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휴일에 나와 쓰레기 줍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들 해.”
지난 7월 전남의 한 농협 지점. 지점장의 으름장에 직원들의 어깨가 굳어졌다. 예금 창구 담당 직원인 김은영(36·가명)씨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모멸감이 든다”고 했다. 지점장이 직원들을 단속한 이유는 ‘고객 서비스(CS) 평가 기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해마다 전국 3449개 농협 지점을 평가해 줄 세우는 ‘일제고사’식 고객 만족 평가 기간이 시작될 때마다 전 직원이 예민해진다.
2년 전 지점장의 으름장이 현실화된 적이 있다. 당시 김씨가 근무하는 지점이 지역 내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았다. 지점장은 전 직원을 휴일인 토요일에 출근시켜 인근 공판장의 쓰레기를 치우게 했다. 직원들이 장갑을 끼려 하자 지점장은 “잘한 게 뭐가 있다고 편하게 장갑을 끼냐”며 맨손으로 쓰레기를 줍게 했다. 직원들은 공판장에 널려 있는 먹다 남은 과일, 물에 젖은 비닐 등을 맨손으로 치웠다.
조합원 91.6%가 스트레스전국의 농협 지점과 농협 하나로마트 직원들이 연중 반복되는 ‘CS 평가’에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고객 서비스 강화 명목의 평가제도가 노동자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농협노동조합이 지난해 4월 소속 조합원 4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1.6%가 “CS 평가로 인해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협중앙회는 오히려 2010년을 ‘CS 재도약의 해’로 선포하고 나서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현재 농협중앙회가 실시하는 ‘CS 평가’는 ‘미스터리 쇼핑’ 방식이다. 고객을 가장한 모니터 요원이 농협의 각 지점을 방문해 금융·판매 서비스를 이용한 뒤 점수를 매겨 보고하는 형식이다. 은행의 경우 농협중앙회 상호금융지원부가 외부 컨설팅 업체에 용역을 주면 해당 업체가 전국 3449개 지점에 모니터 요원을 파견한다. 하나로마트 매장 250곳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니 지점이나 매장별로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워진다.
평가 방식은 어떨까? 농협중앙회 상호금융지원부가 내놓은 ‘2010년 서비스컨설팅 품질표준’에 따르면, ‘매뉴얼’이 시키는 대로 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표정’과 ‘자세’, 그리고 ‘매뉴얼대로 말하기’다.
총점 13점짜리 ‘기본 자세’ 항목에서 ‘분위기 및 근무 자세’는 5점을 차지한다. 직원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경우, 턱을 괴고 있는 경우, 껌을 씹는 경우, 의자에 기대어 몸을 흔드는 경우, 무단으로 자리를 뜨는 경우 등은 ‘지적 사항’이다. 창구에서 신문·잡지·TV 등을 보거나 커피·음료수 등을 마시는 행위, 업무와 무관한 개인적 행동, 3분 이상의 사적인 전화 통화는 ‘금지 사항’이다. 금지 사항이 1건 발견되면 총점의 60%가 깎이고, 금지 사항 1건과 지적 사항 1건이 발생하면 최하점을 받게 된다.
4점짜리 항목인 ‘용모 및 복장 상태’는 여직원의 용모를 세세히 규정한다. 화장을 하지 않는 것도, 지나치게 하는 것도 감점 요인이다. 눈에 띄는 염색, 단정하지 못한 헤어스타일, 달랑거리는 귀고리 등 지나친 액세서리 착용, 원색 매니큐어도 안 된다. 남성 직원은 수염·두발 상태와 비듬·코털·입냄새에 대해서만 규정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덜 엄격하다. 양복을 입는 남성 직원과 달리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여성 노동자는 반드시 구두나 샌들을 신어야 하며, 슬리퍼 착용은 금지된다. 스타킹을 신되 화려한 색깔이나 패션 타이즈는 안 된다.
