 “순돈육 자지를 달고 불 속을 걸”어가는 시코쿠는 동일성으로 무사 귀환하는 자아가 아니라 각기 다른 타자의 모습으로 고통스럽게 인간을 사유하는 주체다.

다른 괴물이 노골적일 정도로 알기 쉬운 것에 비해(은 12세 관람가이다) 황병승의 그것은 어렵다. 황병승의 시가 난해하게 읽히는 이유는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인물·공간·이미지들이 만드는 생경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가 일반적 장르 규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형식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황병승의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지만 이것들을 ‘시’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의 이름은 ‘이야기’ ‘편지’ ‘엽서’ ‘연주’ ‘노래’ ‘소설’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언’이며 ‘고백’이다. ‘선언’(Manifesto)은 그 특성상 어떤 특정한 미래를 실현하려는 확고한 의지이며 실천인 동시에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던지는 패배의 운명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언어다. 그렇기에 황병승의 캐릭터는 “나는 선언의 천재”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동시에 “나의 실패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던지는 언어는 사실보다는 욕망에 기초한다. 그것은 현실을 찢고 변화를 선취하려는 절실한 욕망이다. “이제 연주는 끝났습니다/ 나는 선언의 천재/ 사계절을 저지르며 거듭 태어난 포 스타/ 침묵과 비명의 일인자인 철문이여/ 얼음으로 만들어진 찬 변기여/ 그리고 너 속 검은 의자여/ 연주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이 겨울의 철문을 나서며 날두부를 먹으리라/ 그러나 덜컥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 더 큰 죄를 짓기 위해…”(‘사성장군협주곡’에서) 는 ‘주인’과 싸우는 ‘주체’, 괴물과 악무한의 전투를 벌이는 트랜스젠더 파르티잔의 선언이자 실패담이다.

 

패배의 또 다른 이름, 혼돈과 창조

시코쿠는 분명 패배했다. 패배는 시코쿠의 운명이지만 그의 창조력 넘치는 자궁의 혼돈은 또 다른 시코쿠를 만들어낼 것이며, 싸움은 계속되고 패퇴한 주검이 안온한 공간에 가득할 것이다. 결국 당신은 이곳이 폐허이며 시취 가득한 전쟁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보라! “당신이 침을 뱉은 그 아이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데이비드 보위 〈Changes〉 가사 중에서)

서희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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