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야당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일 것이다.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수평적 정권교체를 완성한 1997년까지 27년간 김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곧 대한민국 야당의 역사였다.
전두환·이명박 반대의 담대한 목소리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약세를 면치 못하는 야당, 특히 7·28 재보선에서 참패를 겪은 민주당에 8월18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이끈 민주당과 지금의 민주당은 왜 다른가?
6월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해학 목사는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정치 역정을 ‘질경이’와 ‘소나무’에 비유했다. “가끔 김 전 대통령을 너무 쉽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정치할 때 한국 사회의 지형이 얼마나 보수적이었습니까. 야당 지도자에 대한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은 말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짓밟아도 끈질기게 다시 일어서는 질경이의 모습으로 온갖 음모와 협박을 뚫고 정치적 생존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와 같은 그의 강인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에 독재권력에도 꺾이지 않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봅니다.”
독재정권에 맞설 수 있었던 용기를 김 전 대통령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곧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행동하는 양심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았다. 김 전 대통령은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후진술에서 그는 “내가 죽더라도 우리 민주주의는 반드시 10년 내로 온다,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든 싸워서 회복해야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보복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당시 군 법무관 신분이던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사형선고 직전 김 전 대통령의 육성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육군 군법회의 재판정에는 직접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재판 현장이 그대로 중계된 바로 위층 회의실에서 김 전 대통령의 최후진술을 들었는데, 정말 가슴이 메어졌어요. 그때만 해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할 때 아닙니까.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전두환 장군’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전두환 장군이 민주주의를 빈사 상태로 후퇴시키지만 앞으로 10년, 1980년대 전체를 보면 민주주의가 반드시 살아난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사형을 구형받은 피의자 신분에서 이런 말씀을 할 수 있던 사람이 바로 김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천 의원이 서거 직전의 김 전 대통령에게서 발견한 모습은 29년 전 최후진술 때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 장면 그대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한 뒤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것 같다”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김 전 대통령은 5월 영결식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씨의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6월11일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연설에서 그는 작심한 듯 이명박 정권을 성토했다.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 이렇게 하고 있다. 지금 국민이 걱정하는,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태위태하느냐, 이를 매우 걱정한다.”
‘민주주의는 싸워서 회복해야 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김 전 대통령의 원칙에 비춰볼 때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행동하는 양심, 이 기준에 비춰보면 지금의 민주당은 어떤가? 힌트는 민간인 사찰 사건에 대한 7·28 국회의원 재보선 직전의 민주당과 재보선 이후 민주당의 모습이다.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얼마나 후퇴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민간인 사찰 의혹이다. 재보선 직전까지만 해도 이를 대대적으로 문제 삼던 민주당은 선거가 끝난 뒤 거짓말처럼 돌아섰다. 9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 경쟁이 시작되자 민간인 사찰에 대한 민주당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소설가 서해성씨는 민주당의 이런 태도가 반복된다면 결국 “좋든 싫든 (한나라당) 이중대가 되는 것” 이외의 선택이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최근 민주당을 보면 정치가 신념을 실현하는 행위인가,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용산 참사를 과거 ‘YH 사건’(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에 항의해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에 비할 수 있습니까.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민간인 사찰은 또 어떻습니까. 이건 민주주의 퇴행의 극단적 양태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져도 민주당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1970~80년대 야당 정치인은 ‘정말 민주주의 한번 해보자’ 하며 목숨을 걸었는데, 지금 야당 정치인 다수는 그만한 신념적 무장이 약합니다. 민간인 사찰 의혹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데, 재보선이 끝나니까 또다시 당권 투쟁에 몰입해버립니다. 이러니 야당의 존재감이 없는 겁니다.”
서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리켜 “수세 국면에서도 배를 띄운 정치인”이라고 덧붙였다. “배를 타고 있는 건 똑같습니다. DJ는 민심의 파도를 일으켜 배를 띄웠습니다. 시대를 헤쳐나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당은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진전이 없습니다. 파도가 들이쳐도 본인들이 나아가지 않고 있으니 퇴행하는 거죠. 그게 보수적 행위라는 겁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민주주의의 회복이 다시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다면, 최근 민주당의 역할은 과거 ‘김대중 총재’ 시절의 민주당보다 크게 축소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선명 야당’의 모습을 바라는 대중의 요구에 맞닥뜨릴 때마다 민주당이 흔히 내놓는 대답은 ‘대안 야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선명 야당과 대안 야당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를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평가다. “김 전 대통령이 대개 적은 수의 야당 국회의원으로도 여당을 압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민주주의와 인권 확립이라는 가치를 흔들림 없이 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책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세게 붙은 1971년 대선에서 그랬다. 4대국 평화보장론, 남북 유엔 동시 가입, 경제정책으로는 대중경제와 참여민주주의 등을 제시하며 야당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과시했다. 이런 정책 대안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등 보수 언론이 아무리 그에게 ‘호남 정치인’이라는 테두리를 둘러도 대선과 총선 등 대부분의 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야당이 수도권에서 이길 수 있었다.”
