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5개 이사국 대표들이 7월9일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의장성명을 채택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
“언어학적 승리”(linguistic victory).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7월9일 만장일치로 채택·발표한 의장성명에 대한 미국 (WSJ)의 평가다. “한 달간의 줄다리기 끝에 중국의 입김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미국에는 ‘언어학적 승리’로 보인다”는 것이다. 절묘한 성격 규정이다. 이를 달리 풀이하자면, 관련 당사국들이 각자 편리한 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이중 해석’의 길을 열어놓은, 현실 국제정치 세계에서 큰 의미가 없는 ‘말의 성찬’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왜 그런가? 11개 항으로 이뤄진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은 2항과 7항에서 천안함 침몰을 초래한 ‘공격’(attack)을 ‘개탄’(deplore)하고 ‘규탄’(condemn)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제외교 문서에서 ‘attack’과 ‘condemn’은 흔히 사용되지 않는 강력한 표현이다. 한-미 양국 정부의 총력 외교의 결과다. 문제는 ‘attack’의 주체와 ‘condemn’의 대상이 의장성명에 명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의장성명이 “이번 사건 책임자에 대해 적절하고 평화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4항)면서도, 그걸 누가 해야 하는지 명시하지 못한 까닭이다. 비유하자면, 피고 없는 판결과 다를 게 없다.
한-미 양국 정부는 “북한에 천안함 침몰의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 한국 주도하의 5개국이 참여한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비춰,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는 5항을 2·7항과 엮어, 안보리 의장성명이 사실상 천안함 침몰의 공격 주체로 북한을 명시한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의장성명엔 “안보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had nothing to do with)고 하는 북한의 반응, 그리고 여타 관련 국가들의 반응에 유의(note)한다”(6항)는 문구도 담겨 있다. 표현 강도와 분량에서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론 남한과 북한의 주장이 병기돼, 북한으로선 안보리 의장성명을 ‘면죄부’로 활용할 여지가 생긴 셈이다. 실제 신선호 주유엔 북한대표부 대사는 의장성명 채택 직후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외교적 승리”라고 밝혔다.
이번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정세 관리를 전제로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attack’과 ‘had nothing to do with’의 맞교환이다.
유엔 안보리 회부(6월4일)를 통해 ‘국제사회의 일치된 대응 도출’을 목표로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로선 애초 원했던 추가 대북 제재 결의나 규탄 결의에 훨씬 못 미치는 ‘앙꼬(팥소) 없는 찐빵’을 받아든 셈이다. 이렇듯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문제의 국제화’ 전략이 초래한 현실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 확대, 한국의 입지 축소와 주도권 상실’이라는 예견된, 하지만 당혹스러운 결과다.
이와 함께 안보리 의장성명에서 사태 전개와 관련해 주목할 대목이 있다. “안보리는 앞으로 한국에 대해, 또는 역내에서, 이러한 공격이나 적대 행위(attacks or hostilities against the ROK or in the region)를 방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8항), “적절한 경로를 통해 직접 대화와 협상을 가급적 조속히 재개하기 위해 평화적 수단으로 한반도의 현안들을 해결할 것을 권장한다”(10항)는 항목이 대표적이다.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와 함께 한반도 정세의 악화를 불러올 수 있는 추가적인 대북 강경 조처를 견제한 셈이다.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 이후 한반도 정세는 혼조 양상을 보였지만, 무게 중심추는 ‘천안함’에서 ‘6자회담’으로 옮아가는 분위기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 그리고 2003년 7월 6자회담 출범 이후 수시로 회의 참여를 거부해온 북한이 6자회담에 적극적인 태도를 내보이는 게 눈에 띈다.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의장성명 채택 직후 외교부 누리집에 올린 성명에서 “우리는 조속히 6자회담이 재개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공동으로 수호할 수 있게 되길 촉구한다”고 밝힌 데 이어, 7월13일 정례브리핑에서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거듭 촉구했다.
