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ㄱ초등학교 5학년 교실. 칠판에 커다랗게 남성의 성기가 그려져 있다. 옆에는 ‘발기된 꼬추’라는 글씨가 삐뚤빼뚤 적혀 있다. 낙서를 본 담임교사는 경악했다. ‘범인’은 곧 잡혔다. 담임교사는 “짐작대로였다”고 했다. 이 학급의 양아무개(12)군이다. 7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와 살아온 양군의 언행은 늘 거칠었다. 바쁜 아버지는 좀처럼 아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아이는 담배를 피우고 폭력을 휘둘렀다. 욕설과 음담패설에는 경계가 없었다. 별명이 ‘고추박사’다.
우려했던 일은 결국 발생했다. 양군이 같은 학급의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양군은 “그냥 스쳤다”고 했고 여자아이는 “만졌다”며 울었다. 여자아이의 학부모가 학교로 찾아왔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 담임교사는 “경쟁 위주의 학교 교육 속에서 낙오된 아이들이 분노와 좌절감을 성폭력으로 드러내는데, 성폭력으로 정식 신고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대책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해 서울 해바라기 아동센터에 접수된 아동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37.9%가 19살 이하 미성년이었다(‘2009 아동 성폭력 사례 분석’).
초등학교 1학년인 여자아이가 한옥집 대문으로 들어선다. 집 안은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다. 하지만 아이는 누군가 있다는 걸 안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외삼촌이 방에서 자위를 하곤 했다. 20대 초반인 외삼촌은 방문을 열어두고 자위를 했다. 언젠가부터 외삼촌은 조카를 자신의 방에 불러들였다. 자신이 덮고 있던 밍크 이불로 아이의 몸을 뒤덮었다.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30년이 흘렀다. 8살이던 아이는 38살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직시했다. 그동안 친척들 모임을 회피해온 것도, 한때 20대 초반의 남자가 불편했던 것도, 이불을 뒤덮으면 폐소공포를 느끼는 것도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고 비로소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가족에게 말하지 못한다. 사건 당시에는 집안 사정상 부모와 떨어져 외갓집에 살았기에 말할 대상이 없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빠도 돈벌이에 바빴다. 그는 “외삼촌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시기의 기억은 지독한 외로움의 기억과 겹친다”고 말했다. 외삼촌을 포함한 성폭력 가해자들을 직접 만나러 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 을 만든 아오리 감독의 말이다. 서울 해바라기 아동센터의 분석 결과, 지난해 접수된 아동 성폭력 가해자의 73.2%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중 무려 33.8%가 가족이나 친척이다.
학교 수업을 마친 한 초등학생이 홀로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가고 있다. 아이들을 성범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은 돌봄 확대에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연일 ‘아동 성폭력’ 뉴스로 뜨겁다. 언론은 “또 초등학생 성폭행… 이번엔 주택가”(YTN 7월2일)라며 불안을 키우고, 뉴스 앵커는 “정말 빨리 무슨 수를 내야지 안 되겠다”(SBS 7월2일)고 말한다. “취재 경쟁이 불붙을수록 선정적인 아동 성폭력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이용성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장(한서대 교수)은 진단했다. 앞의 두 사례처럼 경미하다고 여겨지는, 그래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그렇지만 빈발하는 아동 성폭력 사례는 ‘공분’의 도마 위에도 오르지 못한다.
칼자루를 쥔 이들도 ‘공분의 대상’에만 주목한다. 어느새 아동 성폭력은 ‘낯선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저지르는’ 범죄가 됐다. 정부와 경찰, 국회와 법원은 모두 “가해자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서슬 퍼런 대책안에 분노가 일렁인다. 이호중 서강대 교수(법학)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경미한 사건은 보도되지 않고 극단적인 사건만 알려지다 보니 아동 성폭력의 현실이 왜곡되고 있다”며 “현상이 왜곡되니 정책 방향도 왜곡된 채 분노의 힘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지난 7월5일 ‘아동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초점은 ‘범인 검거’와 ‘재범 방지’다. 우선 각 지방경찰청마다 ‘성폭력 특별수사대’를 발족했다. 성폭력 사건을 주로 담당하던 기존 ‘원스톱기동수사대’에 수사요원만 추가한 형태다. 7월12일부터 석 달간은 ‘특별수사대 일제 활동 기간’이다. 성폭력 혐의로 지명수배된 이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주요 목표다. 아동 성폭력 사건의 실적 점수도 2배가량 높였다. 지구대와 파출소는 아동 성폭력 관련 검문검색과 출동 때마다 50~60점의 점수를 받게 된다. 동시에 아동 성범죄가 일어난 곳의 관할 지구대나 파출소에는 감점을 주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국회는 지난 6월29일 본회의에서 ‘성폭력 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일명 ‘화학적 거세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13살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만 19살 이상의 범죄자에게 주기적으로 성욕을 감퇴시키는 약물을 투여하게 하는 내용이다.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과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면 본인의 동의 없이도 강제 치료를 할 수 있다. 통과된 법안은 내년 7월부터 바로 시행된다.
행정안전부는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에 집중한다. 각 지방자치단체에 CCTV 통합관제센터를 구축하는 데 2014년까지 총 110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어린이·부녀자 대상 강력 사건의 범인을 신속히 검거하는 데 CCTV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교통정보, 주차관리, 방범, 교통단속 등 사용 목적별로 운영되던 CCTV 화면이 하나로 모여 관리·감독될 예정이다. 또한 오는 11월부터 아이에게 목걸이나 휴대전화 칩 형태로 위치추적시스템(GPS)을 소지하도록 해 등·하굣길 경로를 이탈하면 자동으로 부모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알려주는 ‘u-어린이안전 서비스’를 전국에서 실시할 예정이다. 납치 등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전국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고 119 등에 자동 통보된다.