총점 13점의 ‘고객맞이’ 항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창구 직원이 밝고 큰 목소리로 “○번 고객님, 제가 처리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번호를 부르지 않고 순번기만 누른다든지 목소리가 활기차지 않으면 감점이다. 고객이 다가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해야 한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이라고 인사해야 하는데, 이때 친근감 있게 말하지 않거나 발음이 또렷하지 않으면 감점이다. 또한 고객 맞춤 칭찬을 해주면 가점이 있다. “양복이 잘 어울리세요” “자녀분이 무척 귀엽네요” “글씨를 잘 쓰시네요”와 같은 말이 예시로 적혀 있다.
인사말을 하지 않고 바로 업무를 처리하면 4점짜리 ‘인사’ 항목의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이 고객 주시인데, 고객의 눈이나 미간을 바라보며 인사말을 건네야 한다. ‘주시’ 항목 또한 4점이나 된다. ‘맞이 표정’도 3점으로, 얼마나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느냐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정말로 감정 평가? 실제론 인상 비평총점 18점의 ‘고객 응대’ 항목은 직원들의 ‘말’을 평가한다. 고객의 용건을 확인하는 말과 양해를 구하는 말로 구분된다. 업무 지연 때 “죄송합니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전화가 오면 “고객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때 “고객님, 잠시 ○○○ 일 때문에 다녀오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건네지 않으면 감점이다. 돈접시에서 통장 등의 물건을 한 손으로 집거나, 통장을 고객이 바로 볼 수 있는 방향으로 건네지 않거나, 손가락질로 안내하거나, 팔짱을 끼는 등의 행동을 하면 모두 지적을 받게 된다.
고객 응대 항목에서도 ‘정중한 태도’ ‘응대 표정’이 평가된다. 창구 직원의 용모와 표정, 언행은 지속적으로 관찰 대상이 된다. 업무를 처리할 때도 밝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야 한다. 대화를 나누며 고객을 주시하는지, 고객의 질문을 주의 깊게 경청하며 “아, 정기적금 말씀이시죠?”와 같이 적절한 호응을 하는지, 고객의 잠재적 요구 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적절한 질문을 하는지 등을 평가한다.
상담이 끝나면 “고객님, 상담 내용에 대해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십니까?” “혹시 언제쯤 다시 방문 가능하신가요?” “앞으로 제가 고객님의 자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해드리겠습니다” 등의 말과 함께 명함을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또 “안녕히 가십시오, 고객님”이라는 기본 인사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해야 한다. ‘배웅 인사’에 4점, ‘배웅 표정’에 3점이 배정돼 있다.
모니터 요원이 객장을 둘러보는 ‘관찰 평가’와 직접 직원과 대화하는 ‘상담 평가’가 끝나면 ‘전화 평가’가 남는다. 모니터 요원이 해당 지점으로 전화해 응대 태도를 보는 항목이다. 전화 평가는 몇 번째 발신음이 울렸을 때 직원이 전화를 받는지부터 체크한다. 발신음 6회 이상, 총시간 30초를 넘어섰다면 최하점을 받게 된다. 인사말은 “농협 △△지점 홍길동입니다”와 같이 표준 인사말을 구사해야 하며, 말의 속도가 빠르지 않고 목소리 톤이 밝고 분명해야 한다. 졸린 듯한 음성, 말끝을 흐리는 버릇 등은 감점 대상이다. 전화를 먼저 끊어서도 안 되고 수화기를 집어던지듯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네, 그러세요?” 같은 호응하는 표현을 잘해야 하며, 전화를 끊기 전에 “저희 영업점을 방문해주시고 저는 ○○○이니 오셔서 저를 찾아주시면 더욱 친절히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더 궁금한 점은 없으십니까?”라고 물은 뒤 “감사합니다. 저희 농협을 꼭 한번 찾아주세요”와 같은 끝인사를 건네야 한다.
이같은 기준은 실제 어떻게 평가로 이어질까? 평가 문항은 세세하지만 평가 결과는 한두 문장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모니터 요원들이 제출한 평가 보고서를 보면, 대부분 용모·표정·말투 등에 대한 인상 비평에 그친다(표 참조).