김 전 관장이 말한 당시 야당과 최근 민주당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 전 관장은 “김 전 대통령은 확실한 정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대안세력으로서 선택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의 민주당은 아무리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을 비판해봐야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7·28 재보선에서도 그랬다. 한나라당으로부터 ‘친서민’ 이슈를 선점당한 민주당은 반MB 정서와 야권 연대에만 매달렸다. “한나라당 친서민은 가짜”라는 주장도 거듭했다. 그래봐야 반대만 하는 정당이란 이미지를 고착화할 뿐이었다. 민주당이 친서민 이슈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한나라당 뒤를 좇는 것이 전부였다.
9월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의 당권 주자들이 저마다 ‘진보’를 구호로 내건 이유도 친서민 이슈를 빼앗긴 데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정동영 의원은 민주당이 ‘중도진보’ 노선에서 ‘중도’라는 수식어를 떼고 ‘담대한 진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정배 의원은 ‘유능한 진보’를 구호로 사용할 계획이다. 정세균 전 대표와 박주선 의원은 각각 ‘따뜻한 진보’와 ‘진정한 진보’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쯤 되면 바야흐로 ‘진보의 전성시대’를 방불케 한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진보의 범람이 자칫 ‘말의 성찬’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실제로 말 이외에 이들이 진정한 진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달랐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자신이 이끈 정당 앞에 ‘진보’라는 수식어를 붙인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공개적 자리에서는 민중당 등 ‘진보 정당’과 구별해 민주당을 꼭 ‘중도 정당’이라고 말했다. 표현은 중도 정당이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이 지금의 민주당에 비해 진보적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기 전인 1954년 김 전 대통령은 서울 용산에 노동문제연구소를 차렸다. 노동운동 평론가로 활동하며 월간 등에 노동문제에 대한 기고 활동을 활발히 하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최재천 전 민주당 의원의 기억이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노동문제연구소 재직 시절 기고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일화를 상대적 진보의 중요한 표징으로 말하곤 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분단 현실과 한나라당이라는 극우 정당의 존재를 놓고 볼 때 1971년 대선 때 이미 4대국 평화보장론, 향토예비군 폐지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은 김 전 대통령은 분명 중도진보적 노선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최 전 의원이 김 전 대통령의 야당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개혁 노선과 손잡는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 호남이라는 지역적 한계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끊임없이 개혁 노선과 결합함으로써 정치적 진로를 개척해갔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정당 외부로 넓게 ‘텐트’를 쳤던 포용적 리더십도 지금의 민주당으로서는 기억해야 할 장면이다. 그것이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론’이었다. 표면적으로 당의 외연 확대가 주요 목표였지만, 김 전 대통령이 생각한 ‘젊은 피 수혈론’은 단순한 당의 세대교체가 아니라 호남당이라는 민주당의 체질을 바꿔 전국정당으로 나가겠다는 의지의 반복적 표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지 기반 확대 노력은 다른 정당과의 합당이나 후보 단일화 등 ‘상층 통합’ 혹은 ‘수평적 지지 기반’ 확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2년 대선을 앞두고 ‘3당 합당’이라는 방식을 통해 세력 확대를 꾀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민사회 그룹이나 재야 인사, 전문가 그룹의 영입을 통해 ‘수직적 지지 기반’ 확대를 시도했다.
“지금의 민주당은 게으른 정당”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이 야당 지도자 시절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부분도 ‘지지 기반 확대 노력’에 있다. “기본적으로 호남만으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당에 새롭게 사람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그 사람으로 대표되는 계층의 목소리를 수렴하겠다는 의사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역대 야당 정치인 가운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아울러 이 부소장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민주당이 얼마나 게으른 정당인지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김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민주당과 지금 민주당의 결정적 차이다”라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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