하지만 이같은 대책은 실효성에 비해 사회적 불안과 불신만 강화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호중 교수는 “범죄자 신상 공개,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등의 방법은 범죄자를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시키는 제도로, 국가형벌권의 과잉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가 범죄자에 대한 교정·교화·치료에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결국 사회적 불신만 키우게 된다”는 것이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역시 “CCTV는 일상의 공간에서 ‘쓰레기’들을 구분해 쫓아내기 위해 설치된다”며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도구인 CCTV를 확대함으로써 얻는 것은 더 큰 불신뿐”이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대책이 아동 성범죄 ‘예방’과는 무관하다는 점도 문제다. 지금까지 내놓은 대책으로는 ‘고추박사’ 양군도, 외삼촌에게 집에서 성추행을 당한 아이도 구하지 못한다.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2007년 9월 ‘쉬운 해결책은 없다’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어린이 성폭행 전과자 신상정보 공개제도가 재범률을 낮춘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고 지적했다. 가해자의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고,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가 피해자 집이며, 성폭행보다 추행이 대부분인 아동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이해를 요하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대책으로 ‘돌봄 확대’와 ‘인권의식 신장’을 꼽는다. 우선 ‘나 홀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 대한 지역 공동체의 고민이 필요하다. 최근 “나 홀로 아동의 대책을 수립하라”는 서울시교육청의 공문에 서울 지역 초등학교들은 자체적으로 방과 후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동 수를 조사했다. 양군이 소속된 서울 ㄱ초등학교 5학년 학급의 경우 25명 중 10명이 학교가 끝난 뒤 보호자 없이 시간을 보내는 ‘나 홀로 아동’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이 학교는 조사가 끝난 뒤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학교 내에 6대의 CCTV를 설치한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교 관계자들이 화면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 이상학 기자
‘나 홀로 아동’ 대책 중 가장 효과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돌봄 교실’이다. 교육과학기술부와 시도교육청,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지원으로 학교마다 개설되는 ‘돌봄 교실’은 방과 후 돌봐줄 보호자가 없는 저소득층 맞벌이 가정 자녀를 대상으로 운영된다. 방과 후부터 밤 9시까지 돌봄 교사가 아이에게 학습 지도, 특기적성 교육 등을 제공한다. 돌봄 교실은 2010년 6월30일 현재 서울 지역 초등학교 587개 중 384개 학교(65.42%), 경기 지역 초등학교 1140개 중 948개 학교(83.16%)에 설치해 운영 중이다.
아쉽게도 예산상의 문제로 돌봄 교실을 더 확대하지는 못하고 있다. 조두순 사건 등 아동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지난해 교과부가 특별 예산 400억원을 편성해 지원했기에 그나마 지금의 성과가 이뤄졌다. 하지만 특별 예산인 만큼 당장 내년의 예산 운용을 보장할 수 없다. 교과부 관계자는 “일단 지난해에는 특별 예산이 편성됐지만 내년에도 사업을 진행할 예산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돌봄 교실이 없는 한 초등학교의 교사는 “이웃 학교는 돌봄 교실 내에 저소득층 아이들의 ‘자기 책상’을 만들어줘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들었다”며 “소외된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돌봄 교실이 더욱 확대 설치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역 공동체의 돌봄 기능 회복도 중요하다. 경찰청 관계자는 “김수철 사건의 경우에도 대낮에 학교에 있던 아이를 위협해 1km나 떨어진 자신의 집까지 끌고 갔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도 개입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성폭력 전담반을 설치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주민 자치치안조직이나 자율방범조직, 민간기동순찰, 녹색어머니회 등 지역 주민 자원과 지방자치단체의 기능을 연결해 ‘보호의 연결 고리’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아이들은 혼자 있다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07년에 펴낸 ‘성폭력 범죄의 유형과 재범 억제 방안’ 보고서를 보면, 어린이 대상 성범죄자의 대부분이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하거나 성인이 돼서도 성적 소외를 경험한 공통점이 있었다.
성폭력 예방 교육은 물론 관계맺기와 인권존중 교육도 필요하다. 최근 교과부는 일선 학교에 “20시간 이상의 성폭력 예방 교육을 실시하라”며 2008년에 제작해둔 교사용 지도자료인 ‘소중한 성 바로 알기’를 전자우편으로 내려보냈다. 하지만 일선 교사들은 “형식적 대응”이라고 비판한다. 서울 지역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소방 교육, 학교폭력 교육, 다문화 교육 등 필수적으로 하라는 교육이 너무 많아 재량 학습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라며 “최근 몇 달간 학교 현장은 교원평가로 정신없이 바쁘고 곧 일제고사까지 치러야 하는데 이렇게 ‘알아서 교육하라’는 지침은 가혹하다”고 지적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아동 성학대 예방 인형극 교육을 해온 굿네이버스 나눔팀 정혜영 간사는 “사회적 관심이 피해를 당한 아동으로만 쏠리다 보니 정작 예방 교육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어린이집·유치원 2414곳에서 인형극을 통해 아동 성학대 대처 요령 등을 교육한 굿네이버스는 현재 장비 노후로 교육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 간사는 “성학대 예방 교육을 시민사회단체의 자원 활동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보건복지부가 주도해 교육 체계를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시민사회단체나 교육자가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6월26일 낮 12시께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 아동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는 봉제공장에 일을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홀로 집 앞 골목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는 가해자인 30대 남성의 꾐에 빠져 자신의 집인 반지하방에 함께 들어갔다가 성폭행을 당했다. 남자가 아이에게 건넨 말은 “함께 놀자”였다. “아동 성추행을 당했던 시기는 지독한 외로움의 기억과 겹친다”는 피해자의 말에 귀기울일 때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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