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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들은 다시 수첩 대신 깃발을 드나

20년 만에 두 번째 결방 사태 맞은 〈PD수첩〉…
‘4대강 수심 6m의 비밀’편 만든 최승호 PD 등이 말하는 언론자유의 위기
등록 2010-08-27 16:27 수정 2020-05-03 04:26
〈PD수첩〉 방영 보류 결정을 내린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이 8월19일 오전 여의도 문화방송 사옥 로비에서 노조원들을 지나쳐 출근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PD수첩〉 방영 보류 결정을 내린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이 8월19일 오전 여의도 문화방송 사옥 로비에서 노조원들을 지나쳐 출근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1990년 9월4일 오전, 박신서 PD는 편집을 마쳤다. 〈PD수첩〉 15회분이었다. 1981년 입사한 박 PD는 〈PD수첩〉의 창립 멤버였다. 〈PD수첩〉은 문화방송 최초의 본격 시사 고발 프로였다. 박 PD는 1·2·5·7·8·10·12회의 취재·보도에 참여했다. 한 번에 두 개 꼭지를 묶어 방송했는데, 꼭 하나씩 박 PD 몫으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이날은 달랐다. 12회 이후 시간을 조금 벌었다. 2주 이상 취재에 공을 들였다.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뒤 처음으로 두 꼭지가 아닌 한 꼭지만 다루기로 했다. ‘농촌은 뿌리, 도시는 꽃’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예고편은 이미 방송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을 두고 농민들이 크게 반대하고 있었다. 장마로 진흙탕이 된 길바닥에 앉아 UR 협정 반대를 외치는 농민들의 모습이 박 PD의 눈에 선했다. 편집까지 마쳤으니, 밤 10시면 방송이 시작될 것이다. 테이프를 건네받은 주조정실에서 전국을 향해 전파를 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PD수첩〉이 될 것이라고 박 PD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시사교양국장도 당황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노태우 정권이 임명한 최창봉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방송 시작 5시간여를 앞둔 오후 4시30분께, 최 사장은 방송을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박 PD는 곧장 사장 면담을 신청했다. 사장은 완고했다. 때마침 남북 장관회담이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 시점에 우리 치부를 보여주는 것은 안 된다”는 게 사장의 생각이었다.

다시 노조위원장 등이 올라가 사장과 면담했다. 뒤이어 시사교양국 PD들이 사장실에 몰려가 연좌했다. 사장은 꿈쩍하지 않았다. 밤 10시가 지났다. 사상 초유의 결방 사태였다. 일주일 뒤, 박 PD가 만든 프로그램은 우여곡절 끝에 전파를 탔다. 거센 항의를 뒤늦게 무마한 셈이었으나, 박 PD는 〈PD수첩〉팀에서 물러났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고 박 PD는 말한다.

살아나는 노태우 시절의 ‘UR 협정’ 결방

1984년 입사한 송일준 PD도 지금은 〈PD수첩〉에 있지 않다. 그 역시 ‘원년 멤버’다. 박 PD를 비롯한 창립 멤버들이 모두 물갈이된 직후인 1990년 10월, 송 PD는 〈PD수첩〉에 합류했다. 그는 〈PD수첩〉 결방 사태의 후폭풍 속에 있었다. 사장에게 항의했던 노조위원장 등이 해고됐다. 대하드라마 이 비슷한 정치적 이유로 조기 종영됐다.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일에 대한 문화방송 구성원들의 각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1992년, 문화방송은 한국 언론 사상 최장 기간인 50일 동안 파업했다. 파업 직전인 1992년 9월1일, 송 PD가 만든 〈PD수첩〉이 방영됐다. 파업 종료 직후인 11월13일, 송 PD는 〈PD수첩〉의 복귀를 알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압력에 의해 방송을 만드는 대신 스스로 방송을 접었던 두 달 동안, 송 PD를 비롯한 문화방송 기자·PD들은 사문화됐던 ‘공정방송 이념’을 구체화·제도화했다. 담당 국장이 보도 내용을 책임지는 ‘국장책임제’를 노사 단체협약에 강화해 명시했다. 외부 압력이 경영진을 통해 PD·기자에게 가해지는 통로를 차단한 것이다. 공정방송 조항을 만들기 전까지, 문화방송 PD들은 전두환 정권이 치적으로 내세웠던 ‘한강 치수사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휴먼다큐 에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표창받은 인물이 등장했다. “그런 일을 치르며 자괴감에 시달린 문화방송 구성원들이 다시는 언론 자유를 권력에 뺏기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이 공정방송 조항이었다”고 송 PD는 말했다.