북한의 발빠른 ‘대화 공세’는 특히 눈여겨볼 대목이다. 신선호 주유엔 북한대표부 대사는 의장성명 채택 직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6자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고 강조했고, 곧이어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회견 형식을 빌려 “우리는 평등한 6자회담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과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일관되게 기울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5월 초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각측과 함께 6자회담의 재개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용의를 표명”한 것의 연장선에 있지만, ‘제재 해제’ 등을 조건으로 내걸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북쪽은 미국과 대화하고 싶다는 속내도 거듭 드러냈다. 북한은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 몇 시간 전에 을 통해, 지난 1월 이후 장기 억류 상태인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가 “구원 대책을 세워주지 않는 미국 정부에 대한 실망감과 절망감에 못 이겨 자살을 기도”했다고 보도했다. 곰즈의 자살 기도를 명분으로 미국 정부의 북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것이다. 북쪽이 같은 날 저녁 천안함 문제와 관련한 북-미(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유엔군 사령부) 대좌(영관)급 실무 접촉을 제안해 7월15일 양쪽이 만난 데 이어 계속 논의키로 한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유엔사의 천안함 관련 장성급 회담 제안을 “미군 측은 유엔군 사령부의 명의로 북-남 관계 문제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며 거부했던 기존 태도를 180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 천안함 의장성명이 나온 뒤 남북 양쪽은 모두 자신들의 외교적 승리라고 주장했다. 5월24일 천안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7월9일 의장성명 채택 뒤 기자회견을 하는 북한의 신선호 유엔주재 대사. 청와대사진기자단·연합
북한의 이런 ‘대화 공세’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도 나쁘지는 않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의장성명 채택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북한은 국제법과 의무를 준수하고, 2005년 6자회담 공동성명(9·19 공동성명)의 약속을 지켜야 하며, 도발적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9·19 공동성명 약속 이행’을 강조한 것은, 북쪽에 6자회담 재개에 필요한 ‘환경 조성’ 노력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후 미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건설적 행동을 보여준다면, 경제·정치·외교적 측면에서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7월10일)거나 “현재 또 다른 추가 (대북 제재) 조처가 필요하다고 평가할 시점인지는 모르겠다”(13일)고 밝혔다. 천안함 침몰 이후 내부적으로 검토해온 미국 정부의 독자적인 추가 대북 제재 조처의 시행을 유보할 테니 영변 5MW 원자로 동결 등 ‘성의 표시’를 하라는 대북 메시지로 해석된다.
북쪽의 적극적인 태도, 그리고 유엔 안보리의 의장성명 채택 과정에서 미-중이 이미 전략적 조정을 거친 사실을 고려하면, 6자회담 재개는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6자회담 재개까지는 북-미-중 등 관련 당사국 정부 사이의 치열한 수싸움이 불가피하다. 한-미 ‘2+2(외교·국방) 장관급 회담’(7월21일 서울) 직후 7월21~23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릴 아세안지역포럼(ARF)을 계기로 한 6자회담 당사국 외교장관들의 다각적 협의를 거쳐 대략의 가닥이 잡힐 전망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응인데, 한마디로 ‘엉거주춤’하다. 5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은 대한민국과 국제사회 앞에 사과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이것은 북한이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기본적 책무다”라고 밝힌 뒤 통일·외교·국방부가 모두 나서 북한을 압박하던 서슬 퍼런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정부는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 뒤 ‘북한의 사과’를 공개적으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있다.
외교적 대응은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발표로 사실상 일단락됐다. 최대로 후하게 평가해도 ‘절반의 성공·실패’이고, 근본적으로는 남북관계의 국제적 성격을 강화해 결국 한국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한 ‘부메랑 던지기’였다는 지적이 많다.
군사적 대응책은 더 거센 역풍에 시달리고 있다. 기세 좋게 공표했던 대북 확성기 선전 방송 재개 방침은 “조준 격파 사격하겠다”는 북쪽의 위협과, ‘효과와 목적, 대응 계획에 의문이 있다’는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확성기 설치로도 이미 선전전의 효과는 거뒀다”는 국방부 고위 관계자의 최근 발언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과 다름없다.
미국의 핵항공모함이 참여하는 대규모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백령도 근해까지 올라가서 하겠다던 군의 발표도, 천안함 사태 이후 첫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동해에서 할 것이라는 양국 정부 고위 당국자의 7월15일 발표로 대체됐다. 한-미 양국의 서해 합동 군사훈련 추진 움직임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방침을 거듭 밝힌 중국 정부를 의식한 타협책이다.
