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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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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과학이 천안함을 말한다

천안함에 대한 침묵을 깨고 발언을 시작한 과학계…
‘1번’ 글씨에 대조적 의견 낸 송태호 교수와 이승헌 교수의 논쟁 점화
등록 2010-08-13 07:48 수정 2020-05-02 19:26
민·군 합동조사단이 ‘결정적 증거’라고 제시한 ‘1번’ 어뢰에 대해 처음 의혹을 제기한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왼쪽)와 최근 “1번 글씨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반박한 송태호 카이스트 교수. 천안함 침몰 원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과학적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한겨레 자료·연합 전수영 기자

민·군 합동조사단이 ‘결정적 증거’라고 제시한 ‘1번’ 어뢰에 대해 처음 의혹을 제기한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왼쪽)와 최근 “1번 글씨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반박한 송태호 카이스트 교수. 천안함 침몰 원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과학적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한겨레 자료·연합 전수영 기자

국회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예산과 결산이다. 한정된 예산의 우선순위를 심의하고 한 해 나라살림 규모를 결정한다. 국방예산도 마찬가지다. 국회 국방위원회와 예산결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해야 예산이 확정된다. 군에 대한 시민 통제는, 시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의회를 통해 이뤄진다.

중등 교과서 수준의 상식을 언급하는 까닭은 그 상식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뚜렷한 성과 없이 마무리된 국회 천안함 진상규명 특위의 활동을 보더라도 의회의 권능은 군의 기밀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8월6일로 예정된 민·군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의 ‘천안함 보고서’ 공개가 다시 늦춰졌다. 애초 군사 기밀이 많다는 이유로 보고서 공개를 꺼린 군은 이명박 대통령의 질책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공개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도 또 공개가 늦춰진 이유는 뭘까? 국방부 쪽은 한글판 보고서는 이미 완성됐는데 영문판 보고서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버전의 영문 보고서는, 합조단에 참여했던 미국·영국·스웨덴 등 관련국에 이미 전달된 상태다. 주한 미국대사관 쪽도 국방부로부터 251쪽에 달하는 천안함 보고서를 받았다고 확인한 바 있다. 우리 국민과 국방예산을 결정하는 국회의원들은 아직 7쪽짜리 보도자료밖에 보지 못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영문판 보고서를 위해 천안함 보고서 공개가 늦춰진 것이다. 세계 시민을 배려할 줄 아는 정부다.

엄밀히 말해 정부는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 중간발표(5월20일 합조단)밖에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북한 연어급 잠수함의 침투와 ‘1번 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을 기정사실화했다. 군 처지에서 보면 이미 결론을 낸 마당에 보고서 공개를 기점으로 다시 논란이 불붙는 상황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

‘1번’ 글씨를 둘러싼 1라운드

정부의 움직임과 대조적으로 그동안 잠잠했던 과학계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송태호 카이스트 교수(기계공학)가 최근 ‘천안함 어뢰 1번 글씨 부위 온도 계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뜨뜻미지근했던 과학계의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열전달 분야 전문가인 송 교수 논문의 핵심은, 특정 상황을 가정해 계산한 결과 어뢰 추진부 뒤쪽 ‘1번’ 글씨가 쓰인 곳은 어뢰 탄두부의 폭발 이후에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아 글씨가 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폭발로 발생한 에너지가 물을 밀어내면서 이상기체(거품)를 만드는 데 쓰이기 때문에 7m가량 떨어진 ‘1번’ 글씨 부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며, ‘1번’ 글씨는 5cm 두께의 강철 디스크 뒤쪽에 쓰여 있어서 글씨가 타거나 녹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합조단 발표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송 교수의 논문은, 어뢰가 폭발하면 추진체 뒷부분도 350~1천℃ 이상 올라가기 때문에 끓는점이 150℃ 이하인 크실렌과 알코올로 된 매직펜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의혹 제기에 대한 반론 성격이었다.

송 교수가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동료 교수 26명의 추인을 받아 논문을 발표하자, 최초로 ‘1번’ 글씨 의혹을 제기한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고체물리학)가 재반박을 했다. 이 교수는 8월4일 에 보낸 2쪽짜리 보고서에서 “송 교수의 계산은 가정 자체에 큰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보고서는 과학 전문지식이 없는 이들에겐 난해한 수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핵심을 추려보면 이렇다. 송 교수는 폭발하면서 발생한 에너지가 이상기체를 확장시키면서 소진되기 때문에 ‘1번’ 글씨 부위에 전달되는 열이 미미하다고 계산했는데, 이 교수는 폭발 직후 거품 내의 압력은 2만 기압에 가까운 데 반해 그 바깥은 거의 진공상태에 가까워 거품이 팽창하는 데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고 결국 어뢰 추진체의 뒷부분까지 열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송 교수는 폭발 과정을 가역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적용했지만 실제 폭발은 비가역적 과정이어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또 최근 발행된 (강태호 엮음·창비 펴냄)에 실은 기고문에서 “어뢰 중에서 가장 뒷부분이고 가장 외부에 있는 방향키도 부식(폭발로 인한 고열로 페인트가 타서 없어진 뒤 바닷물에 노출될 경우 부식 현상이 일어난다)되어 있었고, 따라서 이 부분의 온도도 최소한 페인트를 태울 정도인 325℃ 이상으로 올라갔을 것이므로 어뢰 내부는 이보다 높은 고열 상태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안함의 침몰이 폭발에 의한 것인지, 그리고 파편은 하나도 없이 어뢰 추진체만 남긴 문제의 ‘1번’ 어뢰에 의한 폭발인지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폭발이 가역적 혹은 비과역적 과정을 거쳤는지, 폭발에 의한 이상기체(거품)의 팽창에 의한 열전달이 어떻게 되는지 등의 문제는 지엽적일 수 있다. 또 실험 없이 특정 상태를 가정한 계산에 근거를 둔 두 교수의 주장은 실제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3월26일 천안함 침몰 사고 이후 4개월이 넘도록 이승헌 교수와 양판석 박사(캐나다 매니토바대 지질과학과 분석실장) 등 몇몇 과학자를 제외하고는 침묵과 익명으로 일관했던 과학계의 전문가들이 실명을 걸고 침몰 원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논쟁을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다.

 

과학자의 침묵은 금이 아니다

한국기자협회·한국PD연합회·전국언론노동조합으로 구성된 ‘천안함 조사결과 언론보도 검증위원회’(이하 검증위·위원장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는 8월5일 ‘더 많은 이 교수·송 교수를 기대한다’는 논평에서 “송 교수의 논문 발표가 위축된 과학 논쟁을 점화시켜 천안함 진상규명의 중요한 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검증위는 논문 내용과 무관하게 그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며 “더 많은 송태호·이승헌이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걸고 천안함 과학논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검증위는 또 “천안함 진상규명은 철저히 과학적이어야 한다”며 “과학자를 편가르기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우석 논란의 시발점이던 과학자 모임 인터넷 사이트 ‘브릭’(bric.postech.ac.kr)의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천안함 사고 원인’ 카페에서도 두 교수의 주장을 포함해 천안함 침몰 원인에 관한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천안함 진실 찾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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