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알 수 없다. ‘구제역도 이상기후도 결국은 인재’라는 말은 원인 규명의 어려움을 뜻한다. 농가의 시름은 현실이다. 원인과 상관없이 구제역은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겨울 날씨에 방불한 이상기후는 복분자·감귤을 꽃도 피우기 전에 얼려죽이고 있다. 피해는 전국적이다. 지난 4월28일에는 기상관측 사상 가장 낮은 4월 기온을 기록하기도 했다.
구제역 피해액 1400억원 넘을 듯
구제역은 경기 포천군이 시작이었다. 지난 1월 소농가에서 발생해 인천 강화를 거쳐 경기 김포, 충북 충주까지 확산된 구제역은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러다 다시 강화 돼지농가에서 발생한 것이 지난 4월27일. 축산농가는 또 긴장상태로 돌입했다. 돼지는 소에 비해 구제역 전염 속도가 3천 배나 빠른 것으로 알려졌다.
농림수산식품부가 밝힌 피해 현황을 보면, 4월27일 현재 포천·연천 5956두, 강화 1118두를 포함해 4만9867두의 가축에 대한 예방적 매몰 처분이 시행됐다. 같은 날 기준으로 매몰 처분 보상금 500여억원, 생계안정자금 21억원 등 총 1290여억원의 재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추후 산정될 경영안정자금 등을 고려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피해 규모가 지난 2002년 구제역 발생 당시의 피해액인 1434억원을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 수치에는 자식처럼 키워온 가축을 생매장해야 하는 농민의 아픔은 포함되지 않았다.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몰 처분한 농가는 생계안정자금을 받아도 최소 6개월 동안 가축을 다시 키우지 못한다. 이미 사놓은 사료와 약품을 쓰지 못하는 것까지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더 커진다. 매몰을 면한 가축들도 문제다. 해당 지역의 가축시장이 폐쇄돼 출하가 지연되는데다 사료 차량의 이동이 제한되면서 사료 공급이 막막한 지경이다. 일부 농가는 가축이 굶는 상황에 직면하자 웃돈을 주고 사료를 구입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충주에 이어 강화에서 다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위기경보의 최고 수준인 ‘심각 단계’에 준하는 대응태세를 갖췄다. 심각 단계는 역학적 관련이 없는 광역단체 3곳에서 동시에 가축질병이 발생하는 등 전국적 확산 징후가 있을 때 발동하는, 위기경보의 마지막 단계다.
농민도 정부도 ‘심각’ 대응태세지만, 여전히 원인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농가의 불안은 가중된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한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람이나 차량에 의한 전파를 염두에 두고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심을 울리는 것은 구제역뿐만이 아니다. 4월28일 서울의 낮 최고기온은 영상 7.8도를 기록했다. 바람을 고려한 체감온도는 그보다 낮았다. 봄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4월 하순의 서울 지역 낮 최고기온이 10도 아래로 떨어진 것은 1908년 기상관측 시작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전국적으로도 대전의 낮 최고기온이 6.7도를 기록한 데 이어 경기 수원 7.6도, 대구 8.6도, 전북 전주 8.2도, 광주 9.8도, 경남 마산 8.8도 등으로 대부분이 10도 아래의 쌀쌀한 날씨였다.
바람을 동반한 찬 날씨는 봄에 수확하는 농작물에 치명적이었다. 제때 꽃을 피워야 하는 다른 농작물도 피해를 입기는 마찬가지다. 이상저온은 이날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겨울 영하 기온이 약 80일간 지속되면서 이미 피해가 커졌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집계한 피해 현황을 보면, 이상저온으로 인한 피해는 여의도 3배 면적인 2464ha에 이른다. 이런 현황은 피해가 직접 확인되고 조사가 완료된 작물에 한정된 것이고, 지금 막 꽃을 피우는 사과, 복숭아, 배, 포도 등 과수작물은 정확한 피해를 5월이 넘어야 알 수 있다.
일조량도 최근 40년 만에 최악
이상저온 피해가 가장 심각한 전북에서는 복분자 농사가 힘들게 됐다. 전체 경작지 2380ha의 9할이 넘는 2180ha에서 복분자가 동사했다. 피해액만 4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제주의 조생종 양파도 타격이 심하다. 3월의 이상저온으로 재배 면적의 30%인 266ha가 피해를 봤다. 감귤도 추운 날씨로 발아가 평년보다 늦어지고 꽃수도 많이 줄어들어 피해가 예상된다. 지난 3월에는 이상저온과 함께 동반된 강풍으로 경북 영덕·울진 지역의 시설하우스가 다수 피해를 입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4월29일 이상저온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동해’로 인정하고 농가에 다시 파종하는 데 드는 비용과 농약비, 생계유지비 등으로 24억원을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낮은 기온보다 농작물에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일조량이다. 최근 40년과 비교해 최악의 상황이다. 지난겨울은 강수일수가 가장 많았다. 이번 봄 전국 평균 일조시간은 평년의 70% 수준에 그쳤다. 일조량 부족으로 인한 피해 규모는 동해 피해의 5배가 넘는 1만4천ha에 달한다. 경남 함안의 수박 피해 면적은 1500ha에 이르며, 대부분 농가에서 수확량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을 정도다. 전북 고창 등 다른 수박산지도 피해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딸기·화훼·토마토·오이 등 작물도 160ha가 수확물을 절반도 건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4월19일 사상 처음으로 일조량 부족을 재해로 인정하면서 농가에 3467억원을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일조량 부족의 기준에 대한 현행 규정이 없어 정부는 10일 단위로 평년보다 일조량이 20% 이상 감소한 현상이 연속 2회 이상 발생하면 재해로 인정한다는 기준을 신설했다.
정부의 대책에 대해 농민들의 불만은 높아만 가고 있다. 현행 대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해당 작물을 다시 재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제여서 농민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곧 수확기가 오는 수박을 예로 들면, 1ha당 1700여만원의 생산비가 들어가지만, 정부 지원은 대파비(다시 파종하는 데 들어가는 종묘비용)를 기준으로 196만원만 나온다. 그나마 보상개념이 아니어서 지원금의 8할이 융자금이다. 이는 고스란히 농가부채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지원 대상이 되려면 피해작물을 전부 걷어내야 하는 것도 문제다. 피해를 입지 않은 작물도 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지원금을 받게 된 지역은 해당 작물의 생산이 아예 불가능해 가격급등으로 소비자들 또한 피해를 입는다는 지적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곽길자 정책국장은 “생산비의 10%정도밖에 보전되지 않는 규모의 지원금으로 피해보상은 터무니없다”며 “현재 정부의 지원 기준이 전체 경작지의 30% 이상 피해를 입은 농가로 국한되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곽 국장은 “이번 기회에 농가피해에 대한 보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담은 농업재해보상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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