그나마 공언대로 실행되는 건 통일부 차원에서 이뤄지는 대북 인도적 지원과 민간 차원 사회·문화 교류의 중단, 개성공단을 제외한 경제협력사업 중단 등 대북 압박 조처다. 이마저도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는 영세 대북경협 업체들의 아우성과 야 5당 및 농민·종교계·시민사회 등이 연대한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통일쌀 보내기 국민운동본부’ 발족 등의 역풍에 맞닥뜨린 상황이다. 청와대 대통령실 국민통합특보이기도 한 김덕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도 대북 인도적 지원과 사회·문화 교류 재개, 정상회담을 포함한 당국 간 대화 복원 등을 촉구했다.
이명박 정부가 이런 진퇴양난의 협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바람직한 길은 남북관계 복원을 통해 확보하게 될 ‘대북 영향력’을 6자회담 등 한반도 정세 논의 과정에서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대북정책 기조의 조정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런 자명한 길을 걸어갈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부 관계자는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는 한 대통령이 대북정책 기조에 변화를 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한겨레 통일외교팀장 nomad@hani.co.kr
영국의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 7월호. 천안함의 침몰원인으로 정부가 발표한 ‘북한 어뢰 공격’에 여전히 의문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세계적 과학저널 천안함 보도
‘어뢰설에 대한 의문들’ 다뤄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논란이 영국의 세계적인 과학저널 7월호에 실렸다. 는 지난 7월8일에도 온라인판을 통해 천안함 사건 논란을 기사화한 바 있다(www.nature.com/news/2010/100708/full/news.2010.343.html). 기사는 ‘한국이 주장하는 어뢰설에 대해 제기된 의문들’(Questions raised over Korean torpedo claims)이라는 제목처럼 한국의 민·군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이 천안함의 침몰 원인으로 발표한 ‘북한 어뢰 공격’이 과학계에서는 여전히 논쟁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뉴스’난에 실린 이 기사는 ‘폭발 물질을 둘러싼 논쟁’ ‘1번 어뢰에 대한 의혹’ ‘좌초설·충돌설’ 등 천안함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란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학 교수(물리학)가 “합조단이 천안함 침몰의 주요 증거물인 흡착 물질을 엑스선회절기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폭발 물질인) 알루미늄이나 산화알루미늄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내용과 합조단이 “폭발과 급랭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그 물질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명한 것을 동시에 실었다. 캐나다 매니토바대학 지질학과 분석실장으로 있는 양판석 박사가 과학적 분석을 통해 “흡착 물질은 폭발 물질이 아니라 부식된 알루미늄일 것”이라고 주장한 내용도 담았다. 또 최근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천안함 사건에 대한 비난을 담고는 있지만 북한을 특정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며, 조만간 유엔이 북한의 군 대표와 천안함 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만날 것이라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또 미국 외교정책분석연구소의 아시아 지역 안보전문가인 제임스 쇼프의 말을 인용해 “과학적인 문제를 논외로 하면 (북한이 천안함에 어뢰를 쐈다는 합조단의 결론은) 북한이 과거 보였던 행태와 일치한다”며 “나는 개인적으로 (합조단 보고서의) 결론이 정확하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전했다. 다만 제임스 쇼프는 온라인판에서 “북한의 소행이 맞더라도 한국이 발표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이 증거를 강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1번) 글씨를 써넣었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는 과학계의 권위 있는 공론의 장 가운데 하나다. 천안함 사건이 ‘과학 논쟁’ 기사로 언급됐다는 것은 합조단 발표에 포함된 과학적 논증들의 공신력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합조단 보고서가 국제적 공신력을 얻으려면 과학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한 이공계 교수는 “이번 기사가 정부의 천안함 발표가 틀렸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과학적인 신뢰에 금이 간 것은 분명하다”며 “최소한 과학계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과학적인 증거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기사를 쓴 데이비드 시라노스키 기자는 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당 기자로, 지난 2005년 황우석 교수 사건을 비판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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