지역에 맞지 않는 무리한 표준화이런 평가는 거의 1년 내내 반복된다. 1년에 총 네 차례 평가를 하는데, 그 기간이 1회차(2월25일~5월7일), 2회차(5월10일~7월16일), 3회차(7월19일~10월1일), 4회차(10월4일~12월10일)로 이어진다. 주말을 제외하면 2월25일부터 12월10일까지 영업일 기준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평가 기간이다. 농협의 한 직원은 “단 일주일도 숨통 트일 날 없이 평가 기간이 계속되니 두통, 소화불량 등 스트레스 징후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 쪽은 이런 방식의 평가가 고객 서비스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도록 하는 매뉴얼은 지역 농협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부산의 한 농협 지점에 근무하는 이미숙(46·가명)씨는 “20년 넘게 근무해오면서 대부분의 고객과 가깝게 지내 ‘할머님’ ‘어머님’ ‘형님’ 등의 호칭을 쓰며 사투리로 말하는데, 현장 상황을 무시한 채 매뉴얼대로만 연기하듯 말하라는 것이 무척 자존심 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민 금융기관이라면 글 모르는 사람도 와서 편안하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시중 은행과 맞춘다고 무리하게 표준화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국농협노조 김동은 조직쟁의실장은 “현행 평가 제도는 각 지역의 현실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매우 주관적이어서, 결국 은행 창구 여성 노동자들만 가혹하게 착취하는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수험생들이 성적표를 받아보듯, 농협 지점들은 평가 결과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농협중앙회 쪽은 “평가 결과에 따른 벌칙은 두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연말에 조합별로 종합경영평가기준을 산출하는데, 이때 상호금융 업적 평가에서 ‘CS 평가’ 결과를 반영한다. 종합 점수 90점 이상을 받은 1등급 지점에는 ‘월 통상 임금의 700%’, 60점 미만을 받은 5등급에는 530%가 상여금 상한 비율로 정해진다. 때에 따라 85점 미만의 지점에는 창구환경개선자금, 금융장비보조금 등 시설 보조비 지원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
농협 하나로마트의 경우 부진 사업장에 대한 대책은 더 구체적이다. 권역별로 하위 20% 사업장에 부진 원인, 개선 대책, 앞으로의 득점 목표 등을 적어 내도록 한다. 또한 75점 미만의 점수를 받은 매장의 점장 및 직원들을 연수원에 불러 특별 집합 교육을 하고, 행사 지원과 자금 지원 때 기준 금액의 50%를 감축한다. 해당 매장의 직원들은 각종 표창과 포상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점수가 발표되는 날이면 지점장을 포함해 모든 직원이 긴장하게 된다. 농협의 한 직원은 “점수가 낮게 나올 경우 모니터 요원을 응대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직원은 눈총을 받으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지점 평가에 타격을 받게 된 지점장의 ‘단체 기합’에도 직원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쉽지 않다.
쓰레기 줍기, 서서 일하기 처벌도전국농협노조의 남주연 교육선전 부국장은 “조합원에게 고객 서비스 평가 결과로 인한 피해 사례를 수집한 결과 휴일날 쓰레기 줍기, 의자 빼고 서서 일하게 하기, 벌금, 1시간 일찍 출근해 본점에서 교육받고 오기 등 다양한 벌칙을 받아온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농협중앙회 쪽은 “지역 농협에서 이뤄지는 각종 벌칙은 각 지점이 경영 차원에서 하는 것으로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해명했다.
농협중앙회가 지역 농협을 감독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박진도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현재 농협중앙회와 지역 농협은 독립 법인으로 각각 신용사업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농협중앙회가 지역 농협을 평가 결과로 통제하는 것은 그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평가 점수가 낮아 의자를 빼고 일해야 했던 경험이 있다는 경기도의 한 농협 직원 정현영(37·가명)씨는 이같은 방식의 평가가 “소름 끼친다”고 했다. “열 번을 잘하다가도 한 번을 한마디 빼놓고 말하면 점수가 안 나오고, 어떤 성격의 모니터 요원이 걸렸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로또식 평가’로 노동자들이 울고 웃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성능을 평가받는 기계가 아니라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회사가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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