송 PD는 스스로 “목소리 크고 주장이 강한 사람은 좀체 신뢰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판단하려 애쓰는 타입”이라고 말한다. 2008년, 그는 상식에 입각해 정부 정책의 허점을 톺아보는 〈PD수첩〉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편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다른 부서로 발령났다. 정부는 그를 비롯한 제작진을 고발했다. 1심 무죄판결에도 승복하지 않고 항소했다. 송 PD는 2심 공판을 준비하다 20년 만에 〈PD수첩〉 결방 소식을 들었다. “뭐랄까,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종교단체가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한 적은 있지만 정부가 직접 나선 건 처음이고, 어쨌건 사법부는 방송해도 된다고 판단했는데 굳이 경영진이 나섰으니….”

최승호 PD도 〈PD수첩〉이 결방된 1990년 9월을 잊을 수 없다. 바로 그 무렵, 그는 조연출자(AD)에서 연출자(PD)로 올라섰다. 1986년 입사한 최 PD는 ‘국장책임제’가 정착된 1995년 〈PD수첩〉에 참여했다. 그는 다섯 차례에 걸쳐 〈PD수첩〉을 들락거린 ‘단골 멤버’다. 다른 프로를 하다가도 곧잘 돌아왔다. 시사교양국 안에서도 드문 이력이다. “언제나 〈PD수첩〉에서 일하고 싶었고, 항상 더 오래 있고 싶었다”고 최 PD는 말한다.

지난 4월 ‘검사와 스폰서’편을 만들어 방송한 뒤, 6월부터 4대강 프로젝트 취재에 매달렸다. 헬리콥터를 타고 공사 구간을 돌면서 “어마어마하게 참혹한” 현장을 봤다. 강바닥을 긁어내는 준설은 20% 정도 진행됐다. 그래도 이런 상황인데, 앞으로 80%를 더 파낸다면? 물 부족 해결, 홍수 조절, 생태계 보호 등의 목적을 이뤄낼 만큼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준비돼 있지 않다면? 자연환경에 근본적 변형을 가하는 일이 충분한 동의를 거치지 않았다면? 그런 물음을 던지는 ‘4대강 수심 6m의 비밀’편을 만들었다.

지난 8월17일, 방송 2시간여를 앞두고 김재철 사장은 〈PD수첩〉 869회의 방영을 보류시켰다. 국토해양부가 서울남부지법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가 기각당한 직후였다. 김 사장은 사전에 내용을 보겠다고 했고, 제작진은 거부했다. 경영진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사장이 먼저 보지 않는 한 내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 PD는 기막혀하고 있다. “그건 저희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입니다. 노사 간 최고의 약속이자 지난 20년 동안 전통과 규범으로 자리잡은 단체협약상 ‘공정방송을 위한 국장책임제’를 위반하는 일이거든요.”

“세상은 정말 바뀌었나”

20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 당시 최 사장은 “나중에 방영하자”고 했다. 지금 김 사장은 “내가 보기 전엔 안 된다”고 한다. 20년 전, 시사교양국 연출자의 막내였던 최 PD는 “그걸 허용하는 순간, 독립언론 문화방송의 위상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므로, 그 점에 관해 절대 타협은 없다”고 말한다. 20년 전 파업의 한복판에서 〈PD수첩〉을 맡았던 송 PD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일선 언론인의 99.9%가 일체의 압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취재·보도했는데, 이제 그런 상황이 더 이상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20년 전, 〈PD수첩〉의 산파 노릇을 한 박 PD는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는데, 세상이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정말 그런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년 전, 〈PD수첩〉 결방 사태는 50일에 걸친 장기 파업으로 이어졌다.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면,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 시절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다면, 압력에 따라 방송하는 대신 스스로 방송을 접는 PD와 기자들이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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