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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하라



한일병합조약 100주년을 맞아 한-일 지식인·정치인·시민의 공동선언 잇따라…
일본의 불법성 인정·총리의 진전된 담화로 이어져야
등록 2010-08-06 15:08 수정 2020-05-03 04:26
한국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 실행위윈회가 7월25일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 광장에서 식민지배 청산 등을 내걸고 행진을 벌였다. 연합

한국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 실행위윈회가 7월25일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 광장에서 식민지배 청산 등을 내걸고 행진을 벌였다. 연합

역사는 그저 옛일이 아니다. 늘 현재고 미래와 통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100년 전의 조선-일본 강제병합조약과 식민지배는, 현재의 독도 영유권과 역사 교육, 동해 표기, 야스쿠니신사,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가닿는다.

1910년 8월29일 일본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공표된 한일병합조약의 전문은, ‘상호 행복의 증진’과 ‘동양의 영구 평화의 확보’를 위해 병합을 한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1875년 강화도 사건에서부터 출발한 일본의 조선 침략 완결판인 병합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과 일본 민중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는 더욱 처절하게 부서졌다.

 

한-일 지식인 1천여 명이 공동성명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시민이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100년을 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눈에 띄는 성과를 먼저 내기 시작한 쪽은 지식인 그룹이다. 한국의 김영호 유한대 총장과 일본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공감’에서 시작된,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에는 지난 5월 성명 발표와 동시에 양국의 지식인 200명이 서명했다. 최근 서명자가 1천 명을 넘어섰다. 양국 지식인 대표들은 7월28일 일본 정부에 성명서를 전달하면서 조약 공표일인 8월29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지식인들의 선언 취지를 반영한 담화문을 발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한 행위였다. (중략) 힘으로 민족의 의지를 짓밟은 병합의 역사적 진실은, 평등한 양자의 자발적 합의로 한국 황제가 일본에 국권 양여를 신청하여 일본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여 ‘한국병합’에 동의했다는 신화로 덮어 숨기고 있다. 조약의 전문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이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 성명은 또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적 관계에 관한 자료가 숨김없이 공개돼야 하며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대량 살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노동자·군인·군속 △북과의 국교 정상화 등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으면서 “그래야 진정한 화해와 우호에 기초한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와다 명예교수를 비롯해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학 명예교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 등 비판적 지식인과 문화계·시민사회단체 인사 524명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백낙청·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 총장 등 학계 인사와 시인 고은·신경림·김지하, 소설가 김훈·이문열·황석영 등 문화계 인사,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백승헌 민변 회장 등 시민사회 인사 587명이 참여했다.

병합조약 100년을 맞아 추진된 ‘지식인 성명’은 일본 의회와 정부를 압박해 1995년 종전 50주년에 발표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보다 진전된 입장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일민간청구권소송단이 7월16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명성황후 시해 진상 규명과 일왕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대일민간청구권소송단이 7월16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명성황후 시해 진상 규명과 일왕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불법성 인정 여부가 배상 등에 영향 끼쳐

지식인들의 움직임과 별개로 한국과 일본의 국회의원들도 조약의 불법성과 무효를 뼈대로 한 공동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사학자 출신의 민주당 강창일 의원이 중심이 되어 추진 중인 ‘한-일 의원 공동성명’은 간 나오토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보다 진전된 내용의 담화 발표를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한-일 양국 의회가 책임 의식과 해결 의지를 가지고 주도적 역할을 하자고 주장한다. ‘한-일 양국 간 과거사 정리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강 의원 등은 8월15일 이전에 한-일 양국 의원들의 공동성명 채택을 목표로, 일본의 ‘전후 보상을 생각하는 의원들의 모임’ 쪽과 협의를 진행 중이다. 병합조약의 불법·무효성을 담은 공동성명을 채택한 뒤, 이를 바탕으로 양국 의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간 총리가 전향적인 역사 인식과 실천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일 의원 공동성명’ 협의가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대목은, ‘지식인 공동성명’ 추진 과정에서 막판까지 진통을 겪었던 병합조약의 불법성 문제다. 불의부당과 불법은 언뜻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식민지배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범죄행위를 어떻게 볼지, 어떻게 피해를 배상·보상할지 등에 관한 논의로 들어가면 큰 차이가 난다. 그동안 일본 정부와 법원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과 한-일 청구권 협정 등을 근거로 개인 청구권은 국가 간 협약으로 소멸됐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한-일 의원 공동선언을 추진 중인 한국 쪽 의원들은 병합조약의 불법성 인정 외에 △한-일 협정 추가 협상 또는 재협상 △독도 영유권 주장 철회 및 관련 내용 교과서 삭제 △야스쿠니신사 참배 중단 및 강제 합사된 한국인 명부 삭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피해자 보상 등 민감한 외교 현안을 선언에 담으려 하지만, 얼마나 큰 진전을 이룰지는 미지수다.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과 추진 중인 한-일 의원 공동성명 등의 영향 때문인지 최근 일본 정부는 오는 8월15일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문 발표를 시사하고 식민지배 처리 문제에 관해서도 이전보다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 내각에서 2인자로 꼽히는 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은 7월7일과 16일 기자회견을 통해 “(개인청구권이 소멸했다는 해석이) 법률적으로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좋은가, 모두 해결된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총리 담화 발표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어떤 내용이 될지 내 머릿속에는 들어 있으며, 내각 관방 부처 차원에서도 어느 정도 그림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과 국회의원들의 공동성명은 주로 1910년 강압적으로 체결된 병합조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약 체결 100년을 맞는 상징적인 해이며 조약을 계기로 국권이 상실됐다는 점, 그리고 일제의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양국 사이에 인식이 크게 갈라지는 뿌리라는 점에서 이를 집중 조명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가능하다. 만약 병합조약이 강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체결됐고 당시 국내법에 비춰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 결함이 없다면 병합조약은 합법적인가. 일제가 식민지배를 했던 다른 나라 가운데 한일병합조약과 유사한 조약이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곳이 있는데 그런 나라에서의 식민지배는 유효한가.

 한-일 양국의 지식인 1천여 명이 7월28일 1910년 강제된 한일병합조약의 원천 무효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 총장, 김영호 유한대 총장,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야마다 쇼지 릿쿄대 명예교수. 연합

한-일 양국의 지식인 1천여 명이 7월28일 1910년 강제된 한일병합조약의 원천 무효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 총장, 김영호 유한대 총장,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야마다 쇼지 릿쿄대 명예교수. 연합

식민지배는 반인도적 범죄행위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를 촉구하며 일본 정부에 전달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과 현재 문안을 조율 중인 한-일 의원 공동성명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한-일 공동 시민선언과 행동계획도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역사학자와 시민사회단체 인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주장해온 일본의 학자와 시민사회단체 인사가 주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실행위원회의 상임대표는 역사학자 이이화와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이 맡고 있으며, 일본실행위원회에는 스즈키 유코, 야노 히데키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에 각각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실행위원회’를 꾸려 한-일 공동 시민선언문과 행동계획을 다듬어왔다. 조약이 강제된 8월22일은 일본 도쿄에서, 조약이 공표된 8월29일엔 서울에서 한-일 공동 시민선언 일본대회와 한국대회를 열 계획이다. 국치 100년 역사 현장 기행과 국제 학술대회, 문화행사 등이 일본대회와 한국대회 사이에 집중적으로 열린다.

한-일 공동 시민선언이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한일병합조약의 형식적 합법·불법 문제를 넘어 일제의 식민지배를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규정해 한국과 일본 정부가 공동으로 조사하고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 실행위원회가 조율 중인 한-일 공동 시민선언과 행동계획은 그 자체로 작은 역사책이다. 이들은 2001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유엔의 주도로 열린 ‘반인종주의·차별 철폐 세계대회’에서 과거 500년 동안 서구 제국이 자행한 노예제와 식민지배를 인도에 반하는 죄로 정의한 ‘더반 선언’에 주목한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저지른 인도에 대한 죄(국제형사재판소(ICC) 로마 규정 7조)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식민지화 과정에서 동학농민군과 의병 학살, 3·1 운동 탄압과 학살, 그 뒤 간도와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중국인 학살은 ‘살인과 섬멸의 죄’에, 강제연행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노예화·강제이송·강제노동의 죄’에 해당한다. 한-일 공동선언은 “반인도적 범죄행위는 모두 제국 일본의 식민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식민주의 그 자체가 폭력과 차별에 기초한 억압 체제이자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을 예정이다.

 

동아시아 역사·인권·평화를 위한 선언

시민선언을 준비 중인 한-일 실행위원회는 “식민주의를 완전히 극복하는 일이야말로 자유·인권·평등의 가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한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단 한-일 공동 시민선언으로 출발하지만, 동아시아에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과 해결 전망을 담은 포괄적인 ‘동아시아 역사·인권·평화선언’(가칭)으로 완성해가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한국실행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조약의 형식 문제에 매몰되다 보면 식민지배가 세계사적 범죄행위라는 큰 흐름을 놓칠 수 있다”며 “전문과 본문, 행동계획으로 이뤄진 한-일 공동 시민선언은 식민주의 완전 종식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과제를 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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